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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몽예 Apr 17. 2020

3. 6 사이즈 라텍스 장갑

외과에서


외과는 항상 전공의가 부족했다. 전공의가 부족하니 펠로우와 인턴이 일을 나눠서 했다. 어떤 경우에는 수술 중에 일손이 너무 부족해서 폴리클(학생 실습생)이 스크럽(수술에 참여하는 것)을 서기도 했다. 나는 폴리클 시절에 외과 실습을 돌면서 자잘하고 어수룩한 실수들을 많이 했는데, 다른 과에서라면 꾸지람을 들을만한 황당한 실수들도 외과 교수님들은 호탕하게 웃어넘겼던 것이 좋은 기억으로 남아있었다. 


그러나 학생 신분을 벗어나 의료인으로서 외과를 돈다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었다. 바이탈(vital sign)을 다루는 과였기에 항상 긴장 상태여야 했고, 수술실에서의 실수는 곧 환자의 안위와 직결되었기 때문이다. 특히 우리 병원은 외과 전공의가 턱 없이 부족해서, 인턴이 환자 주치의를 맡아야 했다. 그 말이 무슨 뜻이냐면, 내가 주치의로서 blood culture(균 배양을 위한 정맥 채혈), EKG(심전도), foley insertion(도뇨관 삽입) 오더를 내리면, 그대로 내가 인턴이 되어서 그 일을 해야 된다는 것이다. 이런 것은 아주 미미한 일에 불과했고, 정말 부담스러운 점은 내가 환자를 책임져야 한다는 것이었다. 당연히 교수님과 펠로우가 최종 점검을 하기는 하지만, 1차적으로 내가 낸 수액, 약물, 검사에 따라 전혀 다른 결과를 낼 수도 있었다.


나는 약간의 강박과 약간의 수행 불안이 있어서 내게 맡겨진 일이 많을수록 심한 스트레스를 받았다. 나는 무조건 모든 일을 완벽하게 해내야 한다는 부담이 있었기 때문에 처방창에 오더를 입력하고는 세 번 네 번씩 확인을 했고, 그러다 보면 하루에 2시간 정도 자는 것은 사치처럼 느껴졌다. 게다가 나는 나름 실연당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아주 흠집 내기 좋은 물렁한 상태였기에, 조금의 스트레스에도 무너져 내릴 것만 같은 깊은 절망감을 느끼고는 했다.


외과 주치의를 하면서 유난히 신경이 쓰이는 환자 한 분이 있었다. 나는 처음 외과 인턴 일을 시작하던 일요일에 오더 한 줄 못 내린 상태로 응급 수술에 들어갔는데, 30년 전에 받은 appendectomy(충수돌기절제술) 이후 서서히 복강 유착이 진행되어서 장 폐색이 엄청나게 심한 분이었다.


나는 잠깐 스크럽을 서다 손을 바꾸고 나왔지만, 그게 그 분과의 첫 조우였다. 얼굴 대 얼굴이 아니라, 6 사이즈짜리 라텍스 장갑과 조심스레 들어 올려진 소장으로써.


당연하게도 환자분 상처는 좋지 않은 상태였고, 나는 하루에 2회에서 많게는 4회까지 드레싱을 했다. 외과, 그것도 처음 하는 주치의 일에 치여서 어떤 날은 밤 11시에 쭈뼛거리며 병실을 찾았다.


인턴 문화 행사로 병원에 늦은 복귀를 하던 날에는 사복 차림에 허겁지겁 가운만 걸쳐 입고 드레싱을 했다. 상처도 많이 나았고, 이미 낮에 2번이나 소독된 상태였지만, 잠들기 전 찾아와 새롭게 거즈를 대고 오늘은 운동을 좀 하셨냐, 기분은 어떠셨냐 물어보는 것이 아저씨와 나의 암묵적인 약속이었다.


상처는 시간이 갈수록 눈에 띄게 좋아졌다. 상처 배양을 나가야 하는데 농이 전혀 나오지 않아 불가능한 정도였다. 거의 완전한 금식 상태로 한 달을 보내던 아저씨가 미음과 죽을 드실 수 있게 되었을 쯤, 내가 하루에 한 번만 소독을 해도 된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쯤, 내 외과의 마지막 주가 지나고 있었다.


나는 그 잔인한 5월의 마지막을 정말이지 힘겹게 보내고 있었다. 일은 익숙해졌지만 작스런 실연은 도통 익숙해지지 않았다. 스테이션에서 조금만 귀찮은 일을 만들면 애꿎은 간호사들에게 날을 세웠다. 그러나 나는 그분에게만은 처음부터 끝까지 상냥하고 좋은 의사로 기억되고 싶었다.


내가 '오늘은 회식이라 조금 일찍 하고 가요'라며 소독을 한 다음날, 아저씨는 내 손에 컨디션 두 개와 초코칩 쿠키를 쥐어 주었다. 그게 내 주치의 마지막 날이었고, 나는 평소와 다름없는 드레싱을 마쳤다. 아저씨와 나는 조금 눈꼬리가 빨개졌다.


일주일 뒤, 나는 본원 병원으로 돌아와 순환기내과 인턴으로 변신해 있었다. 하루에 족히 30개는 넘는 심전도를 찍으며 내가 심전도 기계인지, 심전도 기계나 나인지 헷갈리는 물아일체를 경험하던 중에 분원의 대장항문외과 펠로우 선생님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뭐지 내가 뭐 실수하고 왔나'


긴장하며 받은 전화에서 펠로우 선생님은 장난스럽게 외과 주치의 벗어나니 목소리부터 편해졌다며 놀렸고, 이어서 반가워할만한 분을 바꿔주겠다고 말했다.


"선생님 저 오늘 퇴원해요.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아저씨였다. 내가 한 달 전 외과 인턴을 시작할 때 응급 수술로 입원했으니 한 달하고도 조금 넘는 시간 동안 이어졌던 병원 생활이 이제야 끝이 나는 것이었다. 아저씨는 이제 밥도 거뜬히 먹고, 언제 그런 상처가 있었냐는 듯이 배가 부를 땐 배를 두드린다고도 했다.


"좋은 의사가 될 거예요."


내가 이제껏 들은 칭찬 중에 어쩌면 제일이었다. 어쨌거나 나는 제대로 된 의사로 살기 위해 이런 삶을 어떻게든 끌고 나가려고 하고 있으니까. 하루에 2시간이라도 자는 것을 다행으로 여기고, 문에 끼어 손이 퉁퉁 부어도 병원에 가지 못하고, 1년 넘게 만난 남자친구와 헤어져도 울 시간이 없는 삶을. 그 날 나는 술을 조금 마셨고, 조금 울었고, 마음이 많이 먹먹했다.


그리고 6월의 어느 날, 매일 아침 가슴팍을 드레싱 해야 하는 할머니가 체리를 주셨다. 한 개만 먹겠다고 했는데 인턴 숙소에 돌아와 가운 주머니를 보니 체리가 한가득이었다. 체리를 야곰야곰 먹으면서 가만히 누워 있자니 그때 생각이 났다.


찬란했던 5월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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