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40하고 싶은 불혹

브런치 스타트

by Renaissance

2023년 6월부터 만 나이를 적용한다고 한다. 정부의 대대적인 홍보를 보며 양가적 감정을 느꼈다. 나는 올해로 40이 되었는데 만 나이로는 39세다. 숫자에 불과한 나이이고 백세 시대라지만 나이의 앞자리가 바뀔 때마다 느끼는 감회는 남다르다. 이십대에서 삼십대가 되었을 때도 그랬고, 삼십대에서 사십대가 되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이제 여론조사 전화가 오면 연령대를 사십대로 답해야 하고, SNS의 각종 테스트를 재미로 할 때에도 40대를 클릭할 때마다 씁쓸한 미소를 짓는다. 신문을 읽을 때에도 우리나라 이삼십대가 이렇고 저렇다 라는 기사를 보면 기자가 제대로 조사를 안 하고 썼네 라며 비판적으로 보다가 나는 더이상 이삼십대에 속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그렇게 겨우겨우 40대에 적응한지 5개월이 지났다.


갑자기 다시 30대가 되는 기분은 썩 좋지 않다. 스스로를 40대의 카테고리에 집어넣고 적응해놨더니 다시 30대가 되라니. 스스로를 사십대라고 했을때 위로가 되는 부분도 분명히 있다. 공자는 40세를 불혹이라고 하였다. 어떤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 말이 무슨 뜻인지 40세가 되니 알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에너지가 줄어들기 때문에 쉽사리 마음을 움직이지 않으니까. 에너지이 총량이 하루하루 줄어드는게 느껴질 정도니 쉽사리 무엇을 결정하지 못하고 신중해질 수 밖에 없다. 예전엔 그렇게도 쉽게 여행을 갔지만, 이젠 어지간 해서는 집 밖에 안 나간다. 어떤 모임이든 시간만 허락한다면 모두 참석했지만, 이젠 그 모임의 특별함 정도를 점수를 메겨서 나간다. 1년에 한번 모이는 모임은 좋은 점수를 받지 못하고 2-3년만에 모이는 정도라야 점수를 받는 정도이니 모임에 거의 나가지 않는다고 봐도 무난하다. 상황이 이럴진데 내가 30대라면 내가 무언가 잘못하고 있는 것 같지만 40대라고 하면 왠지 그래도 될 것 같은 기분이랄까. 아무리 운동을 하고 체력을 끌어올려도 에너지의 총량이 줄어드는 것에 대해 나이가 납득을 시켜주는 것이 사십대가 나에게 주는 위안이다.


사십대가 삼십대보다 나은 또 한 가지는 영화판 특유의 보수적인 문화 때문이다. 영화감독의 상업영화 입봉 나이는 점점 높아지고 있다. 2000년대까지는 30대에 대부분 감독 입봉을 했지만, 2010년대 후반부터 급격히 입봉 나이가 올라가기 시작했다. 2019년에 개봉하여 크게 흥행한 엑시트가 신인 감독의 입봉작이었는데 40세에 입봉한 것이다. 그때까지만 해도 여러 인터뷰에서 늦은 나이에 입봉한 것에 대한 질문을 하고, 감독은 본인이 그렇게 늦게 입봉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한다. 하지만 불과 2년 후인 2021년 영화 인질이 개봉하고 45세 신인감독이 입봉을 했을때 그 누구도 늦게 입봉한 것에 대해 질문하지 않는다. 2022년에 개봉한 올빼미도 신인감독의 입봉작인데 감독님의 나이는 50세다. 한국 영화시장의 사이즈가 급격히 커지고 상업영화 블록버스터의 제작비가 200억을 넘어서게 되니 투자가 보수화되는 수순을 밟은거다. 신인보다는 경력이 있는 감독을 선호하게 되고, 신인을 써야하는 경우 어린 감독보다는 나이가 있는 감독을 선호하는 거다. 오리지널 스크립트 보다 원작이 있는 작품을 선호하고 기존 작품의 후속편을 선호하게 된다. 안 그래도 규모에 의한 보수화가 일어나고 있었는데 코로나라는 직격탄을 맞자 그 속도가 무시무시하게 빨라진 기분이다. 이 이야기는 다른 글에서 풀기로 하고, 여하튼 그래서, 이런 보수화된 분위기에서 삼십대 시절에는 맨날 '감독님은 아직 어리시니까' '감독님 되게 어리시네요'라는 소리를 들었으니 사십대가 된 것이 오히려 좋지 않을까 생각한 것이다.


사실 만 나이 적용에 나는 찬성한다. 전통이니 관습이니 하는 이유로 비효율을 용인하는 것을 못 마땅하게 생각하는 편이다. 누가봐도 메트릭 법이 좋음에도, 야드파운드법을 쓰고 있는 미국이 그 예이다. 미국에서도 오차가 허용되지 않는 건축 같은 분야는 미터법을 쓴다. 웃기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만 나이 적용에 찬성하는데, 사실 우리나라에서 이놈의 나이가 그토록 중요한 이유는 사실 다른데에 있지 않나? 위아래가 그토록 중요해지는 이유, 바로 존대다. 말을 누구에게 높이고 낮추느냐의 문제가 너무너무 중요한 나머지 빠른이냐 아니냐, 학번으로 하냐 나이로 하냐 별의별 군상이 펼쳐진다. 나는 과감히 한 가지를 없앴으면 좋겠고, 그것이 반말이었으면 좋겠다. 모두가 반말하자고 나라에서 정하면 반발이 엄청날 것이다. 유교문화에 아직도 지배받는 한반도 민족을 달래기 위해선 모두가 존대말을 하자고 해야 통한다. 내가 어린놈에게 존대를 하는건 어린놈이 나에게 반말을 하는 것보다 참을만 하기 때문이다. 벌써부터 나이에 대한 혼란으로 몇 살이냐고 물어보는 것이 아니라 몇 년 생인지를 물어보는 판국이다. 초면에 그놈의 나이를 물어봐야 하는 이유는 결국 말을 누가 높일 것이냐 위아래를 구분해야 하기 때문이다. 존대로 통일하면 이제 초면에 나이를 물어보는 무례는 없어질 것이다. 만나자마자 나이부터 물어보는 나라는 몇 안 될 것 같다. 한국 뿐일수도 있지만 내가 모든 나라를 가본 것은 아니니 조심스럽다.


영화 각본을 쓰느라 바빠야 하지만 이래저래 시간이 남을 때가 많은 프리랜서, 불혹에 브런치를 시작한다. 그리고 나는 2주 후에 39세가 될 예정이다. 불혹에 시작한 브런치를 39세의 내가 이어나간다니, 타임슬립 물이 아니고서야 언제 이런 경험을 해보겠나 싶어 이보다 더 좋은 타이밍은 없다는 생각에 급하게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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