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영화계 불공정 계약 이슈가 뜨겁다. 각본과 연출 계약을 묶어서 계약을 한 후 영화 제작이 지지부진하자 계약해지를 요구하는 감독을 무시하고 다른 감독을 기용해 영화를 촬영하고 있다는 내용이다. 억울한 감독은 자신의 사연을 만화로 그려 올렸고 여러 커뮤니티에 퍼졌다. 공중파 뉴스에도 방영되어 이슈가 뜨거워지자 제작사는 반론 기사를 냈다. 기사 댓글을 보니 제작사가 원하는 대로 되고 있는 것 같다. 불공정 계약에 대한 이야기는 하지 않고 영화 제작의 실질적인 어려움에 주의를 돌려 감독도 잘못이 있다는 식으로 프레이밍을 한 것이다. 나도 그 제작사와 일을 해 봤다. 시놉을 완성하고 트리트먼트 수준까지 개발하고 난 후 각본 계약만 하면 되는 상황에서 이상한 계약서를 내밀었다. 나는 이런 계약서로는 못 한다고 했고, 현재 이슈를 보면서 그때의 선택이 옳았음을 깨닫는다.
상업영화 입봉을 하고싶은 신인감독의 욕망을 이용하는건 아마 전세계 모든 제작사 공통일 것이다. 하지만 계약은 다른 문제다. 제대로된 근로계약서를 맺고 일하는 회사원에게 주말 등산을 요구하는 것과, 주말까지 일하는 것으로 근로계약을 맺게 하여 주말에 등산에 데려가는 것은 하늘과 땅 차이다. 정당한 계약과 노동에 대한 보상을 제공하면서 승진에 대한 욕망을 이용해서 조금 더 부려먹는 것과, 노예계약을 맺고 노예처럼 일하라고 하는 것이 어찌 같겠는가. 전자가 잘못되지 않았다는 것이 아니라, 최소한 지켜야할 예의와 선이 필요하다는 얘기다. 내가 그 제작사와 끝까지 합의를 보지 못한 부분이 기간 명시였다. 계약서에 기간을 명시하자는 나의 주장과, 자신은 계약서에 기간을 넣어본 적이 없다는 그의 입장이 평행선을 달렸고 결국 계약은 성사되지 않았다. 나는 트리트먼트까지 써놓고 돈 한푼도 받지 못하고 제작사와 결별했다. 이번에 이슈가된 사건의 계약서를 보니 역시나 기간이 명기가 되어있지 않았다. 거기서 모든 문제가 발생한 것이다.
계약서에 기간을 명시하지 않으면 평생 계약이 된다. 괜히 노예계약이라고 부르는 것이 아니다. 피계약자에게 너무도 불리한 이런 관행을 고집하는 제작사는 없어져야 한다. 더이상 영화계에 발을 붙이지 못하도록 더 이슈화시키고 아무도 그런 짓을 못하도록 만들어야 한다. 나도 불공정 계약을 맺자는 제작사를 많이 만났고, 그런 계약을 나는 하지 않아서 지금까지 상업을 찍지 못한 것일 수 있지만, 나의 선택이 옳다고 믿는다. 그런 계약 중 최악의 케이스를 하나 언급해보고자 한다.
유명 감독이 나에게 OTT 시리즈 각본을 써보겠느냐 물었다. 좋아하는 감독이기에 영광이라고 생각했고, 소개해준 제작사 대표를 만났다. 책이 원작인 작품이었는데 내가 워낙 좋아하는 장르라서 잘 쓸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내가 건네받은 계약서는 10부작 시리즈 계약서가 아닌 1부 임시 계약서였다. 계약서 조항이 가관이었는데, 1부만 쓰는 조건으로 200만원을 주고 글의 퀄리티를 심사하여 본 계약을 하자는 내용이었다. 단, 본 계약을 체결하게 되지 않더라도 내가 쓴 1부 각본에서 캐릭터, 주요 설정을 채용할 수 있고 피계약자는 그것에 대해 어떤 법적 조치도 취하지 않는다는 조항이 들어있었다. 나는 회사를 다닌 경험이 있는 사람이고, 지나치게 원리원칙을 따지는 법치주의라고 선배들에게 워낙 욕을 많이 먹었던 터라 최대한 유도리를 발휘하는게 사회생활의 조건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나의 이런 성격이 제작자들에게 불공정 계약을 해도 된다는 신호로 받아들여졌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 제작사는 나와 만나자마자 이런 계약서를 들이밀었다. 내가 잘못한 것이 아니라 이 업계 자체가 잘못되었다는 것이 증명되는 순간이었다. 무례한 상대에게 예의를 차릴 필요가 없다고 판단하고, 영화계 들어와서 처음으로 강하게 얘기했다. 나를 뭘로 생각하고 이런 계약서를 주는 거냐고. 내가 왜 이 계약서에 서명할 것이라고 생각하냐고. 상대방의 반응이 더 가관이었는데, 본인들은 내가 독립장편에 입봉하고 상업영화 각색을 한 경력이 있는줄 몰랐다는 것이다. 그럼 그런 경력이 없는 신인에게는 이런 계약을 해도 된다고 생각하는 거냐고 되물었다. 죄송하다고 사과를 받긴 했지만, 본 계약을 체결하자는 제의는 받지 못했다. 내 지론 중 하나는 사과는 행동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말로만 하는 사과는 아무 의미가 없다. 진짜 미안한 사람은 행동으로 나타나게 되어있다. 그래서 이 제작사는 계속 이딴식으로 신인을 이용하겠구나 확신을 가지고 망하라고 기도했지만, 여전히 잘 나가고 있다. 애석하게도 그 작품은 좌초되지 않았고 애플에서 제작 중이라고 하니, 역시 유명 감독의 작품은 투자가 잘 되는구나. 어떤 신인이 노예 계약을 맺고 본인의 인생을 갈아넣어가며 각본을 썼을지 작품 크레딧을 보면 알 수 있게 되겠지.
시리즈의 첫회 각본을 쓰기 위해서는 1부에 등장하는 캐릭터 설정을 해야한다. 보통 시리즈 1부에는 모든 주요 캐릭터가 나온다. 각 캐릭터를 사람처럼 느끼게 하기 위해 어떤 성격을 가졌는지, 가정환경은 어땠는지, 이성관은 어떤지, 취미는 무엇인지 진짜 사람을 만들어내기 위한 빌딩 작업에 들어간다. 이것을 탄탄하게 잡아놔야 각본을 쓰는데 막힘이 없다. 이 캐릭터가 상대방의 무례에 어떻게 대응하는지, 위협에 어떻게 반응하는지, 유혹에 어떤 행동을 하는지 캐릭터를 잘 잡아놓으면 바로 쓸 수 있게 된다. 이걸 다 쓰는 가격을 200만원으로 책정한 제작사가 애플에게 천문학적인 돈을 투자받는 시장이다. 모두가 애꾸눈인 세상이라 내가 잘못된게 맞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