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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은 왜 시나리오보다 어려울까

by Renaissance

나에게 한정된 이야기다. 시나리오 쓰기와 소설 쓰기를 대결 붙일 의도는 없다. 소설만 쓰던 작가님은 영화 시나리오 쓰기가 더 어려울 것이고, 영화 시나리오 작가에겐 소설 쓰기가 더 어려울 것이다. 영화 시나리오만 쓰던 내가 소설을 쓰면서 좌절하는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영화 시장이 커진다는 이야기는 그만큼 투입되는 자본이 커진다는 것이고, 자본이 커진다는 것은 투자 성향이 보수화 된다는 얘기다. 10,000원짜리 제품을 구매할 때와 100,000원짜리 제품을 구매할 때 고민하는 시간의 차이를 생각해 보면 쉽다. 그 단위가 커지면 커질수록 보수적인 선택을 하는 것은 당연한 현상이다. 하지만 40대부터 이미 언제 잘릴지 걱정해야 하는 회사원이라는 직업이 안정적인 직업이라고 하는 것처럼, 안정적인 투자처럼 보이지만 전혀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다.


투자자들은 원작이 있는 영화에 투자하는 것이 안정적일 거라고 생각한다. 웹툰, 소설, 만화 등 다른 시장에서 성공한 원작을 가지고 영화를 만들면 기존 매체의 팬이 영화를 볼 것이라는 생각. 혹은, 이미 성공한 콘텐츠를 영화화시키는 것이니 그만큼 홍보가 쉬울 것이라는 착각. 한국영화 역대 흥행순위를 보면 10위까지 어벤저스 엔드게임, 겨울왕국 2, 아바타를 제외하고는 모두 한국영화인데, 이 중 원작이 있는 영화는 신과 함께-죄와 벌뿐이다. 나머지는 모두 오리지널 스크립트다. 웹툰 원작 영화 중 손익분기점을 넘는 영화는 손으로 꼽을 수 있을 정도로 적다. 단순 통계만 보더라도 웹툰 원작 영화가 오리지널 스크립트 영화보다 훨씬 수익성이 낮고 고위험 투자지만, 원작이 있는 작품이 안정적인 투자일 것이라고 착각한다. 왜 큰돈을 쓰는 회사가 통계를 무시하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 한국 영화시장만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큰 영화시장을 가진 나라는 모두 동일한 패턴을 보인다. 가장 극단적인 예가 일본인데, 고레에다 히로카즈나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 같은 거장 감독 외에는 오리지널 스크립트로 영화를 만들 수가 없다. 일본에서 영화란 책이나 만화를 영상으로 옮기는 작업을 뜻한다. 한때 전 세계를 호령하던 일본 영화는 극도로 보수화되어 이제 다른 콘텐츠 시장의 하청업체 역할이나 하게 된 것이다.


한국의 영화시장이 커지면 커질수록 언젠가 일본 영화시장의 전철을 밟는 것이 아닐까 걱정하던 영화인들은, 코로나의 발발로 그것이 단 2년 만에 현실화된 것을 경험했다. 걱정하던 그 '언젠가'가 이렇게 빨리 올 줄 아무도 몰랐다. 급격하게 보수화된 투자는 곧 웹툰 IP 선점 전쟁으로 이어졌다. 요즘은 새로 웹툰이 나오면 한 달도 채 되지 않아 IP가 팔린다고 한다. 웹툰을 하는 작가에겐 짭짤한 부수입이겠지만, 영화인에겐 절망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열심히 쓴 시나리오는 받아주지도 않는 제작사들이 이제 막 나온 검증되지 않은 웹툰은 몇 화만 보고 신인감독의 오리지널 스크립트보다 비싼 가격에 사는 것이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대형 제작사들은 신인들의 오리지널 스크립트를 받지 않는다. 보여준다고 해도 거부한다. 코로나로 현실이 되어버린 우리나라의 영화시장의 불편한 현실이다.


영화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웹툰 스토리를 쓰거나 소설을 쓰는 게 더 빨리 상업영화에 입봉 하는 길이 아니냐며 자조적인 이야기를 자주 한다. 하나의 영화 시나리오를 완성하는데 걸리는 에너지와 시간을 웹툰 스토리나 소설을 쓰는데 쓰자는 이야기다. 나는 영화 오리지널 스크립트를 웹툰화시키는 것에 관심이 많은 웹툰 제작사 대표를 만나 내 시나리오 중 웹툰에 어울리는 것을 작업해 보자는 제의를 받은 적이 있다. 세계관은 영화보다 웹툰에 더 가까운 디스토피아였고, 한국 영화시장에 대해 잘 모를 때 그냥 만들고 싶어서 썼던 패기 있는 시나리오였다. 지금은 그런 영화에 절대 투자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런 아이템이 떠오르면 노트조차 해놓지 않는다. 서글픈 현실이지만 나는 늙어가고 있고, 영화 시나리오 한편을 쓰는 것은 그만큼 많은 것을 쏟아부어야 하므로 될 것 같지 않은 시나리오는 안 쓰는 게 맞다. 계약을 맺고 한창 웹툰화를 진행하다가 대표가 프로젝트를 잠시 멈추자고 했다. 웹툰은 매화 액션이 들어가야 하고, 호기심을 자극하면서 끝나야 하는 등 자극성을 극대화시키는 것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예전 중국 무협 영화 시리즈와 비슷하다. 영화 시나리오를 그런 식으로 바꾸다 보니 점점 원래 시나리오가 가지고 있던 매력도는 떨어지고 여타 다른 웹툰과 별 차이가 보이지 않는 평범한 작품이 되어가는 것을 보고 나보다 대표가 먼저 멈추는 게 낫겠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리고 그가 제안한 것이 소설이었다.


소설은 시나리오와 작법이 다르다. 시나리오를 잘 쓴다고 해서 소설을 잘 쓰리라는 보장은 없다. 출판사도 병행하던 그 제작사는 나에게 소설 계약을 하자고 제안한 것이 아니고, 해당 작품을 '혼자서' 소설로 써보는 게 어떻냐고 제안한 것이다. 소설의 1/3 정도만 쓰고 보여주면 그때 계약을 논의해 보자고 했고, 그런 판단을 내린 제작사 대표가 나쁘다고 생각한 적은 없다. 소설을 잘 쓸지 전혀 판단이 되지 않는 상황에서 시나리오 능력만 보고 계약을 하는 건 너무 리스크가 크다. 그래서 혼자 써보기로 마음먹고 쓰다가 접고 쓰다가 접고 한 것이 벌써 2년이다. 도대체 소설은 왜 이리도 어려운 것일까. 시나리오는 어떻게든 완성해 내는 내가 왜 소설은 끝내지 못하는가!


첫 번째 떠오르는 이유는 동기, 모티베이션이다. 첫 장편 시나리오를 쓸 때 내 모든 것을 갈아 넣었다. 회사를 그만두고 이거 저거 공부하고 놀다가 영화를 해보겠다고 해서 처음 한 것이 장편 시나리오를 쓰는 것이었다. 학부 전공도 전혀 상관없는 상경계고 영화 관련 동아리도 안 했고 주변에 영화하는 사람이 한 명도 없는 상황에서 혼자 할 수 있는 것을 찾다가 시나리오를 택한 것이다. 당연히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뛰어들었으니 어려울 수밖에. 그래도 영화를 해보겠다는 일념 하나로 어떻게든 써냈고, 장편 시나리오 한 편 못 쓰는 사람이 영화감독이 될 수는 없다는 생각으로 병이 나면서까지 썼다. 영화감독이 되고 싶은 단순한 욕망 하나로, 그 욕망이 확실했기 때문에 완성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시나리오를 써본 사람은 알겠지만, 첫 장편 시나리오를 완성하고 나면 두 번째는 비교하기 어려울 정도로 쉬워진다. 그만큼 첫 장편을 완성시키기가 어렵다. 그래서 대학에서 강의를 했을 때도 학생들에게 첫 장편 시나리오를 최대한 어릴 때 완성하라고 조언했다. 힘든 일이기 때문이기도 하고, 빨리 해본 만큼 남은 인생에서 더 많은 시나리오를 쓸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소설가가 되고자 했던 적은 단언컨대 단 한 번도 없다. 책을 많이 읽기 시작한 것도 대학을 들어가고 나서이고, 글을 쓰기 시작한 것은 20대 중후반부터다. 활자 중독 수준으로 글을 좋아하거나, 타고난 문필가가 아닌 이상 소설가가 되겠다는 꿈을 꾸는 사람은 드물다. 성공한 작가님 중에 우연히 글을 써봤더니 사람들이 좋다고 해서 소설가가 되었다, 하는 분은 내가 알기론 없다. 소설을 쓰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고, 소설가가 되겠다느 강력한 욕망이 없으면 완성시키기 어렵다. 나는 영화감독에 대한 욕망이 있는 사람이지 소설가에 대한 욕망이 있는 사람이 아니다. 소설을 쓰면 그것의 판권이 팔려 영화감독이 될 수 있을 거라는 가정의 확률을 따져보려면 통계를 봐야 하는데, 케이스를 찾기 힘들 정도로 희박하기 때문에 소설을 완성시킬 정도의 욕망이 나에게 부족하다.


다른 이유는 매체를 대하는 자세다. 영화 대학원에 가서 의아했던 것 중 하나가 시나리오를 완성시키지 못하는 전공자들이 꽤나 많다는 거였다. 시나리오를 쓰면 내가 가장 빨리 썼고, 두 번째로 빠른 동기가 한 편의 시나리오를 쓸 때 나는 두 편을 쓸 정도의 차이였다. 1년 동안 시나리오를 완성시키지 못한 사람이 수두룩 했다. 그러다 보니 동기뿐만 아니라 선후배를 만날 때에도 곧잘 받는 질문이 어떻게 그렇게 시나리오를 빨리 쓰느냐였다. 질문에 대한 답이 딱히 없는데 자주 질문을 받다 보니 답을 준비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다른 사람들과 나의 차이를 탐구하기 시작했다. 내가 내린 결론은 '매체에 대한 경외심'이었다. 고전과 거장의 영화를 사랑하는 사람일수록 시나리오 쓰는 속도가 늦었다. 영화에 대한 경외심이 워낙 높은 탓에 본인이 쓰고 있는 시나리오가 쓰레기처럼 느껴지고, 높은 완성도를 지향하다 보니 쉽사리 시나리오를 써내지 못했다. 나는 장르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이고 고전 영화는 30대에야 즐긴 사람이니 영화에 대한 경외심이 그렇게 높은 사람이 아니다. 내가 그런 명작 영화를 찍을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지도 않는다. 그래서 랩탑을 펼쳐 글을 쓰는 것에 막힘이 없다. 똑같은 논리를 소설로 가져와보면, 나는 20대에 들어서야 책을 좋아한 사람이다 보니 무협지, 판타지, 라이트노벨 같은 접하기 쉬운 장르를 거치지 않았다. 시작부터 장르 소설로 하고 문학책을 읽다 보니 소설에 대한 경외심이 꽤나 높은 것 같다. '이 정도는 나도 쓰겠는데'라는 작품을 접한 적이 없는 것이다. 영화는 많이보다 보면 '이 정도면 나도 찍겠다'라던가, '이 정도면 나도 쓰겠다'라는 작품을 많이 접할 수 있다. 네이버 리뷰에만 봐도 그런 댓글이 얼마나 많은가. 나도 모르는 사이에 소설에 대한 높은 스탠더드를 정해놓고 그것에 맞추지 못하는 글은 쓰레기라고 생각해 다시 쓰고를 반복하다 완성을 시키지 못하는 것이다. 시나리오 완성을 시키지 못하는 동료들에게 영화에 대한 경외심을 버리고 쓰레기를 쓴다는 생각으로 무작정 써보라고 조언하던 내가 똑같은 짓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니 사람은 참 자기 객관화가 어려운 존재다.


캐스팅이 길어지면서 시간이 뜨니 미완성된 소설을 써보자고 마음먹었다가, 처음부터 다시 썼던 적이 많아 소설의 시작이 여러 형태로 나와있는 것을 보면서, 어떤 버전으로 소설을 이어가 볼까 고민하다가 이런 글을 쓰고 있다. 어유 어려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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