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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표는 목표를 갖지 않는 것이다

by Renaissance

새로운 목표가 생겼다. 지금까지 세웠던 목표 중에 가장 달성하기 힘든 목표다. 왜냐하면 목표를 세우지 않는 것이 목표이기 때문이다. 목표를 세우지 않기를 목표로 정하는 순간 실패다. 이런 멍청한 짓을 하는 이유는 목표 없이 못 사는 인간이기 때문이다.


목표를 설정하고 나면 그것을 이루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성격이다. 그래서 일부러 목표를 내 능력밖으로 설정한 후에 미친 듯이 노력한다. 성과위주로 본다면 전혀 나쁠 것이 없다. 이런 직원이 있다면 사장은 행복할 것이다. 목표를 이룬 후에 느끼는 성취감은 그 어떤 오르가슴과 비교하기 힘들 정도로 어마어마하다. 그 뿌듯함, 그 자신감. 학창 시절 내가 좋은 대학에 갈 거라고 아무도 생각하지 않았다. 우리 부모님조차도. 하지만 난 목표를 높게 잡았고, 모두의 비웃음을 샀다. 여자친구도 비웃었다. 현실적으로 생각하라고. 너무 진지한 그녀를 보고 화가 났다. 내 가능성을 이 정도로 보고 나를 만나고 있었다니. 그녀와 헤어지고 난 후, 잠을 자지 않으면 남보다 두 배 공부를 할 수 있다는 다소, 아니 많이 멍청한 생각으로 공부를 했다. 그래서 침대에 눕지 않았다. 잠을 안 자는 건 불가능하지만, 침대에 눕지 않는다면 편하게 못 자니 잠을 줄일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이었다. 책상에서 앉아서 쪽잠을 잤고, 하루 세 시간 이상 자지 않은 것 같다. 그래서 아무도 가지 못할 것이라고 했던 대학에 갔고, 목표를 이뤘다.


불가능해 보이는 목표를 세우고 그것을 이뤄본 자가 가지는 자신감은 무시무시하다. 실제로 불가능해 보였던 목표를 달성한 후 목표로 삼은 것은 모두 이뤘다. 살을 10킬로 넘게 뺐고, 근육질 몸이 되었고, 원하는 회사에 갔으며, 영화감독이 됐다. 원래 목표는 '죽기 전에 영화 한 편을 찍는다'였다. 하지만 막상 독립 장편 영화를 찍고 개봉하고 나니, 상업영화를 찍고 싶어 졌다. 블락버스터 상업영화를 찍겠다는 새로운 목표를 세웠다. 불가능에 가까운 목표이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지만 불혹이 되니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이 목표를 꼭 이루어야 하는 건가?


최종목적지를 정해놓는 삶이 건강한 삶일까? 좋은 대학에 들어가서 허무함에 시달리는 친구들을 많이 만났다. 일생의 목표를 좋은 대학에 들어가는 것으로 생각했던 친구들이 목표를 이루고 나서 방황하는 모습들. 목표를 이루고 나면 성취감은 짜릿하지만 허무감이 곧 따라온다. 그래서 새로운 목표를 세우고, 목표 중독자가 되어간다. 이게 과연 올바른 모습일까. 무엇보다 '최종목적지'라는 게 삶에 필요한가? 지인 중에 본인은 검사가 되어야겠다고 강박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있었다. 그것도 서울대 법대 출신 검사. 그래서 서울대 법대에 갔고 사시를 준비하려는데 사시 폐지 소식이 들려왔다. 사시 합격자 인원을 매년 줄여나가고 로스쿨로 대체하겠다고 하니 미치고 팔짝 뛰지 않을 수 없었다. 자신은 서울대 법대 출신 사시 합격 검사가 되어야 하는데! 하지만 사시 합격 인원이 줄어드니 사시에 올인할 수도 없는 상황, 사시와 로스쿨을 동시에 준비했다. 다른 대학은 원서도 쓰지 않고 서울대 로스쿨만 지원했고, 시사와 로스쿨에 세 번 낙방하고 나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히키코모리가 되었다. 다른 대학도 써보라는 주변인들의 조언은 끝끝내 듣지 않았다. 최종목적지는 명확했고, 그걸 어기는 건 용납이 안 되는 일이니까. 왜 그렇게 꽉 막히게 생각하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했는데, 나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하는 뒤통수 해머 모먼트를 겪었다.


사시에서 로스쿨로 바뀌는 격변만큼 영화계는 코로나로 완전히 바뀌었다. 상업영화 자체가 만들어지지 않는 상황에서 신인 감독이 데뷔하기는 불가능에 가깝다. 그런 불가능에 도전하고 있는 나의 모습이 서울대 법대 로스쿨만 고집하는 사람과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생각해 보면 그와 나는 비슷한 점이 굉장히 많다. 목표한 바는 무조건 이루어내는 집념도 그렇고, 큰 실패를 경험해보지 못한 점도 그렇다. 도전하면 성공만 해왔기에 실패의 가능성을 열어두질 않는다. 실패를 받아들이지 못하기에 히키코모리가 된 것이고, 그 똑같은 전철을 내가 밟고 있다는 생각이 들자 공포감이 엄습해 왔다. 목표를 버려야겠다!


원대한 꿈, 최종 목표 따위를 갖지 말고 흘러가는 대로 살아보려고 한다. 잘 될지는 모르겠지만 상업영화 찍기는 이미 실패했다 가정하고, 아니 애초에 그런 목표가 없었다고 생각하고 살아보려고 한다. 실패해도 무너지지 않도록 미리 준비해야겠다. 연착륙을 위해서.


목적지 없는 운전 레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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