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페샬리 프리랜서
회사를 다닐 때 선배들이 내가 일하는 스타일을 보고 넌 자영업이나 프리랜서를 해야 한다고 조언하셨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그렇게 열심히 할 거면 자기 일을 해야지 왜 월급을 더 주지도 않는 회사를 위해 그렇게 열심히 일하느냐였다. 선배들의 지혜대로 나는 프리랜서의 길을 택했고, 하는 만큼 돈을 주는 생활에 만족하고 있었다. 영화를 시작하기 전까지.
영화계에서 많은 사람들을 만나며 느낀 점은, 영화라는 아름다운 매체를 활용해서 사람을 착취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광고계와 비슷한데 어차피 하고 싶어 하는 사람이 많으니까 굳이 네가 아니어도 된다는 마인드. 하지만 영화계는 정도가 심하다. 광고계는 월급을 짜게 주고 야근비를 안 주는 정도다. 영화계는 아예 돈을 주지 않으려고 하고, 최대한 인건비를 깎으려고 한다. 앞서 밝혔듯 나는 주어진 일을 최선을 다하는 스타일이라, 영화계에서도 페이가 많고 적음과 관계없이 최대한의 결과물을 전달했다. 그랬더니 해도 해도 너무할 정도로 돈을 못 받았고, 일을 할수록 가난해졌다. 영화 연출을 하고 싶다는 강한 열망을 상대방이 이용하는 것임을 깨닫고, 영화 연출 안 해도 된다는 생각으로 최저선의 몸값을 정하기로 했다.
재밌는 사실은 내가 그렇게 몸값을 스스로 올리고 나서 일이 줄지 않았다는 것이다. 똑같은 사람이 똑같은 일을 했는 결과물의 가격은 달라졌다. 나에게 일을 의뢰하는 사람들은 내가 제시한 몸값을 지불했다. 그만둘 생각으로 단가를 올리지 않았다면 지금까지 더 가난해져 있었을 것이다. 프리랜서는 스스로의 몸값 책정을 잘해야 한다는 말을 경험으로 깨달았다. 내가 싸게 일을 해준다고 해서 이 사람이 내 평생 고객이 되면 그것 또한 문제다. 맨날 그 단가대로 일을 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니 너무 단가를 후려치는 사람은 단칼에 잘라내야 나에게도 이득이다. 해피 엔딩 끝, 이면 좋겠지만 또 다른 문제가 발생했다. 계약을 계속 미루는 것이다.
단가가 높이지니 최대한 돈을 나눠서 주기를 바라고, 계약기간을 길게 잡는다. 그리고 계약서 조항을 협의한다는 명목으로 도장을 찍지 않고 질질 끈다. 내가 바꾸고자 하는 조항이 있으면 거기에 대한 피드백을 한 달 후에 주는 식이다. 그 와중에 나는 일을 한다. 돈을 받고 결과물을 전달해야 하지만, 자기네가 바쁘다 어쩐다 배우에게 전달해야 한다 별의별 핑계를 대면서 우선 결과물을 달라고 한다. 자기를 믿지 못하느냐, 계약서는 도장만 찍으면 되는 거 아니냐, 우선 결과물을 달라. 그래서 믿고 결과물을 전달하고 나면 계약서 도장을 찍지 않는다. 한두 번 당해본 것이 아니다. 그러면서도 액수가 크니까 그걸 놓치기 싫어서 나는 또 결과물을 전달하고, 또 당한다. 이런 식으로 신인들을 이용해 먹고 착취하는 인간들이 너무 많다. 그런 인간들이 언론 인터뷰에 나와 본인은 좋은 시나리오를 찾고 있다고 한다. '항상 새로운 시나리오를 찾고 있습니다.' 모든 제작자 인터뷰에 꼭 들어있는 말이다. 돈을 한 푼도 안 받고 시나리오를 써줄 호구를 찾는다고 솔직히 말해줬으면 좋겠다.
선은 스스로 정하는 것이다. 최근에 또 한 번 이런 일을 당하고 있어서, 다음 미팅에 선을 확실히 그으려고 한다. 영화 안 하면 되지 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