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istential crisis에 관하여
Existential crisis는 꽤나 자주 사용되는 영어 단어이다. 하지만 한국에서 '실존적 위기'라던가, '존재적 위기'라는 말은 자주 사용되지 않는다. 내 존재에 대한 의구심이 들 때 existential crisis라는 단어를 쓰는데, 가장 쉬운 예는 매트릭스가 있다. 영화 [매트릭스]에서 주인공 앤더슨(네오)는 본인이 살고 있는 삶이 현실이 아닐 수도 있다는 의구심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트리니티의 낚시에 흔쾌히 낚이고, 모피어스를 만났을 때 주저 없이 빨간약을 먹는다. 내가 사는 세상이 실재하지 않는다는, 나의 존재가 사실은 실체가 없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 바로 그 순간을 existential crisis라고 일컫는다. 동양의 장자가 호접지몽으로 실존에 대한 의구심을 먼저 표현했는데, 서양에서는 자주 쓰이고 우리나라 말로는 어색한 이 현실이라니. 이 글에선 그냥 실존적 위기라고 쓰겠다.
사랑해 마지않는 웨스 앤더슨 감독의 신작 [애스터로이드 시티]를 개봉하자마자 보고 왔다. 그랜드부다페스트 호텔 이후 반복되는 문법이 식상하긴 하지만, 젊은이들의 트렌드인 틱톡에서도 유행할 만큼(accidentally wes anderson 태그 참고) 그의 미학적 스타일은 확고하다. 그림을 그리듯 영화를 찍는 그이기에 반복되는 문법, 단조로운 스토리 등은 별로 중요치 않아 보인다. 미장센 만으로 모든 것을 표현할 수 있는 감독의 영화를 보면서 다른 걸 따지는 게 웃기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초기 필모그래프가 워낙 명작이 많기에 그런 영화를 다시 만들어줬으면 하는 아쉬움 정도지, 굉장히 만족스럽게 영화를 봤다. 참고로 내가 가장 좋아하는 그의 영화는 [스티브 지소와의 해저생활]이다. 이게 2004년 작이라니... 시간이 왜 이렇게 빨리 흐르는지...
여기서부터는 내 해석이니, 해석도 스포의 일환으로 보시는 분은 읽지 않으시길 추천드립니다. 그리고 내 해석은 영화만 보고 내린 주관적인 해석이므로 틀리다고 생각한다면 당신이 옳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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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장 감독의 새 영화는 실존적 위기에 대해 이야기하기 위해 연극의 포맷을 빌려 액자식으로 구성됐다. 우리가 사는 세상이 실제로 존재하는 것인지, 극 안에서 살아 움직이는 캐릭터는 실존하는 것인지, 만약 캐릭터가 스테이지 밖으로 나감으로써 실존하지 않게 된다면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가 아닌지 직접적으로 명시한다. 하지만 영화의 재밌는 지점은 그런 구성이나 스토리가 아니라 미장센 그 자체이다. 웨스 앤더슨 감독의 작품이 지나치게 '연극적'이라던가, '인위적'이라는 비판을 많이 받는데, 감독은 우리의 현실은 연극과 다른 것인지 직접적인 질문을 던지며 도발한다. 캐릭터는 스테이지 위에서 실존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무대 밖으로 빠지는 순간 캐릭터는 없어지고 연기하는 배우만 남는다. 무대 밖, 현실 세계로 빠져나온 배우는 실존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여전히 영화 속이다. 가상세계에서 빠져나왔다고 생각하지만 여전히 가상세계의 캐릭터인 것이다. 만약 카메라가 꺼지고 영화 속 연극의 캐릭터를 연기한 배우가 LA로 차를 몰고 가면 그 사람은 실존하는 것일까? 본인이 비판받던 액자식 구성을 가장 적극적으로 활용한 이 영화는 관객에게 묻는다. 과연 객석에 앉아 영화를 보는 당신은 실존하는 것이냐고. 스테이지는 세상이고 캐릭터는 사람이다. 우린 스테이지 속 캐릭터와 다를 바가 없다. 외계인이 등장하는 것 만으로 우리의 세상에 대한 믿음이 산산조각 나는데, 뭘 믿고 이 세상이 실존하는 것이라고 확신하느냐 묻는다. 눈치를 살피며 운석을 집어가는 외계인과, 실수로 카메라에 노출되어 눈치를 보는 연극배우가 다를 바가 있는가. 이 세상을 관찰자 시점으로 바라보는 제삼자가 있다면, 그것이 외계인이든 아니든 간에, 우리도 누군가가 세팅해 놓은 연극 무대에서 캐릭터로 기능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본인이 가장 잘하는 스타일로 소구 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메시지를, 매번 반복되어 식상하다는 그 스타일을 한껏 사용하여 풀어낸 웨스 앤더슨 감독. 그래서 영화는 굉장히 도발적으로 읽힌다. 그리고 그 도발이 난 재밌었다. 영화를 보실 분들은 스토리와 자막에 매몰되지 마시고 웨스 앤더슨 감독이 이 실존적 위기를 미장센으로 어떻게 풀어내는지, 숨은 그림 찾기 하는 심정으로 보시길 바란다. 아니, 거장의 그림 전시회에 갔다는 생각으로 컷 하나하나를 감상해 보시길 바란다. 그게 이 영화를 가장 재밌게 볼 수 있는 방법이라고 감히 확신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