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at 에어컨 고장
불혹, 아니 39세가 될 때까지 살았던 곳을 정리하면 이렇다. 저층 연립 빌라, 12층 아파트, 15층 아파트, 한 주택을 반씩 나눠 쓰는 3층 단독주택, 여기까지가 성인 되기 이전에 산 곳들이다. 성인이 된 이후에는 원룸, 기숙사, 군대 내무반(여기도 2년을 살았으니 써줘야지), 단독 빌라, 24층 아파트, 투룸, 구옥 단층주택. 돌고 돌아 다사다난 이후 다시 24층 아파트로 돌아왔다. 누군가와 함께 살았던 날이 혼자 살았던 날보다 많았고, 이제는 혼자가 아니면 안 될 정도로 혼자의 편안함에 익숙해졌다. 인생에 오롯이 혼자 살았던 날은 합쳐봐야 7년도 되지 않을 것이다. 혼자 살면서 느낀 점은 나는 집을 참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누군가와 함께 살았을 때는 집에 잘 붙어있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밖을 싸돌아다니기 좋아하는 사람인 줄 알았는데, 혼자 살게 된 이후에는 집에서 잘 나가지 않았다. 인간은 겪어봐야 안다.
40년 된 구옥 단층주택에서 24층 아파트로 오니 무엇보다 '온도'의 아늑함이 느껴졌다.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단열 따위 신경 쓰지 않았던 40년 전 전에 지은 주택은 바깥의 온도와 집 안의 온도가 거의 같은 속도로 뜨거워지고 차가워진다. 단열이 잘 된 집에 들어오니 밖이 춥다고 반드시 집이 추운 것은 아니며, 더위도 마찬가지였다. 여기서 오는 쾌적함은 어마어마하다. 지금 집이 전의 집보다 크지만 온도 유지에 들어가는 비용은 더 적다. 단열이 이렇게 중요합니다 여러분. 온도를 유지하는 장치는 어느 집이나 마찬가지로 겨울은 가스보일러, 여름은 에어컨이다. 이 집에 들어오자마자 겨울에 보일러가 문제를 일으키더니, 이번 여름엔 에어컨이 말썽이다. 40년 된 단층주택을 고쳐가며 살았던 내가 편한 아파트에 와서도 이런저런 것들을 고쳐야 하는 입장이 되니, 주변인은 나보고 평생 뭔가를 고칠 팔자라며 놀렸다. 하긴 지금도 남이 쓴 글을 고치며 입에 풀칠을 하고 있으니 틀린 말은 아닌 것 같기도... 는 무슨 팔자 같은 거 믿지 않는다. 무속 아웃! 토속신앙 아웃!
24층 아파트의 고층에 살고, 실외기는 베란다 난간에 달려 있다. 실외기 공간을 미리 설계해서 베란다에 실외기 배치공간이 붙어있는 형식이다. 이게 외관상으로는 예쁘지만, 여러 가지 단점이 있다. 관리실에서 실외기 공간 이외에는 실외기 설치를 금지시켜서 집에 에어컨을 한대 더 놓으려면 베란다 안에 설치해야 한다. 단독주택도 아니고, 아파트 외관을 내가 볼 일이 뭐가 있을까? 아파트 외관은 그야말로 외부 사람을 위한 거다. 그 안에 사는 사람은 사실 외관을 볼 일이 딱히 없다. '저기가 내가 사는 곳이야. 실외기가 덕지덕지 안 붙어있어서 깔끔하지?'라고 자기 집을 소개할 사람을 위한 정책일 리는 없고, 집을 사는 곳이 아닌 자산으로 보는 한국인의 특성이 반영된 결과가 아닌가 싶다. 물론 상업시설에 따로 에어컨 배관을 설계하지 않아서 실외기가 덕지덕지 붙어있으면 혐오스럽긴 하다. 하지만 아파트는 모든 세대가 일률적으로 생겼고, 거기에 실외기 하나가 추가된다고 해서 딱히 외관상 문제가 없을 것 같은데 그런 정책을 유지하다니, 알다가도 모르겠다. 그리고 밖에서 보기에만 좋은 것은 이 실외기 정책뿐만이 아니다. 실외기 공간 디자인도 외부의 시선만 신경을 쓴 탓인지, 베란다 난간 아래쪽과 선을 맞춰서 실외기를 처음 놓을 때 기술이 필요하다. 난간 위쪽에 맞춰 높게 설치했으면 없었을 불편함이다. 에어컨 설치 비용이 높은 건 문제가 아니었다. 문제는 고장 났을 때이다.
공식 서비스센터에 의뢰해 A/S기사님이 출동하셨는데, 실외기 콘드가 나갔다고 한다. 에어컨 설치기사 과정을 배웠던 나는 그런 부품이 있는 지도 몰랐다. 설명을 들어보니 열교환기를 말씀하시는 것 같았다. 콘드가 뭐의 역자냐, 뭐를 그렇게 부르냐고 물어봤더니 기사님은 당황하시면 콘드라고 배웠고 콘드라고 불렀을 뿐 콘드가 뭐라 하시면 소녀 어찌...라는 반응이셔서 물어본 내가 다 미안했다. 여하튼 콘드는 알루미늄(!!!)으로 만들어져 있어서 부식으로 터질 수가 있단다. 원래 예전엔 배관도 그렇고 열전도율이 좋은 동으로 만들었다. 하지만 원료절감 차원으로 알루미늄으로 바꾸었고, 이런 일이 생기는 것이다. 에어컨 설치를 배울 때에 어떤 브랜드가 알루미늄 배관을 쓰는지 알게 되었지만, 나는 이미 그 제조사의 제품을 산 이후였다. 그랬다가 이런 일이 터지니 역시나 라는 생각이 안 들 수가 없다. 열받는 건 여기서 끝이 아니다. 교체비가 25만 원인데 바로 교체할 수가 없다. 왜? 여긴 고층이니까. 그리고 실외기 설치위치가 너무 낮아서 손이 닿지 않는다. 그래서, 에어컨 설치팀이 와서 실외기 철거를 도와줘야 한다. 여기서 또 한 가지 그 제조사의 문제점이 나오는데, 에어컨 설치는 외주라는 것을 다들 아시는지? 어느 브랜드의 제품을 사도 설치는 다른 회사의 기사가 나온다. 그 브랜드 조끼를 입고 있는 경우도 있지만 파견 직원 같은 거라고 생각하면 된다. 해당 브랜드 소속 직원이 아닌 것이다. 우리 부모님 세대가 에어컨을 살 때까지만 해도 에어컨 설치 직원은 각 브랜드에 소속되어 있어서 따로 설치비가 없었다. 지금은 배관 길이를 핑계로, 타공을 핑계로, 실외기 난간을 핑계로, 이런저런 핑계로 설치비를 책정해서 받는다. 이 책정은 모두 핑계이고, 설치기사 인건비라고 보면 된다. 에어컨 설치과정을 배우면서 각각의 원가를 모두 알게 된 나는, 그런 식으로 핑계를 대야만 인건비를 받을 수 있는 현실에 개탄하면서 한편으로 화가 났다. 에어컨 설치와 철거를 담당하는 회사는 정직원을 따로 뽑지 않고 계약직 사원을 뽑는다. 에어컨 설치는 한철 장사이기 때문이다. 택배회사와 택배기사 같은 계약관계로 보면 된다. 이 복잡한 구조를 만든 게 위에서 언급한 알루미늄 배관을 처음 쓴 그 회사다. 설치인력을 외주로 돌려서 이 난리를 만든 장본인. 지금이야 모든 에어컨 회사가 설치 기사를 위주를 주고, 알루미늄 제품을 쓰는 회사도 늘어났지만, 결국 처음 한 놈이 나쁜 놈 아니겠나. 치킨값을 제일 먼저 올린 브랜드가 원흉인 것처럼. 내 다시는 이 브랜드의 에어컨을 사지 않겠다고 마음먹었지만 에어컨을 새로 바꾸는 건 몇백이 깨지는 일이다. 그래서 그냥 수리를 받기로 했다.
설치팀은 외주라서 따로 와야 하고, 수리기사와 시간을 맞추기가 어렵다. 그래서 어떻게 하냐. 설치팀이 와서 실외기를 분리해 베란다 내부로 옮겨놓고 철수. 수리기사가 나중에 와서 콘드를 교체. 설치팀이 다시 와서 설치를 하는 프로세스로 진행해야 한단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나는 에어컨 설치과정을 잘 안다. 설치팀 한철 벌어서 나머지 세 철을 보낸다. 지금은 에어컨 설치철이다. 이거 하나 하겠다고 두 번이나 올 설치팀이 과연 존재하기나 할까. 그리고 과연 그들은 비용을 얼마나 부를 것인가. 여름이 끝나기 전에 교체가 될지 의문이다. 그리고, 역시나, 전화가 왔다. 설치기사 세 명이 와서 우선 한번 설치팀 없이 고쳐보겠다고 한다. 내 예상대로 적절한 비용으로 두 번이나 와서 작업을 할 작업자를 못 찾았을 것이다. 설치기사는 한 타임에 40은 벌어야 한다. 두 번 올 시간에 에어컨 신규 설치를 하면 80을 번다. 나보고 그 돈을 지불하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수리기사 입장도 난감할 것이다. 나에게 어떤 선택권이 있을까. 브랜드 쪽에 전화해서 니들 잘못이니 제대로 하라고 으름장을 놓아야 하나. 그런 거 진짜 싫어하는데. 화를 내면 내는 쪽도 손해라는 주의다. 화를 내서 기분이 풀리는 사람이 있다면 소쇼패스인지 의심해봐야 한다. 나는 화를 내면 내 속이 상한다. 내가 불쾌하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사이 여름은 더워져간다. 세상은 참 이해하지 못할 일들 천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