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씨 표류기]를 보았다.

by Renaissance

세상엔 명작들이 참 많다. 책도 그렇고, 영화도 그렇고. 고전 책은 찾아서 봐야 하듯이 영화도 고전은 찾아서 봐야한다. 그래서 어떤 영화를 만들고 싶냐는 질문을 받으면, 잊혀지지 않는 영화를 만들고 싶다고 대답하곤 했다. 당장 올해 개봉했어도 이슈화되지 못하고 묻혀버린 영화들이 있다. 개봉했는지도 모르고, 대단한 우연과 우연이 겹치지 않는다면 평생 모르고 지나갈 것이다. 내가 만든 독립 장편은 아주 조금은 이슈화가 되어서, 어떤 영화를 만들었느냐는 질문에 영화 제목을 얘기하면 '어? 나 그거 들어봤어요'라는 대답을 듣는다. 본 사람은 없지만, 그래도 들어봤다는게 어디냐. 이 정도면 굉장히 성공한 거라 생각한다. 유명 영화제도 나가고 해서 이정도라도 세상의 빛을 본거다. 하지만 영화계 종사자들은 모르는 경우가 많아서 비영화인보다 영화인들이 영화를 더 안 본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제작자들이 인터뷰에서 '신인'을 찾고 있다거나 '시나리오'를 찾고 있다는 말을 믿지 않는 이유 중 하나다.


[김씨 표류기]를 보았다. 이유는 없다. 그냥 보고 싶었다. 캐스팅을 기다리며 아무것에도 집중하지 못해 안 하던 게임을 했고, 성취감을 1도 느낄 수 없는 영화계에 지쳤는지 원래 내가 그런 사람인지 하나하나 수집요소를 달성하며 게임폐인 생활을 했다. 요리하고 운동하는 시간을 제외하면 게임만 한지 세달 가까이 됐나. 수집요소가 되도록 많은 게임을 해서인지 게임 두개 하니까 세 달이 지났고, 모든 수집요소를 달성한 게임을 또 하는 것은 의미가 없었다. 수집할게 없잖아. 그래서 다시 책을 읽기 시작했고, 영화도 봐야겠다는 생각으로 영화를 고르다 눈에 띈게 김씨 표류기였다. 모두가 알고 있지만 안 본 영화가 가장 안전빵 아니겠나. 어떤 연유로 이 영화를 안 봤나 생각해보면 이 영화가 개봉한 2009년은 한창 바쁠 시기였다. 취업시즌이었고, 광고대행사에 취업을 해보겠다고 인턴을 준비하느라 바빴다. 영화 개봉일을 보니 인턴 준비하면서 돈도 벌고 취미활동도 다 하던 시절이더라. 그래서 거의 영화를 안 보고 살았던 것 같다. 언젠간 봐야지 하면서 서랍속에 묻혀둔 영화를 꺼내 보니, 오호 충격적이지 않을 수 없었다. 영화인 입장에서 말이다.


2009년도에는 이런 영화가 상업영화로 만들어질 수 있었구나, 그게 가장 충격적이었다. 만약 지금 시장에 이 영화 시나리오가 나온다면 절대 투자되지 않는다. 내 모든 것을 다 걸 수 있다. 이병헌이 캐스팅 되어도 투자되지 않을 것이다. 아니다, 이병헌 배우님이면 될 수도 있겠다. 하지만 내년까지 스케쥴이 꽉 차신 대배우님 손에 이 시나리오가 전달될 확률이 0프로다. 매니지먼트 선에서 정리될 것이다. 영화를 보고 처음 영화 시나리오를 썼던 때가 생각이 났다. 투자가 뭔지도 모르는 시절, 영화화가 될지 말지를 걱정하지 않고 시나리오를 쓰던 시절에는 참 다양한 주제의, 특이한 영화를 썼다. 내 상상력에 얼마나 제한이 없었느냐 하면 북한이 메인 배경이 시나리오를 썼을 정도다. 메인이라고 하니까 별거 아닌 것 같지만, 그냥 영화 내내 북한만 나온다. 당연히 투자가능성 0프로의 시나리오지만, 그런거 생각 안 하고 썼다. 오로지 만들고 싶은 영화가 기준이었다. 나는 시나리오를 쓰기에 앞서 시놉시스를 정리한다. 트리트먼트를 따로 쓰지 않는 스타일이라 시놉에 줄거리를 자세하게 적는 편이고, A4용지 한 장 정도로 줄거리를 쓰면서 시나리오 구조를 머릿속에 쌓는다. 그래서 시놉시스가 정리 됐다면 언제든 시나리오가 나올 수 있는 상태라고 보면 된다. 그런 상태의 시놉은 폴더에 넣어 놓는다. 그런 폴더가 몇 개나 되나 지금 이 글을 쓰기 위해 세어봤다. 10개가 넘는다. 그리고 영화계에 들어오기 전에 쓴 시놉과, 들어온 후 쓴 시놉을 비교해보니, 역시나 다르다. 영화계에 들어오기 전 시놉이 아이디어나 컨셉 측면에서 훨씬 독특하다. 영화계에 들어오고 나서 쓴 시놉은 나쁘게 말하면 특이할 만한게 없고, 좋게 말하면 장르화 되어있다. 어쩔 수 없다지만 참 씁쓸하다. [김씨 표류기]같은 영화가 2023년에 만들어지고 있다면 내 시놉이 이렇게까지 장르화되지 않았을 것이다. 모두가 [기생충]을 위대한 영화라고 말하지만 아무도 기생충 시나리오를 봉준호 감독이 쓰지 않았다면 투자됐을 거라 생각하지 않는다. [오징어 게임]도 모든 영화관계자들에게 까이고 10년간 묵히다가 넷플릭에서 만들지 않았나. 시장이 커지면, 성숙해지면 당연하게 벌어지는 현상이라고 하기엔, 우리나라 영화계는 그 정도가 심하다. 새로운 도전을 전혀 하지 않고 저예산이나 중예산의 영화가 아예 없어져벼렸다. 200억 이상 제작비가 드는 작품이 50억 이하 제작비가 드는 작품보다 훨씬 많다. 30억 이하의 저예산 영화, 50-60억 예산의 중급 영화가 만들어지지 않는다. 메인 캐스팅을 A급을 붙여야 투자가 되고, A급이 붙으면 투자금이 많이 들어온다. A급이 붙어야만 투자가 되니 모든 시나리오가 A급에게 가고, A급이 붙으면 굳이 저예산으로 만들 필요가 없다. 제작비가 시나리오에 따라 결정이 되는 것이 아니라 배우에 따라 결정이 되는 것이다. 영화에 맨날 똑같은 배우만 나오는 이유다. 그 배우들 말고는 투자가 안 되니까. 새로운 배우로 새로운 영화가 만들어질 일은 없다. 그것은 오로지 독립영화에서만 가능한 일이고, 독립영화는 대부분 공적 자본으로 만든다. 영화시장의 메이저 플레이어들은 새로운 감독의 발굴에도, 새로운 영화를 만드는 것에도 관심이 없다. 영화계가 어려워지자 씨제이가 가장 먼저 한 것이 아트하우스를 없앤거였다. 그나마 시늉이라도 하던 아트하우스마저 없애버렸다고. 그러고 관객이 한국 영화만 외면한다고 하소연을 한다. 관객은 똑같은 영화를 외면하는 것이다. 마블도 외면당하지 않나. 다분히 틀에 박힌 장르적 영화만 만들면 관객이 당연히 지친다. 새로운 시도를 해야한다. 하지만 새로운 시도도 20년 짬밥의 거장들에게만 허락된다. 헤어질 결심을 내가 썼으면 어떤 피드백을 받았을지 선명하게 상상할 수 있다. 마치 영화 장면을 보듯이 상상이 된다.


그래서, [김씨 표류기]가, 충격적이었다.

이런 영화가 더 보고싶다.

이런 영화가 더 만들어지면 좋겠다.

나도 이런 영화를 만들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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