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장

by Renaissance

평생 고치며 살 팔자란 말을 들은 적이 있다고 전에 글에 언급했는데, 그것이 촉발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연쇄 고장사건이 일어났다. 처음에는 맥북이었다. 오래 쓰긴 했지만 잘만 되던 맥북이 하루만에 이상해졌다. 정확히는 트랙패드 고장이다. 트랙패드가 완전 안 되는 것은 아니고, 가운데 윗부분이 잘 먹지가 않아서 원래의 감각대로 사용할 수가 없으니 없는거나 다름 없게 되어버렸다. 2016년에 구매했던 맥북프로 13인치 끝물. 구매후 몇달 지나지 않아서 새로운 맥북프로가 출시되었지만, USA-A 슬롯이 없어졌다는 소식에 오히려 잘 구매했다며 좋아했던 기억이 난다. 이 맥북을 구입한 후로는 시나리오 작업을 이걸로만 했다. 아무래도 데스크탑을 사용하지 않게 되더라. 아무곳에나 들고 가서 쓸 수 있다는 매력도 있거니와, 트랙패드가 여러모로 글을 쓰기에 유용했다. 첫 독립장편의 시나리오를 썼던 것도 이 맥북이고, 첫 상업영화 각색을 한 것도 이 맥북이다. 여러모로 정이 많이 들었는데 트랙패드가 잘 되지 않는 것은 아무래도 치명적이다. 지금까지 잔고장은 딱 한번 있었다. 맥세이프 연결이 잘 되지 않아서 수리를 받았지만 계속 똑같은 현상이 발생했고, 애플케어가 끝나가던 나는 속이 탔다. 그래서 A/S 접수를 했던 직원이 아예 하판 기판(배터리+키보드가 묶여있는)을 바꿔버리자고 했고, 나는 콜을 외쳤다. 다행히 애플케어때문에 큰 지출 없이 수리가 끝났지만 여전히 가끔씩 접촉 불량이 일어난다. 고질병인 것 같다. 그것 말고는 정말 아무런 이상 없이 잘 써오다가 갑자기 트랙패드가 이상해진 것이다. 현재 각색 계약 중이기 때문에 다음 고를 언제 쓰게 될지 모르니 하루빨리 조치를 취해야 한다. 하지만 밍기적 거리고 있다. 마우스를 이용해가며 여전히 이 맥북으로 글을 쓰고 있다. 기계에서 정을 잘 못떼는 편이기도 하고 큰 지출을 잘 못하는 편이기도 하다. 참고로 나는 2010년형 타워 맥프로(맥프로 5,1)을 여전히 데스크탑으로 쓰고 있다. 사실 새 데스크탑으로 진작 바꿨어야 했는데, 나는 또다시 맥을 원하니 데스크탑 교체는 대공사다. FHD 해상도의 23인치 모니터를 두 개 쓰고 있는데 새로 맥미니나 맥스튜디오를 마련한다면 모니터도 바꿔야한다. 말 그대로 대공사가 아닐 수 없다. 더 성공하면 바꾸자고 하면서 계속 미루는 동안 내 맥프로는 최신 프로그램은 깔지 못하게 되었고, 크롬조차 업데이트가 안 된다. 내 맥프로가 깔 수 있는 가장 최신 OS는 하이시에라다. 그리고 애플은 내 맥북프로에 대한 업데이트도 중단했다. 이제 더이상 최신형 OS를 깔지 못하게 되었다. 그래, 바꿀 때가 되었다. 맥북부터 바꾸자.


맥북에어 M2의 원하는 사양을 보니 200만원 가까이 한다. 내 맥북프로를 140만원에 샀으니 7년동안 물가 상승이 어마어마한 것이다. 맥북프로를 샀던 이유는 자명했다. 영상 편집도 할 수 있는 맥북을 사고 싶었으니까. 이제 영상 편집을 알바로도 더이상 하지 않고 있으니 굳이 맥북프로가 필요가 없다. 주용도는 글쓰기이니 무조건 가벼운게 최고고 당연히 맥북에어를 생각하고 있었는데 언제 이렇게 가격이 올랐냐. 깡통 맥북에어도 150만원대다. 그래도 살건 사야지 하고 있는데 매직 마우스가 고장났다. 뭐야, 세트로 고장나는건가 하면서 뭔가 불안한 기운이 감지됐다. 고장 타이밍. 40년된 구옥에 살면서 느꼈던 건 마치 우주의 기운처럼 어떤 하나의 아이템이 고장나면 다른 것도 같이 고장이 나더라는 것이다. 무당이 국정을 농단한 이후 꿈해몽이나 타로같은 것도 거부하겠다고 철저히 안티 샤머니즘을 외치고 있는데 고장 타이밍이라니 뭔가 웃기긴 하다. 무언가 하나가 고장나면 연쇄적으로 고장나는 것을 한두번 겪어서인지 왠지 알싸한 느낌이 드는가 싶더니 전기포트가 고장났다. 신기하지 않은가. 5년 동안 쓰던 전기포트가 맥북과 함께 고장나는게 안 신기할 수가 있나. 물론 우연히 일치일 것이다. 어지간하면 고장이 나지 않는 전기포트가, 우리 어머니는 20년 가까이 사용하고 있는 전기포트가, 나는 5년 밖에 쓰지 않았고 이미 한번 고장이 나서 리퍼를 받은지 3년 만에 고장이 났다. 아직까진 괜찮다. 매직마우스 대신에 집에 굴러다니는 아무 유선마우스나 쓰면 되고, 전기포트는 새걸 사면 되니까. 하지만 왠지 여기서 끝이 아닐 것 같은 불안한 기운을 느끼던 찰나, 보일러가 고장났다. 이럴줄 알았어. 내 진짜 이럴줄 알았다고! 를 외치며 보일러를 고치고 있는데 이게 뭐하는 건가 싶다. 내가 왜 보일러 구조에 대해 이렇게 빠삭하게 알고 있느냐, 40년된 구옥에 살면서 잦은 보일러의 고장으로 고생을 좀 했거든. 보일러는 사용연한이 7년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하지만 7년마다 보일러 바꾸는 사람을 한 번도 보지 못했다. 보일러는 고장이 나지 않는 한 계속 쓰게된다. 왜 나는 새로운 집에 갈 때마다 보일러가 고장나는가. 보일러는 제품값만 백만원에 아파트는 설치비가 싯가다. 부르는게 값이라는 얘기다. 에어컨처럼 이것저것 다 가격이 메겨진다. 각방 콘트롤러 하나가 십만원이 넘는다. 맥북에어와 보일러 교체만으로 도대체 얼마를 쓰게 되는 것인가. 더 신기한 것은 무엇인지 아는가? 2주 전에 내가 브런치에 어떤 글을 썼는지 아시는가? 바로 에어컨 고장에 대해서 썼다. 내가 괜히 고장 타이밍이라고 부르는 것이 아니다. 이 쯤에서 멈춰졌으면 한다. 그만 고장나라. 제발. 내가 잘못한게 있다면 말이라도 해주렴. 내가 무얼 서운하게 했니. 무엇이든 잘 관리하고 아껴쓰는 나로서는 고장이 날 때마다 내심 서운하다. 한계상황 테스트도 거친 애들이 나처럼 부드러운 사람을 왜 견디질 못하니.


맥북을 바꾸는 것은 별로 아깝지 않다. 내가 하는 일에 도움이 되는 제품에 돈을 아끼면 안 된다는 주의다. 그래서 맥프로도 당시 큰맘먹고 400만원을 지출한 것이다. 그걸로 독립장편 편집을 했으니 이미 가격값은 충분히 했다. 맥북프로도 마찬가지다. 맥북프로로 쓴 글로 번 돈이 회사시절 번 돈보다 많다. 그러니 맥북에어는 살 것이다. 각색비가 들어오자마자. 보일러는 어떻게 할까. 어차피 바꾸게 될거 내가 손댈 수 있는 곳은 과감히 다 손대볼까? 이런 생각을 하니까 내가 평생 고치고 살 팔자라는 소리를 듣는 것이다. 전자회로 기판에 대해 공부해볼까 생각한 적도 있다. 맥프로와 전축이 한꺼번에 고장났을때 진지하게 고민했었는데 한창 바쁠때라 생각만 하고 넘어갔다. 이 기회에 해볼까. 할리우드에는 스크립트 닥터라는 직업이 있다. 최근 개봉한 미션 임파서블 데드 레코닝의 크리스토퍼 맥쿼리 감독은 작가로 오랬동안 활동했는데 할리우드의 유명한 스크립트 닥터였다. 직관적인 이름이 말하듯, 시나리오가 막히면 어떻게 해야하는지 돌파구를 알려주는 직업이다. 한국은 스크립트를 시나리오라고 부르니 시나리오 닥터로 일해볼까도 싶다. 어차피 평생 고치고 살 팔자라면 고치는걸 일로 삼아서 사는게 낫지 않겠나. 하지만 시나리오 닥터로 명함을 파고 다닌다고 해서 제값을 쳐줄지는 의문이다. 90억 짜리 영화 시나리오 각색비로 2천만원을 책정하면서 많이 주는 거라고 생색내는 제작자들을 보면 우리나라에 시나리오 닥터가 왜 없는지 자명하다. 내가 고장 전문가인데. 아쉽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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