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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감의 원천, 열정의 원천

feat 한국영화

by Renaissance

광고대행사를 다닐 때 끊임없이 아이디어를 내는 나에게 영감을 어디서 얻느냐며 궁금해하는 사람이 많았다. 딱히 그런 걸 생각해 본 적도 없고, 그저 다른 사람들이 게으른 것이라고 생각했기에 이도저도 안 되는 소리만 늘어놨던 것 같다. 오만하게도. 지금 생각해 보면 유달리 호기심이 많은 성격이 도움이 되었던 것 같다. 관심 분야가 많았고, 그 관심이 조사로 이어지고, 흥미로운 것들은 기억에 담아뒀다가, 필요한 일이 생기면 꺼내 쓰는 거다. 영화 소재를 잡는 것에 호기심이 도움이 되는 건 말할 필요도 없지만, 그렇게 잡은 소재가 시나리오도 풀리는 것은 아니다. 15초 광고는 호기심만으로 아이디어가 되지만, 120분 영화는 호기심만으로는 아이디어가 되지 않는다.


영화업계에 들어와서도 나는 왕성한 창작욕구를 불태웠고, 똑같은 질문을 많이 받았다. 어디서 영감을 얻느냐고. 이것 또한 딱히 답할 말이 없었고, 이번엔 다른 사람보다 내가 덜 게으르다는 오만함 때문이 아니었다. 실제로 궁금했다. 내 영감의 원천은 무엇인가. 여러 존경하는 감독님들의 GV를 참석하며 그들의 영감의 원천을 듣고자 했다. 그리고 어떤 감독님이 이런 말을 하셨다. 지금까지는 분노가 자기를 집필하게 만들었다고. 화가 많은 사람이고, 왜 사회가 이따위로 돌아가냐는 화가 곧 영화 시나리오로 이어졌는데, 현재는 돈도 많이 벌고 사랑하는 자식도 태어나 그 분노가 예전 같지 않다고. 그래서 예전만큼 써내지 못하는 것 같다고. 이런 말 하는 분들 특징이 여전히 활발하게 창작활동을 하고 계신다. GV에서 한 말을 인터넷으로 허락 없이 옮기는 것이 옳지 않다고 생각하기에 그분이 누군지 밝히지는 않겠지만 한국에서 가장 창작활동을 열심히 하는 영화인인 것 같다. 그분의 얘기를 듣고 내 시나리오들과 시놉들을 보니, 나 또한 분노를 나의 연료로 쓰고 있더라. 도저히 이해가 안 가는 행태, 구조, 인간, 시스템에 대한 분노. 이 브런치만 봐도 그렇지 않은가. 왜들 그리 화가 나있어. 뭐가 문제야 세이 섬싱.


열정의 원천은 완전히 다른 얘기다. 영감을 받았다고 해서 70-100페이지가 뚝딱 나오지 않는다. 노력, 끈기가 필요하다. 자리에 앉아 시나리오가 완성될 때까지 버텨내는 힘, 아무리 힘들어도 매일 주어진 분량을 써내는 끈기. 영감이 아무리 많아도 열정이 없으면 시나리오는 완성되지 않는다. 맨날 새로운 영화 아이디어가 있다며 전화를 걸고 카톡을 하고 미팅을 하지만 얘기를 나눠보면 정작 알갱이는 없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은 이야기를 완성시킬 힘이 없는 사람이고, 영화를 해선 안 되는 사람이다. 슬픈 건 그런 사람이 영화판에 굉장히 많다는 것이다. "허름한 호텔에 젊은 친구가 알바를 하러 갔는데 알고 보니 영혼을 위한 호텔이었어! 그래서 지켜야 하는 룰이 많은데 어기면 저주를 받는 거지. 어때. 재밌을 것 같지 않아?" 이런 식으로 아이디어랍시고 주는 사람들이 꽤 많다는 게 슬픈 현실이다. 저게 정말로 영화 소재가 된다면 나는 과장을 1도 보태지 않고 하루에 100개 정도 써낼 수 있다. 아이디어는 줬으니 완성을 작가(감독)이 하라는 식인데, 검증되지도 않은 소재를 왜 힘들여가며 작가가 완성해야 하는가. 돈이라도 주던가. 기획개발 미팅에 들어가서 원페이지 브리프를 받았는데 저 수준으로 스토리가 쓰여있고 나머진 예산이나 채널 등만 쓰여있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그걸 기획안이라고 내밀었다는 건, 그렇게 해서 작가가 스토리를 뽑아내면 자기가 만들었다고 생각할 확률 100프로. 실제로 그런 브리프를 받고 내가 시놉을 써서 준 경우가 많은데, 왜냐하면 그렇게 해야 각본 계약을 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시놉을 써서 가져가면 마음에 드는 경우 그게 자기가 썼다고 착각하더라. 마음에 들지 않으면 자기가 생각한 건 이런 게 아니라고 한다. 그럼 본인이 더 명확히 써주시던가. 아, 또 분노했네. 여하튼 요는 저런 건 영화 소재라고 보기 어렵다는 얘기다. 저 아이디어를 가지고 주인공이 어떤 사람이고 어떤 갈등을 겪고 어떤 위기를 맞는지 자리에 앉아 써낼 수 있어야 한다. 그러려면 열정이 필요하다.


매년 한두 편의 오리지널 장편 시나리오를 써내던 내가 작년부터 각색만 하고 있는 이유. 내가 소설이 써지지 않는 이유. 열정이 없어서다. 사람마다 열정의 원천은 다를 수 있다. 나에겐 '실현화 가능성'이 큰 부분인 것 같다. 내 목표는 영화감독으로 먹고사는 것이다. 영화감독이라는 꿈은 이뤘지만 노후대비를 포기하고 생계비를 최저로 유지하며 살고 있다. 옷을 너무 오랫동안 사지 않아 이제 어디서 어떤 브랜드를 사야 하는지도 모른다. 상업영화를 만들어야 돈을 벌게 되니, 상업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욕망이 내 원동력이 된다. 내가 쓰는 것이 영화화될 것이라는 희망, 그것이 내 열정의 원천이다. 영화계에 들어와 안 되는 이유만 들으며 살다 보니 어느 순간 내가 어떤 것을 써도 영화화가 되지 않겠구나 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주변에 자신의 오리지널 스크립트를 팔아서 상업영화를 찍는 신인감독이 전무하다. 그래서 시나리오를 안 쓰게 되었다. 똑같은 이유로 소설을 열심히 쓰지 못한다. 소설->판권 판매->각본 계약->연출 계약으로 이어져야 하는 것이 가능성이 희박한 만큼 내 열정도 희박해진다. 현재 캐스팅하고 있다는 작품도 내 오리지널 작품이 아니다. 같이 일하고 있는 제작사는 내 모든 오리지널 스크립트를 다 읽었고, 그중에 어떤 것도 영화화 가능성이 없다고 했다. 누구를 만나더라도 똑같은 소리였기에 바로 수긍하고 원작이 있는 작품을 각색하기로 했다. 여기서 아이러니가 발생한다.


한국 영화계는 이미 망했다고 해도 누구도 반문하지 않을 것이다. 범죄도시3가 천만을 가는데 무슨 소리냐며 반문을 하신다면 영화계 분이 아니라고 단언할 수 있다. 업계 분들은 모두 망했다고 생각하고 있다. 이번 여름은 심폐소생술의 분기점이 될 것이다. 투자배급사들이 이번 여름 시장 스코어를 보고 향후 한국 영화 투자를 결정할 것이기 때문이다. 영화관계자의 특권 중 하나는 개봉하기 전에 미리 영화를 볼 수 있는 것인데, 나는 절망 상태다. 생명유지 장치를 끄는 것에 동의 서명을 한 기분이다. 시나리오만 보면 영화화 가능성을 바로 알 수 있는 분들이 몇백억을 투자한 시나리오가 이런 것들이라니. 그렇게 개연성을 따지고 관객의 호불호를 따지시는 분들이 고른 게 이런 프로젝트들이라니. 분노가 치솟는다. 이 어마무시한 분노는 나에게 영감이 되어 걸어 다니면서도 영화 아이디어가 떠오를 정도다. 하지만 이번 여름을 기점으로 한국 영화 시장은 망할 것이다. 물론 부정적으로 전망한 것이고 비약이 있다. 시장 자체가 없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많은 투배사들이 M&A 시장에 나오거나 투자 사업부문을 접을 것이고 당분간 대작 영화들이 제작되지 않을 것이다. 시장이 재편되기까지는 꽤 시간이 걸릴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나에게 기회가 올 리는 만무하다. 스마트폰의 등장에도 내비게이션이 당분간 팔리긴 했다. 나는 지금 아이폰3GS가 한국에 출시된 뒤 시장에 뛰어든 신생 내비업체 같은 신세다. 분노로 인해 영감은 넘치지만, 그 어떤 것도 영화 시나리오로 이을 열정이 없다. 열정의 새로운 원천을 발굴하기 위해 새로운 바다를 탐험해야 할 시기이다. 내가 배를 어디다 뒀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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