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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탓이 아니다

by Renaissance

열심히 했음에도 결과가 좋지 않으면 항상 내 탓을 했다. 내가 부족해서 이런 거다. 왜 더 열심히 하지 못했을까. 스스로를 채찍질하게 만드는 이런 자세는 나를 성장시키고 더 좋은 결과가 나오게끔 만든 건 사실이다. 좋은 대학에 가서 좋은 성적을 냈고, 좋은 회사에 가서 성과를 냈고, 장편 시나리오를 쓰고 투자를 받아 독립장편을 찍어 개봉할 수 있었다. 성적이 좋지 않으면 스스로의 지능을 탓하며 잠을 포기하고 공부했다. 인정받는 광고인이 되기 위해 사생활을 포기하고 회사에서 살았다. 영화를 준비하는 과정 전체가 내 탓이오 내 탓이오 내 탓이로소이다 였다. 이렇게 내 탓을 하는 습관은 우울증으로 발현될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난 성과를 낸 대신에 우울증과 불면증을 얻었다.


남이 나에게 해서 싫은 행동을 남에게 하지 말라. 우리 집 가훈이다. 돈을 빌려서 기일 내에 갚지 않거나, 깔보는 행동을 하거나, 공공장소에서 큰 소리를 내거나, 데드라인을 어기는 등 남이 했을 때 싫은 행동을 하지 않으면 매너가 좋은 사람이 된다. 이런 기조가 확장되면 '내가 싫어하는 사람처럼 되지 말자'가 된다. 우리 집 두 번째 가훈은 '공부만 잘하면 된다'이다. 성적만 잘 나오면 잘못이 용서되고 선물을 받는다. 이런 가풍으로 성장하면 철저한 결과주의자가 된다. 그렇다 보니 나태한 인간을 싫어하게 되고 그런 사람이 되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내가 싫어했던 나태한 사람들이 자주 하던 행동이 남 탓이다. 돈을 갚으려고 했는데 쟤가 나한테 돈을 안 갚아서 아직 수중에 돈이 없다. 저쪽이 먼저 시비를 걸어서 싸운 거다. 다른 사람들이 목소리가 커서 잘 안 들리니까 나도 크게 얘기할 수밖에 없었다. 가족에게 일이 생겨서 기한을 못 지켰다. 첫 번째 가훈과 두 번째 가훈의 조합이 나를 남 탓을 할 수 없는 사람으로 만들었고, 성과는 내지만 우울과 불면에 시달리는 사람이 되었다.


나의 이런 성향을 확고해준 멘토의 조언이 있다. 입시를 준비할 때 불합리한 입시제도에 분노했고, 한국의 학벌주의가 가져온 폐단에 치를 떨었다. 대학을 가지 않고 성공함으로써 학벌주의 타파에 일조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신문에 기고를 했고 그게 실리자 나의 이런 생각이 맞다는 생각을 했고 부모님께도 말씀드려 보았지만 부모님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본인들이 한평생 학벌로 무시받는 삶을 살았으니 자식은 수혜자가 되길 바랐고, 그런 이유로 두 번째 가훈이 만들어진 것이다. 멘토를 출동시키셨다. 그리고 멘토는 단 두 문장으로 내가 입시 준비에 올인하게 만들었다. '좋은 대학에 가지 않은 사람이 입시를 비판하면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다. 좋은 대학에 간 사람이 입시를 비판하면 사람들이 듣는다.' 반박할 수 없는 절대 논리 앞에 무릎 꿇고, 이를 악물로 좋은 대학에 갔다. 내 멘토나 나나 정신적으로 건강하지 않은 것은 당연지사다.


영화계는 결과주의의 끝판왕 격인 산업이고, 모든 사람들이 내 탓만 하고 있는 안타까운 곳이다. 불합리한 계약과 공짜 노동만 하던 사람이 상업영화 크레디트를 얻는 순간 역전세계로 워프 한다. 계약조건이 이전과 비교불가한 수준으로 좋아지고 사람들의 대우 자체가 달라진다. 일 년에 200만 원도 벌지 못하던 사람이 억대를 벌게 된다. 시나리오를 완성해도 팔지 못해 생활고에 겪던 사람이 한 줄 로그라인 만으로 기획개발비를 1억을 받는다. 이런 철저한 성과주의 분위기는 신인들에게 끝없는 자책을 하게 만든다. 네가 잘났으면 좋은 대우받을 거 아니냐고. 시나리오를 잘 쓰면 될 거 아니야. 영화를 잘 찍으면 될 거 아니야. 억울하면 잘 만들던가. 이 모든 것을 함축한 한 마디, 영화계의 불문율이 바로 '시나리오만 좋으면 된다'이다. 훌륭한 리더 한 명이 대한민국을 바꿀 거라는 허상처럼, 시나리오만 좋으면 팔자 핀다는 허상이 업계를 지배한다. 내가 이런 비인간적인 대우를 받는 이유는 내가 좋은 시나리오를 써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대다수 신인들이 돈을 받지 못하고 착취당하는 이유는 좋은 시나리오를 쓰지 못해서이다. 좋은 시나리오만 써내면 모든 것이 해결된다. 서울에 아파트만 사면 된다. 서울에 집이 없어서 가난한 거다. 분양권만 따내면 된다. 억울하면 서울에 아파트를 사라. 왜 부모님은 서울에 아파트를 사지 않았나. 서울에 아파트를 못 산 사람들이 부동산 비판해 봤자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다. 사실 내 탓만 하게 만드는 건 영화계뿐만 아니라 사회전체에 뿌리 깊게 박힌, 권력층의 지배논리다.


[내 깡패 같은 애인]에는 이런 대사가 나온다. '우리나라 백수 애들은 착해요. TV에서 보니까 프랑스 백수 애들은 일자리 달라고 다 때려 부수고 개지랄을 떨던데. 우리나라 백수애들은 다 지 탓인 줄 알아요. 새끼들 착한 건지 멍청한 건지.' 독립 장편을 찍고 나서도 상업을 찍지 않았으니 무시받고, 상업 각색을 해도 개봉을 하지 않았으니 무시받고, 각색한 작품이 개봉을 해도 관객수가 나오지 않으니 무시받고. 끊임없는 검증과 더 높은 성과 요구에 정말 진저리가 난다. 내 탓을 그만하고 남 탓을 할 때이다. 이 세상이 잘못되었다. 내가 잘못된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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