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가고 무기력증

by Renaissance

하고 싶은 게 없다. 참 무서운 말이다. 인간의 욕망은 복합적이고 세상에 할 게 얼마나 많은데 하고 싶은 게 없다니. 매일 회사에서 야근하던 시절의 내가 지금의 나와 대화를 한다면 화나서 상을 엎을지도 모른다. 호기심이 왕성을 넘어 정상 범주를 벗어난 수준이라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탐구하고 새롭게 알게 된 지식이 또 다른 지식으로 연결되는 것을 무한 반복하는 삶이었는데 나에게도 무기력증이 오는구나.


대학시절 '어떻게 그걸 다하냐'라는 말을 많이 들었다. 성적도 군대 갔다 오면 성적은 자동으로 올라간다는 복학생 형들의 말을 순진하게 믿었던 터라 망쳐놓은 학점도 올려야 했고, 부모님께 용돈을 받지 않았으니 돈도 벌어야 했으며, 취미와 연애도 포기하기 싫었다. 그래서 다 했다. 밴드와 춤, 복싱을 하면서 번역과 과외를 하고, 데이트를 하는 시간을 제외하면 도서관에만 있었다. 밴드 연습하고 도서관, 춤 연습 하고 도서관, 복싱하고 도서관, 과외 후 도서관, 데이트 후 도서관에 가는 것이다. 어떻게 그걸 다 하냐 라는 말은 두 마리 토끼를 잡으려다 실패할 거라는 생각에서 나온 거다. 하지만 난 아무것도 놓치지 않았다. 밴드 공연에서 메인 기타를 치고, 복싱 시합에 나가 이기고, 내가 짠 춤 공연이 인정받아 전교생이 모이는 축제에서 공연도 하고, 60점 받는 과외 학생을 90점으로 올려놔 주변 어머니들에게 제발 과외를 해달라는 부탁을 받았지만 해줄 시간이 없어서 거절했고, 올 A+를 받았다. 연애는 내가 딱히 잘한 게 없는데 나를 좋아해 주는 여자친구를 마음고생 시킨 것 밖에 없는 것 같아서 잘했다고 하긴 어려울 듯하다. 요즘 스마트폰으로 촉발된 도파민 중독이 이슈인데 나는 스마트폰이 없던 시절부터 도파민 중독이 아니었나 싶다. 그래서 스마트폰을 잘 안 하는 것일 수도.


이렇게 다양한 활동을 하다가 퇴근을 못하는 광고대행사에 들어갔으니 얼마나 미칠 지경이었겠는가. 차장님께 약속드린 3년이 지나자 바로 사표를 냈고, 3년 동안 참았던 것을 다 하기 시작했다. 스노우보드, 조선시대 역사공부, 서핑, 스쿠버다이빙, 단편 영화 촬영, 장편영화 시나리오 쓰기, 자동차 여행, 해외여행 등등 심심할 틈이 없었다. 재산을 숨긴 범죄자가 감옥에서 3년간 썩은 후 출소하면 그렇게 살지 않았을까. 우울증은 완치되는 그런 병이 아니므로 중간중간 우울할 때도 있었지만 사람을 만나고 새로운 곳으로 여행을 가는 등 적극적으로 나아지고자 했다. 돌발 여행을 많이 갔던 것 같다. 잠이 오지 않을 정도로 우울하면 그냥 차를 타고 떠나버리는 것이다. 집이 아닌 곳에 가면 잠이 잘 왔고 바다와 산을 보면 치유가 되는 느낌이었다. 급기야 해외에서 4개월을 살기까지 했지만 천국 같은 곳에서도 계속 있으면 우울증이 온다는 것을 깨닫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최근 우울을 겪으면서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고 안 하던 게임을 해보거나 책을 읽으면서 이 또한 지나가리라 하고 버텼는데 무기력증이 왔다. 응, 어서 오고.


하고 싶은 게 없다. 게임도 재미없고 책도 재미없다. 영화관에서 볼 수 있는 영화는 다 봤다. 집에서는 영화 보기가 싫다. 집에서 나가자니 만나고 싶은 사람도 없고 가고 싶은 곳도 없다. 새로운 활동을 하자니 큰 결심이 필요하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야 하는 곳은 기피하게 된다. 안 그래야지 하면서 이것저것 새로운 액티비티를 찾아보다가 그만둔다. 나도 내가 갑갑하다.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 이럴 땐 일로 도피하는 게 최고지만 무슨 일을 해야 할지 고민된다. 시나리오 아이템은 있지만 이걸 써봤자 투자되지 않을 것을 너무 잘 안다. 최근에도 소설 원작 시리즈물 기획개발 의뢰를 받았던 대형 제작사에게 영화 시나리오를 보여주려고 했더니 오리지널 스크립트를 받지 않는다는 얘기만 들었다. 내가 영화계에 들어와 만났던 모든 대형 제작사가 그랬다. 그러니 점점 시나리오를 쓰기가 싫어지는 것이다. 읽어줄 사람이 없는데 써봤자 뭐 하겠는가. 소설을 써보다가 너무 퀄리티가 낮아서 멈춘 상태고, 처음 시나리오 쓸 때처럼 '첫 작품부터 잘 쓰긴 어려우니 연습이라고 생각하고 써보자'라고 하기엔 내가 소설가 지망생도 아닌데 왜 그래야 하나 싶다. 들어오는 일 안 막으려 했지만 계약조건을 얘기해주지 않는 프로젝트는 다 쳐냈더니 일이 없다. 대학 강의는 안 하려 했지만 은혜를 입은 적이 있는 분이 부탁해서 다음 학기는 나가야 한다. 일주일에 하루는 할 일이 생긴 것이다. 몇 번이나 거절하다가 수락한 일인데 지금 생각하면 오히려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런저런 핑계로 아무것도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이 글의 마지막 문단을 읽으며 뭐 이렇게 핑계가 많나 생각이 들었을 거다. 그게 무기력증이다. 나도 벗어나고 싶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한 사람의 삶