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라는 매체는 너무나 매력적이라, 나처럼 독립 장편을 찍고도 대우를 받지 못하고 돈을 제대로 받은 적이 없고 사기를 당하면서도 영화감독의 꿈을 놓지 못한다. 감독뿐이랴. 배우를 꿈꾸는 분들도 마찬가지다. 영화감독 못지않게 온갖 거지 같은 일을 당하고도 배우일을 놓지 못하는 분이 많다. 친한 배우들과 술을 마시면 누구의 신세가 더 처량한지, 어느 분야가 더 성공하기 힘든지 얘기를 나누곤 한다. 물론 배우가 그래도 감독보다는 낫다 로 항상 귀결되지만. 독립 장편 주인공으로 영화제에서 상을 탔다면 배우는 계속 일 제의가 들어오기는 하니까. 단역으로 출연을 해도 페이가 어느 정도 보장은 되니까. 감독은 상업을 하지 못하면 단편을 찍든 장편을 찍든 돈을 받기는커녕 써야 하는 입장이다.
영화라는 게 뭔지, 내가 갑자기 회사를 그만두고 영화감독이 되자 내 주변인들 중 영화감독을 꿈꾸거나 배우를 꿈꾸는 사람들이 연락을 해왔다. 누군가는 직장인 대상 영화학교를 갔다던가, 시나리오 워크숍을 다니고 있다며 나보고 가르침을 달라고 했다. 누군가는 직장에 다니면서 극단 활동을 하고 있다고 했다. 그들 입장에서는 한 번도 영화감독이 될 거라 언급조차 없던 내가 갑자기 장편을 들고 떡하니 나타났으니 신기했을 텐다. 내 입장에서도 한 번도 영화에 대한 열망을 나타내지 않았던 이들이 사실은 나름대로 영화를 하기 위해 애쓰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놀랐다. 그들의 나의 차이점은 나는 회사를 때려치우고 영화에 올인을 한 거고, 그들은 직장을 다니면서 곁다리로 영화를 해보려고 한 거다. 나는 성공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고 올인을 한 것이 아니라 회사를 그만두고 정말 하고 싶은 게 무얼까 생각하다가 영화감독에 도전해보지 않으면 평생 후회할 것 같아서 한 거다. 결과적으로 독립장편을 찍어 영화제에 나가고 각색 일도 맡으며 영화일로 먹고살고 있지만, 사실 실패 확률이 훨씬 높았던 도전이다. 내 주변인들이 그런 점에서 훨씬 현명하다. 난 그저 운이 좋았을 뿐, 영화에 올인했다가 아무것도 얻지 못한다면, 이전에 가지고 있던 커리어는 무용지물이 된다. 1년만 쉬어도 같은 산업에 재취업하기가 힘든데 영화 하겠다고 몇 년을 쉬면 취업이 될 리가 없다. 하지만 아쉬운 건 어쩔 수 없다. 그들이 그토록 영화를 하고 싶어서 직장을 다니면서도 영화를 배우고 있다면, 그 열정을 가지고 한번 모든 것을 걸고 해 봐야 영화인으로 살아남을지 알 수 있는 거다. 해보지 않으면 알 수가 없다. 그래서 한번 고민해 보라고 조언을 해줬지만, 섣불리 그러라고 부추기진 못했다. 그들이 잃을게 너무 많다.
40의 나이에도 여전히 배우의 꿈을 버리지 못한 주변인이 오늘 나에게 전화를 했다. 그가 꿈을 버리지 않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나는 운전 중에는 통화를 하지 않기 때문에 전화를 받지 못했고, 하필 장거리 운전 중이라 한 시간이 넘게 지나서야 카톡을 확인할 수 있었다. 갑자기 전화를 한 이유는 이렇다. 본인이 어떤 엔터테인먼트의 배우 모집 공고를 보고 오디션을 봤고, 다음날 바로 계약 제의를 받았다. 이렇게 빨리 계약 제의를 해올지 몰랐기 때문에 나에게 물어볼 여유도 없었고, 오늘 당장 계약하지 않으면 이 기회는 물 건너 가는 거라는 얘길 듣고 서명을 하려다 한 번만 다시 생각해 보겠다며 네 시간을 벌었단다. 그 네 시간 사이에 나에게 전화를 한 것이다. 내가 확인을 해보니 계약이 영 이상했다. 배우 계약을 하는데 엔터 측에서 정한 액팅 코치에게 레슨을 받아서 연기력을 키워야 한다는 조건이 들어가 있었다. 연기를 보니 가능성은 있는데 더 배워야 할 수준이라 계약은 하고 싶은데 연기 수업을 받으라는 말이다. 근데 이게 유료다. 1년에 몇 백만 원을 엔터 측에 줘야 하는 조건이더라. 배우 계약을 하는데 배우가 돈을 받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돈을 줘야 한다는 것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애초에 말이 안 되는 계약인데, 배우가 꿈인 사람들에겐 이게 기회처럼 받아들여지는 거다. 배우 계약을 제의한 사람이 한 명도 없었으니까. 나는 그에게 내 주변에 그런 계약을 한 배우는 없다고, 사인하지 말라고 말했는데 그는 나에게 친한 배우의 전화번호를 알려줄 수 있느냐 물었다. 배우로 먹고사는 사람에게 이 계약에 대해 물어보고 싶다고. 배우의 전화번호를 아무리 친하다고 해도 남에게 가르쳐 줄 수는 없다. 그리고 누가 봐도 사기인 계약을 확인하겠다고 배우에게 전화를 걸면, 나는 그 배우와 인연이 끊어질 것을 각오해야 한다. 하지만 내가 뭔가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사인을 할 기세였고, 머리를 굴리다가 떠오른 것이 액팅 코치를 하고 있는 배우의 전화번호를 알려주는 것이었다. 연기 지망생의 입장에서 액팅 코치에게 엔터 측으로부터 액팅 코칭을 받는 계약을 제의받았는데 조언을 구한다고 물어보는 것은 실례가 덜 될 것 같았다. 그리고 물론 나는 배우님께 전화를 드려 연기를 하고 싶어 하는 주변인인데 조언을 듣고자 하니 전화번호를 주겠다고 양해를 구했다. 그렇게 내 주변인이 사기꾼과 엮이는 것을 말릴 수 있었다.
액팅 코치를 하고 있는 배우분이 조언을 해준 후 다시 나에게 전화를 했다. 사실 요즘 이런 걸 물어보는 배우지망생들이 많다는 것이다. 한두 명이 당한 게 아니라는 말은 신종 사기가 횡행한다는 것이다. 배우 지망생들에게 배우계약을 빌미로 돈을 뜯어내고 있다. 누군가의 희망을 이용해 자신의 배를 불리는 인간들을 모아 후쿠시마 노심 찾기에 투입해야 한다. 방사능 수치가 너무 높아 최첨단 로봇도 몇 초 만에 움직임을 멈춘다고 한다. 인간은 30분 정도 견딜 것으로 예상된다. 사기꾼들을 인류를 위해 후쿠시마 폐로 작업에 동원하자. 노심을 찾지 못하면 오염수는 무한정 만들어질 것이다. 남을 이용해 먹은 사람들이니 남을 위해 희생할 기회를 주면 좋지 않을까. 얼마나 정신이 나가 있으면 누군가의 희망을 돈벌이 수단으로 사용할 생각을 할 수 있을까. 사기꾼은 교화가 불가능하다고 한다. 공감 능력이 없기에 남을 이용하고 등 처먹는 것에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다고 한다. 나와 표준계약을 해놓고 돈을 주지 않은 제작자가 떠올랐다. 그는 거짓말을 밥먹듯이 하면서도 얼굴 표정이 바뀌지 않았다. 내가 거짓말인 것을 눈치 채도 당당했다. 그는 속는 사람이 잘못이라고 생각했다. 눈치챈 나는 똑똑한 것일 뿐, 본인에게는 아무런 잘못이 없다. 사기꾼은 나르시시스트이거나 소쇼패스이거나, 혹은 두 가지 증상을 모두 가진 정신병자라고 한다. 똑똑한 사람도 사기를 당하는 이유가, 상대방을 정상인으로 가정하기 때문이다. 상대방이 나와 같은 정신 구조를 가진 사람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나르시시스트나 소쇼패스에게 당하는 것이다. 혹시나 우연히라도 내 글을 보게 된 배우 지망생이 계시다면, 반드시 명심하시면 좋겠다. 내가 돈을 내야 하는 계약은 다 사기다. 내가 돈을 받는 계약이라도 조항을 꼼꼼히 살펴야 하고 변호사에게 검토를 받고 하는데 내가 돈을 내야 한다면 애초에 얘기할 가치가 없는 거다. 또라이 보존 법칙처럼, 쓰레기 보존 법칙이 있다. 가장 선진화된 사회에서도 범죄자는 있고 사기꾼은 있다. 우리가 조심할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