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고 돌아 시나리오

by Renaissance

매년 새로운 시나리오를 썼다. 내가 창조한 세계가 영화화될 거라는 생각을 하면 누가 시키지 않아도 신나게 쓸 수 있다. 기성 작가들이 아마추어 작가들보다 집필 활동을 더 활발히 하는 것은 '현실화' 가능성의 차이가 아닌가 싶다. 내가 쓰기만 하면 작품화가 될 거라는 보장이 있다면, 놀 시간이 어딨어 빨리 써야지.


대형 제작사들은 신인의 오리지널 스크립트를 받지 않았고, 중소 제작사들은 오리지널 스크립트를 계약하지 않고 부족하다는 핑계로 무한 수정만 요구했다. 필력을 인정받자 각색 제의가 들어왔고, 진행 중인 프로젝트의 각본을 받아보니 형편없었다. 나의 스크립트에는 온갖 이유를 대가며 깎아내리더니, 자신들이 진행 중인 프로젝트의 스크립트에는 이렇게 관대해도 되는 건가. 스크립트를 보는 기준은 다분히 주관적일 수밖에 없고, 객관적으로 좋은 스크립트를 판별해 내는 능력을 가진 제작자가 많지 않다는 것을 깨달은 이후 오리지널 스크립트를 쓰지 않기 시작했다.


기본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각본들을 받아 각색 작업을 하면서 돈을 벌었다. 도대체 왜 이런 스크립트를 영화화시키려는지 이해할 수 없는 각본들. 장르가 애매모호한 스크립트가 많았고, 그래서 장르의 문법대로 고쳐주거나 장르를 아예 바꾸길 제안했다. 여기서 또 한 번 모두가 각본을 주관적으로 판단하는 것을 느끼게 되는데, 각색고를 전달하면 대만족 하던 클라이언트가 캐스팅을 돌렸다가 실패하면 갑자기 돌변하여 각본 탓을 한다는 것이다. 너가 좋다고 했잖아. 그래서 돌린 거 아냐. 애초에 각색고가 마음에 들지 않았으면 캐스팅을 안 돌렸을 것 아닌가. 각본을 바라보는 시각이 시시각각 바뀌면 답이 없다. 자신의 눈에 좋다고 판단되면 끝까지 밀어붙여야 하는데 상황에 따라 눈이 바뀌면 각색이 무한으로 이루어지게 된다. 그래서 표준계약서는 기간을 명시하고 각본을 진행할 때마다 선금을 지급하라고 명기해 놓았다. 기간을 정하지 않고 지급도 후불이라면 무한의 수정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2년간 남의 시나리오 각색만 했는데 계약을 해놓고도 돈을 주지 않던가, 계약을 질질 끌다가 계약을 해놓고도 무효화하자고 당당히 요구하는 제작사를 보면서 현타가 왔다. 애초에 오리지널 스크립트를 쓰지 않고 각색을 했던 것은 현 영화계 상황에서 내 경력으로 오리지널 스크립트를 팔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인데, 상황이 다시 바뀐 것 같다. 2023년 한국 영화계는 변하지 않으면 소멸될 위기에 처해있다. 망해서 OTT에 흡수되거나, 변화해서 살아남을 것이다. 기존 프로젝트들이 엎어지고 있고 더 많이 엎어질 예정이니 각색을 맞는 게 더 리스크가 클 수도 있다. 어차피 변화하지 않으면 망한다. 살아남을 생각이 있다면 좋은 스크립트를 찾아 나설 것이다.


어쨌든 저쨌든 새로 쓰고 싶은 시나리오 아이템이 구체화되었고, 자료조사가 마무리되었다. 각색만 해보기도 하고 소설에도 도전해 봤지만, 결국 돌고 돌아 시나리오로 온 것이다. 팔리는 시나리오를 써야 한다는 강박에 스스로 검열한 아이디어가 많았다. 이번 아이템은 절대 팔리지 않을 스크립트다. 마치 내가 처음 장편 시나리오를 썼을 때처럼 팔리는 걸 염두하지 않은, 그저 이런 영화가 나오면 좋겠다는, 이런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생각으로 잡은 아이템이다. 오랜만에 가슴이 뛴다. 팔리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중간중간 발목을 잡고 집필을 방해하겠지만 시작하고 나서 집필을 마치지 못한 시나리오는 한 편도 없다. 달려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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