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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enaissance Dec 12. 2023

20년만의 파리

고정관념을 바꾸기 쉽지 않다. 그래서 지각을 안 하려고 한다. 첫 번째 미팅은 더더욱 그렇다. 처음 만나는 자리에서 지각을 하면 상대방은 내가 약속시간을 잘 지키지 않는 사람이라는 고정관념이 생겨버린다. 무례한 행동도 마찬가지고, 언행도 마찬가지다. 식당 입장에서는 처음 오는 손님에게 최선을 다해야 한다. 처음 간 식당에서 서비스나 음식에 안 좋은 인상을 받고 나면 다시 가게 될 확률은 0에 가깝다. 나라도 별반 다르지 않다. 


어렸을때 유럽에 살았기 때문에, 그리고 그 기간동안 유럽에 놀러 온 수많은 부모님 지인들 덕분에, 파리에 꽤나 자주 갔다. 모두가 파리에 가보고 싶어했기 때문이다. 유럽하면 떠올리는 대표적인 이미지가 에펠탑인 경우가 많다. 유럽이라고 하면 떠올리는 가장 대표적인 도시가 파리, 로마, 런던 정도다. 베를린이나 마드리드, 헬싱키를 떠올리는 경우는 흔치 않다. 이렇게나 랜드마크가 중요하다. 나는 파리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파리를 갈 때마다 느꼈던 첫 번째 인상은 더럽다는 거다. 어딜 가나 길거리에 똥이 있는 유럽 도시는 파리밖에 없었다. 변두리 지역도 아니고 나라의 수도인데 이렇게 관리가 안 되나 싶었다. 두 번째 인상은 불친절하다는 거다. 영어를 잘 못하는 나라는 많다. 하지만 외국인이 영어로 무언가를 물어봤을때 나오는 반응의 차이가 있다. 어떤 나라는 본인이 영어를 못해도 어떻게든 대답을 해주려고 하고, 어떤 나라는 왜 자기나라에 오면서 자신의 언어도 공부하고 오지 않았느냐고 불친절하게 대한다. 파리는 후자의 대표주자였다. 그 당시 프랑스 이미지는 본인들의 언어에 대한 자부심이 상당히 강하다는 거였다. 영어를 배우지 말고 불어를 배우라는 스탠스. 식당에 가면 영어 메뉴판이 없고, 심지어 메뉴를 가져다주지도 않았다. 들어갔다가 그냥 나온 식당이 한두군데가 아니었다. 이런 식이니 파리를 좋아할 수가 없었다. 유럽에서 살다왔기 때문에 유럽 여행을 가는 친구들이 모두 나에게 컨설팅을 해주길 바랬는데, 나는 항상 일정에서 파리를 뺄 것을 권유했다. 무시하고 가는 친구들은 항상 후회했다. 내가 말했던 단점들을 고스란히 느끼고 왔다며. 그게 20년간 내가 파리에 가지고 있는 고정관념이었다. 


이번에 파리를 가고나서 완전히 생각이 바뀌었다. 20년간 파리는 많이 변해있었다. 2주간 있으면서 길거리에서 똥을 한 번도 보지 못했다. 사람들은 영어를 잘했다. 이게 같은 도시가 맞나 싶을 정도였다. 어디를 가도 영어가 통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자 마음이 편해졌고, 운신이 폭이 넓어졌으며, 끝까지 파리 사람들은 날 실망시키지 않고 친절하게 영어로 대답해주었다.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더니, 그간 프랑스에서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내년에 올림픽이 있어서 거리가 깨끗해진 것일까. 여전히 불어에 대한 자부심은 대단하다고 느꼈던 것이, 내년에 올림픽이 있는 도시의 대중교통에 영어가 단 한 마디도 없다. 불어를 못 하는 내가 처음 배운 단어가 sortie다. 출구를 뜻하는 단어인데 exit라는 단어를 한 번도 못 보니 sortie가 외워졌다. 하지만 사람들은 20년 전과 다르게 매우 친절했고, 마지막날 로컬 치즈가게에 들려 치즈를 사다가 직원이 너무 영어를 잘 하길래 그분의 친절함과 영어실력을 칭찬했더니 내 뒤에 차례를 기다리는 손님이 파리지앙은 모두 영어를 잘 한다며 농담을 걸어왔다. 나는 그 말에 동의할 수 없다며 웃었지만, 생각해보니 그 사람 말이 맞았다. 내가 가진 고정관념 때문에 자동반사로 나온 반응이었지, 내가 2주간 있으면서 대화했던 사람 중 영어를 못 하는 사람이 없었다. 


마음이 편해져서인지 20년 전 봤던 거리의 풍경이 완전히 새롭게 다가왔다. 파리는 유산을 중시하는 도시이고, 도시 외관은 20년 전과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오래된 건물을 허물고 새로운 건물을 세우는 것이 법적으로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도시인지라, 조금만 오래되면 다 때려부수는 우리나라와 다르게 도시 외관이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그럼에도 달라 보이는건 거슬리는 것이 없어서였다. 불편함, 불친절함, 더러움 이 나를 괴롭히지 않게 되자 파리는 그 어떤 곳보다 아름다운 곳이었다. 예전엔 안 보였지만, 이제는 보였다. 내가 파리를 좋아하게 될 줄은 몰랐다. 무엇이 파리 시민들을 달라지게 한 걸까. 세대의 변화인걸까. 한류의 영향인걸까. 오랫동안 이 의문은 내 머릿속에 남아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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