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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enaissance Nov 19. 2023

샀어야 했는데

요리에 관심이 많다. 보일러를 못 틀 정도로 거지같이 살다가 조금 여유가 생겼을때 가장 먼저 업그레이드 한 것이 주방용품일 정도로 요리를 좋아한다. 삼시세끼를 직접 해먹기 때문에 주방용품을 업그레이드 하는 것이 가장 시급하게 생각되었다.뭘 대단한걸 산 건 아니고, 1인용 압력돌솥과 무쇠 후라이팬, 올스텐 냄비, 숫돌 같은 필수적인 것들을 샀다. 매일 요리하는 사람이 쓰기엔 말도 안 되는 것들로 요리를 해먹고 있었다. 그때 살까 말까 엄청 고민했던 아이템이 있었는데 결국 사지 않고 무쇠 후라이팬으로 타협했다. 샀어야 했다. 그것은 구리 후라이팬이었다. 


무쇠 후라이팬은 열전도율은 낮고 열보존율이 높다. 뜨거워지는데 시간은 걸리지만 한 번 뜨거워 지면 잘 식지 않는다는 소리다. 요리를 하다가 재료를 추가로 넣었을때 온도가 급격히 떨어지지 않으니 재료에 골고루 열이 전달되고 음식이 맛있게 된다. 핵심은 후라이팬의 온도가 널뛰지 않는 것이다. 불고기를 막 했을때가 가장 맛있고, 식었다가 다음 끼니에 다시 데워 먹으면 맛이 덜 한 걸 떠올리면 된다. 요리를 하면서도 재료가 식으면 안 된다. 요리의 질이 떨어진다. 


구리 후라이팬은 열전도율은 높고 열보존율은 낮다. 뜨거워지는데 걸리는 시간이 짧다는 얘기다. 그만큼 빨리 식는다는 소리기도 하지만 불을 끄지 않는한 추가로 재료를 넣어도 금방 뜨거워지기 때문에 상관없다. 빨리 뜨거워지고 빨리 식고, 반응성이 빠르기 때문에 요리가 편하다. 내가 원하는 대로 후라이팬이 따라 움직여주는 느낌이랄까. 무쇠 후라이팬은 반응성이 느리기 때문에 다루기가 쉽지가 않다. 게다가 무겁다. 이런 이유로 최고급 레스토랑의 쉐프는 구리 후라이팬을 쓴다. 이쯤 되면 짐작했겠지만 코팅 후라이팬은 열전도율도, 열보존율도 애매하다. 요리가 맛있을 수가 없다. 요리를 좋아한다면 하루빨리 코팅 후라이팬에서 졸업하도록 하자. 


무쇠 후라이팬을 쓰다가 더 여유가 생기면 구리 후라이팬을 사야지 했다. 나의 결제를 미룬 그 제품의 가격은 30만원이었다. 그 마음을 먹고 딱 1년 후에 코로나가 터졌다. 각국의 봉쇄정책으로 온갖 자원의 가격이 급등하기 시작했다. 게다가 전기차 시장이 확대됨에 따라 구리 수요는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딱 1년만에 같은 제품의 가격이 60만원이 되었다. 떨어지겠지 했다. 떨어지면 사야지. 그리고 러시아 우크라이나 전쟁이 터졌다. 이젠 내가 사려던 제품은 더이상 생산조차 되지 않는다. 2.5mm 층의 구리가 들어가는 제품이었는데 이젠 가장 두꺼운 구리층이 1.5mm 제품만 생산된다. 근데 1.5mm 제품의 가격이 50만원이다. 2.5mm 제품이 생산되지 않는 이유를 알 수 있는 부분이다. 그냥 무쇠팬 마스터가 되어야지. 


무쇠팬이나 구리팬처럼 품질좋은 쇠로 만들어진 조리도구는 평생 쓰고 물려줄 수도 있다. 무쇠팬은 거의 매일 사용 중이며 최상의 컨디션이다. 그걸 감안했을때 구리팬은 그냥 고민하지 말고 샀어야 했다. 현명한 소비는 언제나 어려운 것 같다. 샀어야 했는데 못 산 걸 따지다보면 근데 끝이 없긴 하다. 회사 1년차때 트렌드 리포트 정리하다가 미국의 한 중학생이 코딩 알바를 하며 번 돈을 전부 투자해서 비트코인을 샀다는 뉴스를 접했다. 암호화 화폐, 블록체인이라는 기술이 이런 기술이라네요 라고 리포트를 정리했던 기억이 난다. 비트코인이 16달러 정도 하던 시절이다. 내가 그때 비트코인을 샀으면 지금 내 돈으로 100억짜리 상업영화를 찍었을거다. 하지만 그런 생각은 아무 의미가 없다. 비트코인 대박이 났으면 내가 영화를 했을까? 행복했을까? 아무 의미 없는 '만약' 게임이다. 결론은 후회해봤자 아무 소용 없다는 거다. 빨리 상업연출을 하고 싶다는 조바심이 없었다면 나르시시스트에게 사기도 당하지 않았을 테지. 하지만 이미 엎지러진 물이지 않나. 어떻게 할 건가. 코로나가 터지기전에 내 영화가 개봉했으면 삶이 많이 달라졌을까? 구리 후라이팬이 30만원으로 떨어지지 않을 것이고 한국영화가 예전만큼 활황이 되지 않을 것이다. 과거가 다시 오기를 기대하지 말고 현재에 충실해서 또다른 후회를 만들지 않는게 최선이다. 지금부터 잘하자. 지금을 잘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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