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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enaissance Nov 03. 2023

해야할 일

업무에 치여 해야할 일을 못하는 사람이 많다. 그래서 건강검진은 12월에 가장 밀린다. 나같은 프리랜서는 그런 것에 자유로울 것 같지만 개인을 상대로 하는 프리랜서가 아니라 회사를 상대로 하는 프리랜서의 경우 회사의 스케쥴과 비슷하게 흘러간다. 연초가 가장 바쁘다는 소리다. 영화 각본, 각색, 시리즈 각본 제의 미팅을 연초에 가장 많이 한다. 한해 예산을 짜고 계획을 세운 후 어느 팀의 누가 무엇을 하기로 결정되고 나면 그들이 움직이기 시작하는 시기가 1월이 아닌가 싶다. 


최근에 이것저것 새로운 경험을 해보고 있는데, 작년과 너무 비슷하다는 생각을 했다. 작년 이맘때 대형운전면허를 땄다. 왜 이 시기에 새로운 경험을 하러 돌아다니나 생각해보니 작년과 올해가 굉장히 비슷하게 흘러갔다. 연초에 이런저런 미팅을 하면서 할 일을 고르고, 계약을 한 후 작업을 하고, 이래저래 일이 풀리지 않아 연말은 일이 없어지고, 잠시 일에서 멀어지고자 새로운 경험을 찾는 것이다. 지금 쓰고 있는 시나리오를 계약을 하게 된다면 내년도 아마 비슷한 패턴으로 흘러가지 않을까 싶다. 


그렇게 바쁘지도 않았으면서 하지 않고 지나간 일들이 많다. 그래서 오늘 스케일링을 했다. 치아의 소중함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한 해 한 번 스케일링 받는 건 왜 그렇게 미루는지. 6월에 정도에 하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항상 연말에 하는 것 같다. 실제로 스케일링은 건강검진처럼 연말에 몰린다고 한다. 일에서 멀어지고자 했으니 해야하는데 안 하고 있는 일들이 뭔가 생각해보았다. 뭐 이리 많은지. 


우선 수면다원검사가 있다. 수면유지제를 먹은지 1년이 되어간다. 나와 함께 잤던 사람들은 나의 변화무쌍한 코골이 패턴에 충격을 먹곤 한다. 코골이, 수면무호흡, 잠꼬대, 이갈이 를 모두 한다고 해서 앱을 사용해 기록해 본 적이 있는데 실제로 그렇더라. 심한 순서는 쓰여진 순서대로다. 잠꼬대는 단어를 한 두 마디 하는 정도고 이갈이는 애교 정도로 넘어갈 수준이다. 영화제에 초대받는 등의 출장이 있을 때 항상 숙소가 1인실인지 물어보느데, 대우를 해달라는게 아니라 나 때문에 피해를 받을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행동이다. 나처럼 개떡같은 잠버릇을 가진 사람이 다른 사람과 함께 자도 괜챃다고 생각하는게 더 이상한 거 아닌가. 나는 양심적인 사람이다. 수면다원검사를 해야지 해야지 하다가 아직 안 하고 있는데 가격도 가격이거니와 병원에서 하루를 자야 한다는 것이 너무 껄끄럽다. 치과 가는게 부담스러운것과 똑같은 이치다. 나에겐 커다란 도전이 될 것 같다. 


보험을 들어야 한다. 나는 국가가 강제하는 보험 말고는 들고 있는 보험이 하나도 없다. 그 흔한 실비 보험도 없으니 암 보험이나 생명보험이 있을리가. 40년된 구옥에서 살 때에는 화재보험에 들까도 심각하게 고민했지만 불이 나면 노트북과 하드디스크만 챙기면 나는 재기가 가능한게 아닌가 싶어서 그만뒀다. 이제 중년의 나이이고 몸이 늙어가는걸, 죽어가는걸 하루하루 느끼고 있으니 보험을 들어야할텐데 무엇보다 들어야할지 하나도 모르겠다. 보험사에 다니는 친구에게 물어보자니 아직 비투씨 보험팀에 있는 동년배는 없다. 공부하기 시작하면 끌어파는 성격이라, 조만간 한번 보험에 대한 연구에 들어가지 않을까 싶다. 


사실 나는 해야할 일을 모두 기록해놓는 습관이 있다. 고등학교때부터 다이어리를 매년 썼는데, 하기로 해놓고 못 한걸 다음 년도 다이어리에 옮기는 습관이 현재까지 이어져, 맥 리마인더와 캘린더로 다이어리를 대신하는 지금에도 해야할 일 목록이 있다. 이 글을 쓰면서 그 목록을 들여다보니 놀랍게도 모두 해버렸다. 그 리스트에 가장 오래 있던 항목을 말해보자면 장편영화 연출하기 가 있다. 그걸 언제 목록에서 없애나 싶었는데 이젠 리스트에 없네. 그런 걸로 가득찼던 리스트에 아무런 항목이 없다는 것이 뿌듯하면서도 슬프다. 거기에 채워넣을 항목이 수면다원검사나 보험들기라니. 내 나이가 다시 실감이 나는 순간이다. 새로운 꿈을 만들자. 언젠가 해야할 것들을 채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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