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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enaissance Jan 28. 2024

나도 RAW다.

어렸을때부터 사진을 찍었다. 이 말이 요즘 20대에겐 당연한 소리처럼 들리겠지만 내 동년배들에겐 전혀 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있는 집 자식이거나 아버지가 사진 관련 일을 하셨나는 생각이 든다. 디지털 카메라가 대중화 된 것은 내가 고등학교 졸업할 때 즈음이다. 어떻게 이렇게 특정 시점을 정확하게 집을 수 있느냐고 하면, 딱 그 시점부터 사진 앨범이 끊기기 때문이다. 여기서 말하는 앨범은 인화된 사진을 집어넣는 책을 말한다. 스마트폰 갤러리가 아니라. 컴퓨터 프로그램 이름이 아니라. 대신 컴퓨터 사진 기록이 시작된다. 딱 그 시점부터 디지털 사진이 존재한다. MP3 플레이어 구입 시기와 마지막 CD 앨범 구매 시기가 겹치는 것과 비슷하다고나 할까. 이런 비교 표현 자체가 참 올드하다. 여튼 나는 그런 늙은이고, 자동 필름 카메라를 중학교 때부터 사용했다. 아버지가 사진 찍는걸 좋아하셔서 빨리 사진을 접했다. 디지털 카메라도 처음엔 정말 비쌌는데 빨리 구할 수 있었던 것은 아버지도 디카에 관심이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처음 산 디지털 카메라는 캐논 파워샷 a80이었다. 


대학교에 들어가고 나서도 필카를 꾸준히 찍었다.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캐논 AE-1과 미녹스 35gt로 친구들과 출사를 나가기도 했다. 그 당시는 디지털 카메라 화소가 아직 필름카메라를 못 쫓아오던 시기였다. 디지털 카메라로 찍은 사진은 크게 인화가 안 되었다. 그래서 고화질 사진은 필름카메라로 찍어야 한다는 명제가 존재하던 시기다. 카메라의 화소수는 날이 갈수록 크게 높아졌고, 군대를 제대하고 나니 있는 집 자식들은 그 이름도 유명한 캐논 EOS 5D 마크2를 들고 다녔다. 그 당시 사진 찍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오디마크투 의 발음을 줄여 오두막 투 라고 불렸다. 디카가 이 정도로 발전하고 나니 더이상 필름 카메라를 들고 다니는 사람을 찾기가 힘들어졌다. 나도 언젠가는 DSLR을 사야지 하다가 취직하고 나서야 첫 DSLR을 샀다. 나는 도저히 오두막을 들고다닐 것 같지가 않았다. 무지막지하게 크고 무거웠기 때문이다. 그래서 캐논에서 세상에서 가장 작은 DSLR이라고 대대적으로 홍보한 100d 모델을 샀다. 영화를 하겠다고 마음먹은 후로는 동영상 머신으로 더 활용을 많이 했다. 이미 그걸로 본전은 뽑았다. 더이상 단편이나 독립장편을 하지 않게 되고는 그 쓰임새를 잃었는데, 요즘 심심해서 다시 꺼내 이것저것 만져보고 있다. 그러다 막연한 거리감으로 도전해보지 않던 RAW 촬영에 도전하게 됐다. 


RAW 포맷은 이름 처럼 별다른 압축이나 코덱을 사용하지 않은 순수한 파일을 말한다. MP3가 인간이 들을 수 있는 음역대를 남겨두고 나머지를 다 잘라낸 파일이듯이, JPG로 대표되는 사진 포맷도 비슷한 방식으로 파일 크기를 줄인다. RAW는 다루기 어렵고, 용량만 많이 차지하며, DSLR을 느리게 만들고, 후처리도 복잡한 포맷이라는 고정관념이 존재했다. 그래서 지금껏 사용하지 않고 있었던 거다. 전문가가 아니면 RAW는 쓸 필요가 없다는 생각. 지금 무척이나 우울하고 심심하기 때문에 할 것을 찾다가 도전해본거다. 그리고 완전히 새로운 세계를 맞이했다. 난 지금껏 내 디카 능력의 반의 반도 사용하지 않고 있었다. RAW로 사진을 찍으면 후보정이 완전히 달라진다. 포토샵으로 RAW 파일을 열면 RAW 편집 전용 창이 생긴다. 20년을 포토샵을 사용하면서 이런 기능이 있는지도 몰랐다. RAW는 인간의 눈으로 캐치하지 못하는 부분까지 데이터가 풍부하기 때문에 보정을 해도 찌그러지는 부분이 적다. 잠재력이 무궁무진한 파일인거다. 


생각해보니 사람도 RAW가 아닌가 싶다. 영화에 도전하지 않았으면 나에게 이정도 연출력이나 스크립트 작문력이 있는지도 몰랐을 거다. 멘사 테스트를 보지 않았다면 내가 지능이 높은 줄도 몰랐을 거다. 아직도 나에겐 발굴되지 않은 능력이 있을 것이다. RAW 편집 창으로 만져보지 않았다면 몰랐을 눈에 보이지 않은 디테일이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 상업 장편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으면 내가 어떤 영화를 찍어낼 수 있을지 영원히 모른다. 누군가는 나를 RAW 포맷으로 봐주길 바란다. JPG로 판단해서 이 정도 데이터인 사람이라고 판단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요즘 제작사들은 1층에 리셉션도 없고 출입증 없이 문도 안 열리더라. 약속이 된 사람이 아니면 찾아오지도 말라는 거겠지. 뭔가 우리나라 영화시장을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JPG같다. 저 RAW에요. 포토샵으로 한번 열어봐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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