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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enaissance Jan 23. 2024

바빴으면 좋겠다. 우울하지 않게.

우울은 원인을 찾아 치료하는 따위의 것이 아니다. 정신과 진료를 꺼리는 사람들을 설득하기 위해 우울증은 감기 같은 거라고 홍보했던 사람들이 옳다. 감기도 치료제가 없는 것 처럼, 우울증도 치료제는 없다. 돈을 많이 벌면, 성공하면, 높은 곳에 올라가면 나아질 거라는 것은 착각이다. 모든 것을 다 가진 사람들도 스스로 생을 마감하는 경우가 많다. 감기도 진통제를 먹으며 견디는 사람이 있고 소주에 고추가루를 타는 등 자기만의 방식으로 낫는 사람이 있지 않나. 어차피 치료제는 없으니 자기 나름의 치료방법이 하나씩 있다. 가끔씩 찾아오는 우울이라는 병을 나는 뭔가에 집중하는 방식으로 견뎌냈다. 


목표가 정해지면 그 목표를 향해 전력질주를 한다. 오로지 목표만 생각하니 내가 우울한 상태인 것을 잊는다. 그건 우울에서 도피하는 것일 뿐 근본적인 해결책은 아니지 않냐고들 하지만, 우울증의 근본적인 해결책이 세상에 어디있나. 우울인자를 유전받고 발현한 것 뿐인데. 유전자 가위 기술이 발달하여 나중에 우울 유전자를 없애는 수술이 발명되면 모를까, 근본적 해결책 따위 없다. 그러니 도망가는 것이 뭐가 잘못됐나. 내 오리지널 스크립트를 쓰는 것이든, 남의 시나리오를 각색하는 것이든, 도망칠 수 있는 곳이라면 도망쳐야지. 영화가 그래서 참 좋은게 시나리오 단계부터 후반작업까지 끊기지 않고 할 수만 있다면 2년 정도는 도망칠 수 있다. 하지만 돈이 많이 들어가는 일이다 보니 투자 결정이 그렇게 일사천리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니... 상업이고 뭐고 독립영화라도 찍어야 하나. 


새로 쓴 시나리오를 돌려보는데 좋다는 쪽은 다 좋다고 하고, 안 좋다는 쪽은 욕에 가까운 피드백을 하더라. 나름 다 이름있는 제작사들인데 이렇게나 의견이 다르다. 이러니 다 운이라는 말이 나오는 거다. 시나리오를 평가하는건 정형화 되지 않은, 정성적 평가가 불가능한 영역이다. 피드백을 하면서 스스로의 말을 스스로 반박하는 자가당착 논리를 한두번 겪어본 것이 아니다. 주인공을 선하게만 포장해서 흥미가 떨어지는데 주인공의 악행 묘사가 거슬린다 는 식이다. 도대체 뭔 말이냐 그게. 스스로 본인이 하는 말을 듣고는 있는걸까. 결국 계약서에 서명하기 전까지 이런 지지부진한 피드백 프로세스를 거쳐야 한다. 시간이 남아돈다. 새로운 시나리오를 쓰고 싶은데 딱히 잡히는 아이템이 없다. 될 만한 영화 아이템 생각하지 말고 정말 만들고 싶은거 쓰려는데 이젠 예전처럼 아이디어가 샘솟지 않는다. 많이 지쳤다. 


일로는 도망을 치지 못한 집안일에 집중해보려 하는데, 지금 사는 집은 딱히 할 일이 없다. 40년된 구옥에 살 때에는 정말 스펙타클한 일상의 연속이었다. 특히나 오늘처럼 최고온도가 영하 8도인 날은 동파 방지하랴, 변기물 체크하랴, 세탁기 체크하랴, 난리도 아니었다. 집에서도 옷을 다섯겹을 껴입고 장갑과 신발을 신었고, 보일러를 아무리 틀어도 춥길래 도저히 안 되겠어서 등유난로를 실내에다 틀었다. 정신이 몽롱해지는 것을 느끼면서 어쩔 수 없이 환기를 시켰지만, 창문을 열자마자 들어오는 한파에 등유값이 아깝게 느껴졌던 기억이 난다. 몸이 너무 편해서, 여유가 많아서 우울하다는 말, 우울증은 부자의 병이라는 말이 왜 나오는지 알 것 같긴 한데, 그래도 그딴말 좀 하지 말아라. 겪어보지 않은 것을 쉽게 말하지 말라고 좀. 이제 내 지인이라면 내가 우울할때 가만히 내버려 둬야하는 걸 아는데, 우울은 커녕 슬픔도 느껴보지 못하는 소쇼패스에 가까운 인간들은 여전히 나를 이해하지 못하고 툭툭 건드려댄다. 내가 우울하다고 건들지 말라고 말을 해도 자기가 이런 일이 있었는데 어떻게 생각하냐는 둥 말을 건다. 우울이 부자의 것이니 뭐니 이딴 소리는 이런 류의 사람이 만들었을 거라고 확신한다. 


바쁘고 싶다. 하지만 내 마음대로 바쁘지도 못하는 산업이다. 산업의 문제가 아니라 내가 문제가 아닐까 생각한다. 내 탓이라고 결론을 내리는 이유는 내가 우울해서이다. 알면서도 고쳐지지 않는다. 어쩌겠나. 이또한 지나가리라 하며 버텨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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