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 가족이 시차 부적응으로 동동 떠다니던 새벽. 다섯 시간 전에 라면을 먹었음에도 배가 텅 빈 것처럼 출출했다. 한국 시각을 검색해 보니 저녁 먹을 시간. 음. 역시 나의 몸은 정직해. 라면을 한 번 더 먹기엔 이 좋은 뉴욕에 와서 너무 슬픈 일이기에 아침 식사가 되는 근처 맛집을 검색했다. 오! 핫케이크 집이 있다! 한 시간 뒷면 문을 연다고 쓰여 있기에 씻고 머리 말리고 화장을 했다. 한 시간 뒤, 구글 지도를 켜서 10분 즈음 걸어가니 문을 연 식당이 우릴 반긴다.
핫케이크 하나 하고요. 음~ 퍼펙트! (perfect!) 또, 샌드위치 하나 하고요. 오케이. 퍼펙트! 커피 두 잔이랑 오렌지 주스 하나요. 오~ 우리 집엔 오렌지 주스가 없어요. 그럼 어린이가 마실 수 있는 주스는 뭐가 있나요? 사과 주스가 있어요. 그럼 그걸 주세요. 퍼펙트!
퍼펙트를 남발하는 직원이 메뉴판을 들고 갔다가 다시 돌아온다. 손에 종이 같은 걸 가지고 오더니 딸에게 준다. 오? 이건 뭐지? 색칠 공부인데? 색연필도 준다. 딸은 신이 났다. 메뉴가 나오는 동안 딸은 열심히 그림을 색칠한다. 옆 테이블에도 여자아이가 두 명 앉았는데 그 친구들 역시 주문 후 열심히 그림을 색칠했다. 색칠 거리가 나오기 전엔 소파 위에 오르락내리락해서 아빠가 애를 좀 먹는 것 같았는데 색칠을 시작하니 사방이 고요하다. 남편이 우리도 이걸 만들어서 한국에 배포하자고 한다. 문제는 식당에서 이걸 사줘야 하는데 과연 사줄까? 한국에서는 노키즈존이 한참 논란이다. 식당에서 아이들을 배제해 버리려는 마당에 과연 색칠 종이와 색연필을 사줄까. 잘 모르겠다. 새벽에 배고플 때마다 우린 그 식당을 찾았는데 갈 때마다 아이에게 색연필과 색칠 거리를 줬다. 덕분에 우리 부부는 조금은 편안하게 음식이 나오길 기다리며 커피를 마셨다.
며칠 뒤, 프랑스 식당을 가게 됐다. 우리가 테이블에 앉자마자 직원이 종이와 색연필을 가지고 나온다. 그걸 보고 딸은 신이 났다. 유치원 친구들에게 그림을 그려준다고 열심히 그림을 그리고 친구들 이름을 쓴다. 덕분에 남편과 나는 천천히 메뉴를 보고 음식을 주문했다. 주문 후에도 느긋하게 대화할 수 있었다. 딸이 그림을 그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국에 돌아가서 내가 그림 그릴 도구를 준비해서 다닐까 고민할 정도였다.
식당에서 또 좋았던 것은 어린이 메뉴가 다양하게 준비된 곳이 꽤 있었다는 것이다. 한국은 감자탕집에 가도 돈가스, 동태탕 집에 가도 돈가스, 추어탕 집에 가도 어린이 메뉴는 무조건 돈가스다. 아니! 어른들 음식 파는 곳에 왜 애를 데리고 가서 메뉴가 돈가스밖에 없냐고 투정이야!라고 하면 할 말이 없다. 돈가스라도 파는 집은 그나마 천국이다. 보통은 아이를 위한 메뉴가 없다. 한식집에 가도 반찬이 죄다 매운 것으로 구성돼 있어서 아이가 콩나물무침 하나에 밥을 먹거나 그마저도 없는 집이면 맨밥만 먹기도 한다. 불고기 볶음은 안 매운 줄 알고 시켰는데 후추가 범벅돼 있으면 그날도 아이는 맨밥만 먹었다. 그래서 우리 집은 여행지에 가서 뭔가를 먹고 싶어도 무조건 설렁탕이다. 설렁탕집이 없으면 돈가스집에 간다. 언젠간 아이들이 크면 우리도 함께 주꾸미 볶음을 먹을 수 있겠지라며 미래를 꿈꾼다. 뉴욕은 그렇지 않았다. 키즈 메뉴가 꽤 알차게 준비돼 있어서 아예 키즈 메뉴판을 따로 준다. 만약 준비돼 있지 않다면 엄마 아빠와 음식을 나눠 먹는 것에 큰 부담을 느끼지 않아도 된다. 한국은 글쎄…. 3살 아이에게 1인 1 메뉴를 요구한 국밥집이 논란이 되거나, 엄마들이 아이들을 우르르 데리고 와서는 어린이 메뉴만 시키고 어른들은 1인 1 메뉴를 안 먹어서 쫓아낸 이야기들이 기사화돼 있다. 그만큼 밥을 먹는 것에 갈등이 너무 많다. 그러니 아이를 키우는 집에선 앞으로 집밥만 먹이는 것이 좋겠다. 어린이가 있는 집은 도시락을 싸서 다니거나 집에서만 밥을 먹이자. 그렇지 않으면 투덜대지 말자. 자영업자들이 물가 상승으로 식당 운영이 힘들다고 하는데 왜 애를 데리고 가서 엄마랑 나눠 먹는가! 집에서 먹어라! 정~ 먹고 싶으면 배달시켜서 먹고 아이는 집밥을 줘라! 그러면 간단한 것을 왜 애를 데리고 식당에 다니냔 말이다.
그런데, 왜 한국에선 안 되는 것들이 뉴욕에서는 될까. 아이들은 집중력이 짧으므로 식당에서 떠들거나 돌아다닐 수 있으니 그들을 위해 색칠 거리를 주자. 아이들은 어른들이 먹는 음식을 못 먹을 수도 있으므로 키즈 메뉴를 미리 다양하게 만들어두자. 아이들은 먹는 양이 적기 때문에 부모가 먹는 메뉴를 나눠 먹을 수 있게 하자는 그 생각과 행동들이 왜 뉴욕에선 되냔 말이다. 뉴욕은 사회적 갈등이 없어서 어린이를 배려하고 있을까? 뉴욕은 물가가 비싸지 않아서 부모랑 밥을 나눠 먹어도 될까? 아니다. 뉴욕은 어린이라는 존재에 대한 존중이 있기에 그들의 눈높이에서 보고 배려하기 때문에 그렇다. 조금 양보하는 것이 막대한 피해를 보는 건 아닌데 한국에서는 너무 심하게 잣대를 들이댄다. 식당도 부모도 그렇다. 조금만 양보하면 되는데 그 조금을 양보하지 못한다. 결국, 어린이는 식당에 피해를 주는 잠재적 범죄자로 몰려 혐오의 대상이 돼 버렸다. 어린이의 존재가 식당 존립에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닌데 존재 자체로 이해득실을 따지게 돼버리니 식당에 가기도 전에 식당 운영자도, 데리고 가는 부모도 이미 지쳐있다.
EBS '인구대기획 초저출생'
2022년 출산율이 0.78명이어서 놀랐다. 우릴 바라보는 외부의 시선은 우리보다도 더 엄청난 충격을 받은 것 같다. 오~ 한국은 망했네요라며 머리를 감싸 쥔 어떤 교수의 인터뷰가 우리의 미래를 대변한다.
2023년 출산율은 작년보다 더 떨어질 것이란 전망이 슬슬 나오고 있다. 2023년 3분기 출산율이 0.6명이었다고 하니 미래를 논하기엔 이미 늦어버려도 너무 늦은듯하다.
음식만 바라보며 싸우는 동안 우리가 무엇을 놓치고 있었던 걸까. 진지하게 고민해 볼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