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자우제에 도착해 숙소에 짐을 풀고 서둘러 밖으로 나왔다. 숙소 바로 옆에 고자우캄반을 탈 수 있는 매표소가 있었다. 고자우캄반을 타고 츠비젤알름(Zwieselalm)에 오르면 고자우제를 한눈에 내려다 볼 수 있다. 위에서 내려다 보는 호수의 모습은 어떨까? 호기심 가득한 마음으로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조심스레 들어섰는데 건물 안은 텅 비어 있었고 매표 창구도 닫혀 있었다. 한낮인데 운행을 안할리는 없고 당황스러운 마음을 진정시키며 이제 무얼 해야하나 고민에 빠졌다. 그 때 내가 부시럭거리는 소리를 들었는지 창구 안에 있던 직원이 문을 열고 나왔다. 13.9유로인 왕복 표를 끊어 주고는 곧장 입장표의 바코드를 찍고 같이 케이블카에 올랐다.
케이블카를 타고 꽤 위로 올라.갔는데 그 높이가 어마어마했다. 잘츠부르크 운터스베르크 케이블카를 탔을 때는 주위가 온통 흰 구름으로 가득차서 세상이 하얗게 보였었다. 그 때와는 다르게 고자우캄반을 타고 오르며 보이는 하늘은 무척 맑았다. 위로 올라가면 갈수록 점점 더 멀어져가는 발 아래 마을의 모습이 아찔했다.
고자우캄반 시간표
케이블카에서 내리니 한쪽 벽 옆에 고자우캄반 시간표가 붙어 있었다. 시간표상으로는 꽤 자주 운행하는 것으로 보였는데, 사실 케이블카를 타려는 사람이 있으면 그제서야 운행하는 것 같았다. 직원 한 명이 모든 걸 담당하고 있는 듯 했고 고자우캄반을 타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내가 왔던 9월이 비수기였는지 아니면 늘상 찾아오는 사람이 별로 없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말이다.
높은 산 위로 올라와 트래킹을 하려고 보니 잘츠부르크 운터스베르크에서 한없이 걸었던 순간들이 떠올랐다. 그 때와 마찬가지로 정보가 부족했기 때문에 내가 얼마나 걷게 될지 또 시간은 얼마나 걸릴지 전혀 몰랐다. 어짜피 이틀간 고자우제 바로 옆 숙소에서 머물 예정이라 나에게는 시간이 많았다. 때문에 여유롭게 고자우(Gosau)의 아름다움을 만끽하며 천천히 여행할 수 있었다.
길을 따라 걷고 있는데 짙푸른 고자우 호수가 나를 계속 쫓아왔다. 밤길을 걸을 때 달이 계속 나를 따라오는 것 같은 기분과 비슷했다. 멋있는 풍경에 신이나서 필름 카메라를 집어들고 사진을 몇장 찍었다. 찍는 도중에 필름을 다 써버려서 '이제 필름을 좀 갈아야겠군'하는 생각으로 카메라 뚜껑을 열었다.
아뿔싸! 바보같이 필름을 다 감지 않은 채로 카메라를 열어버렸다. 이미 필름 곳곳에 빛이 들어가 사진은 엉망이 되어 버렸을 것이다. 급히 카메라 뚜껑을 닫았지만 이미 늦은 기분이었다. 근데 한참 뒤에 필름을 스캔해서 받아보니 벌겋게 탄 사진도 나름의 추억으로 남았다.
여행 내내 함께한 Pentax MX
달력 그림처럼 비현실적이게 아름다운 풍경이 눈앞에 있으니 한참을 멈춰 서있게 되었다. 깊은 웅덩이 같은 호수 위로 푸른 하늘이 담겨 있었고 그 주위로 쭉쭉 뻗은 나무들이 빼곡했다. 멀리 보이는 산꼭대기 위에는 켜켜히 쌓인 눈이 보였다.
길 주변 풀밭 위에서 많은 소들이 여유롭게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멀리 있는 것도 아니고 내가 가는 길목 바로 옆에 있었기에 자세히 관찰할 수 있었다. 가까이서 보니 생각보다 소가 엄청 컸다. 나는 괜히 겁에 질려 혹시라도 소가 다가올까봐 조심스러웠다. 하지만 소들은 나에게 관심이 전혀 없는 듯 보였다. 소들이 자유롭게 풀을 뜯고 폭신한 흙을 밟으며 돌아다니고 햇살도 쬐며 그렇게 지내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나는 목적지 없이 그저 나있는 길을 따라 걷고 있었다. 이 길의 끝이 어딘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냥 마음 내키는 곳까지 걷고 싶었다. 그렇게 혼자 걷고 있는데 주위에 간간히 보이는 사람들 모두 삼삼오오 짝을 지어 왔더라. 적어도 지금 이 시간만큼은 혼자 온 사람이 나 뿐인 듯 싶었다. 그런 생각이 드니 괜히 울적해지며 외로움이 몰려왔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라면 더 행복할 것만 같은 그런 풍경들의 연속이었다. 걷고 걷다보니 재미난 일이 생겼다. 멀리서부터 총총총 다가오는 꼬마 아이가 보였다. 아이의 기다란 금빛 머리칼은 꽁 묶여 있었다. 뭔가 쭈뼛거리는 몸짓으로 나에게 오더니 Hallo라고 인사를 건넸다. 나도 반갑게 Hallo라고 인사해 주었는데 꼬마 아이는 쑥스러운지 부모에게 달려갔다.
내 느낌으로는 엄청난 거리를 걸어온 것 같았다. 심지어 가는 도중 고자우캄반이 아닌 다른 케이블 카도 나왔다. 곳곳에 표지판이 있었지만 어떤 곳인지 알 턱이 없었다. 되돌아가는 길을 기억하면서 가자 다짐하며 계속 걸었다. 그렇게 정처없이 걷다보니 환상적인 풍경과 마주할 수 있게 되었다.
고자우제(Gosausee)가 한눈에 쏙 들어왔다. 그리고 멀리 마을의 모습도 보였다. 탁 트인 공간에 우뚝 서서 먼 호수를 바라보았다. 마주쳤던 사람들은 다 어디로 가버렸는지 나 혼자 뿐이었다. 경쾌한 바람에 머리카락이 흩날렸다. 들리는 것은 웅웅거리는 바람 소리 뿐이었다.
갑자기 이 현실이 믿기지 않았다. 너무 아름다운 풍경을 마주하게 되면 항상 그랬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나는 독서실에 틀어박혀 매일매일을 똑같이 살았었다. 이런 날이 올 줄은 꿈에도 몰랐다. 용기를 내서 비행기 표를 끊었고 어쩌다 보니 이곳까지 오게 되었다. 이 아름다움이 영원했으면 좋겠다. 내가 떠나더라도 고자우제는 이 자리에 그대로 있겠지. 먼훗날 다시 찾을 날을 떠올리며 먼 호수를 두 눈에 한껏 담았다.
시간이 많이 흘렀다. 이제 왔던 길을 되돌아가기로 했다. 하얀 구름을 머금고 있던 푸른 고자우제야 안녕, 눈 덮힌 뾰족한 산도 안녕, 초록빛깔 무성한 나무들도 안녕! 한참을 걸어 왔기에 케이블카 타는 곳까지 돌아가는 길은 꽤 시간이 걸렸다.
고자우 캄반을 타고 내려가는 길, 올라올 때와는 다르게 케이블카 안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걷는 내내 보이지 않던 사람들은 어디 있다가 이렇게 나타난 것인지 도통 모르겠더라. 올라올 때 표를 끊어 주었던 직원이 케이블카를 타고 내려갈 때도 함께했다. 내려가서는 아늑한 숙소에 잠시 들러 쉬다가 고자우제를 한바퀴 돌아보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