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홀로 고자우제 한바퀴 산책

by WOONA

고자우 캄반을 타고 산 위로 올라갔다 와서는 잠시 게스트하우스에 들러 휴식을 취했다. 문을 열고 내 방 안으로 들어가 한동안 침대 위에 멍하니 누워 있었다. 숙소가 가까우니 왔다갔다하며 쉴 수 있어 좋았다. 그러다가 숙소 앞 고자우제를 한바퀴 돌아 보려고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무거웠던 백팩은 치워 두고 정말 필요한 것들만 꺼내서 작은 크로스 백에 넣었다. 검은색깔 크로스백을 매고 한손에는 필름카메라를 쥐어든 채 가볍게 길을 나섰다.



산뜻한 걸음으로 고자우제를 한바퀴 두르고 있는 흙길을 따라 천천히 걸었다. 내가 어쩌다가 고자우제에 오게 되었는지 천천히 곱씹어 보았다. 맨 처음 계획으로 이맘 때 묵으려고 했던 곳은 '할슈타트(Hallstatt)'였다. 할슈타트를 필두로 이리저리 검색을 하다보니 고자우 마을 그리고 그보다 더 깊숙히 자리잡고 있는 고자우제(Gasausee, 독일어로 'see'는 호수를 뜻함)를 알게 되었다.


인터넷을 통해 본 고자우제의 모습이 너무 아름다워서 반충동적으로 이곳에 있는 숙소를 이틀간 잡았다. 할슈타트에 더 다양한 숙소가 많아서 거기에서 이틀을 지내며 고자우제로 당일치기 여행을 올 수도 있었다. 하지만 고자우 호수 옆 하나뿐인 숙소에서 이틀밤을 보내는 것이 나에게는 더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비가 왔었는지 축축히 젖어있는 나뭇잎들이 바닥에 이리저리 흩어져 있었다. 호수 너머로 멀리 보이는 높은 산에는 눈이 쌓여 있었다. 저 눈들이 녹아서 이 호수까지 흘러 들어온 것일까? 호수는 아주 잔잔해서 물 위로 나무들과 암산의 반영이 곱게 떠 있었다. 안이 투명하게 비치는 맑은 호수는 에메랄드 가루를 뿌려놓은 듯 푸르스름하고 상쾌한 빛을 띄고 있었다. 사람을 매혹시키는 아름다운 빛깔이었다.




쭉쭉 하늘 위로 뻗은 나무들이 길 좌우로 늘어서 있었다. 푸른 이파리들이 가지 위에 매달려 있었고 돌뿌리에는 이끼가 가득 껴있었다. 온통 초록 빛깔로 물든 세상이었다. 그렇게 숲길을 걷는데 왠 검은 송아지 한 마리가 한걸음 한걸음 천천히 내쪽으로 걸어 왔다. 작고 귀여운 송아지였는데도 나는 지레 겁을 먹고 오도가도 못한 채 가만히 돌처럼 서 있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등장한 크고 검은 소, 아마 작은 송아지의 어미소가 아니었을까? 어미소가 나타나자 나는 재빨리 길 가장자리로 자리를 옮겼다. 나보다도 덩치가 큰 소가 내쪽으로 다가오니 혹시라도 나를 공격하진 않을까라는 걱정에 무의식적으로 숨었던 것 같다.



'소'라는 동물을 이렇게 가까이서 본 것은 아주 오랫만이었다. 어릴적 외할머니 댁 외양간에서 소를 처음 봤던 때가 떠올랐다. 그 때 소는 외양간에 갇혀 있어서 무서운 줄 몰랐었다. 이렇게 길을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소는 왠지 모르게 무서웠다.




소 귀에 매달린 번호표를 봐서는 사람이 기르는 소 같았다. 목에는 종이 달려있는지 걸을 때마다 딸랑딸랑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길을 따라 천천히 걷는 소들을 멀찍이 떨어져서 바라 보았다. 한 두마리가 아니었다. 줄줄이 계속해서 소들이 길을 따라 걸어왔다. 무심한 듯 내 앞을 스쳐가는 소들이 신기했다. 이런 광경을 보게 될 줄은 몰랐다.




소들은 모두 같은 곳을 향해 걸어 가는 것 같았다. 소들은 조그만 둔덕을 넘어 아래로 내려가 물가로 향했다. 나도 조심스레 소들을 쫓아 호숫가 쪽으로 걸어갔다.



소들은 호숫가에서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었다. 사람들은 온데간데 없었다. 이 넓은 호수에는 조용히 풀 뜯는 소들과 나 뿐이었다. 나는 가만히 서서 먼 호수와 소들을 바라 보았다. 목가적인 풍경에 서서히 내 마음은 따뜻하게 물들어 갔다. 그리고 아름다운 풍경들을 하나하나 카메라에 소중히 담았다.





호숫가에는 소 뿐만 아니라 오리도 있었다. 노란 부리를 가진 귀여운 오리는 내가 무섭지도 않나 보다. 내가 가까이 다가가도 오리는 제 갈길을 갈 뿐이었다. 한참 소들과 오리를 바라보다가 호숫가를 돌아서서 둔덕을 올라갔다. 발 아래에는 잔잔한 돌맹이들과 이끼, 초록풀들이 가득했다. 그 사이로 맑은 물이 흐르고 있었다. 잠시 쪼그려 앉아 흐르는 물에 손을 대어 보니 얼음장 같이 차가웠다.




다시 길을 따라 다시 걸었다. 고자우제 한바퀴를 다 도는데 대략 2시간 정도 걸렸던 것 같다. 가는 도중에 풍경이 멋있어서 자꾸 멈춰서는 바람에 시간이 오래 걸렸다. 걸으며 주위 풍경을 오래도록 감상하고 아름다운 풍경들은 사진에 담으며 천천히 걷다보니 힘들지 않았다. 오히려 에너지가 충전되는 기분이었다.



고자우캄반을 타고 위로 올라갔을 때 보이던 암산들이 눈앞에 보였다. 산들은 위에서 보았을 때보다 더 선명하고 밝게 보였다. 산 꼭대기에는 희뿌연 구름들이 멋지게 걸려 있었다. 정말 멋있는 풍경이었다.





호수 위로 산과 하늘이 아른아른 비쳤다. 또렷한 반영을 보니 짙푸른 호수 속에 또 다른 세상이 존재하는 듯 했다. 갑자기 물 속에 빠져 들고 싶다는 욕구가 솟아 올랐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도리도리 휘젓고 다시 걸었다.


고자우제 한바퀴를 다 돌고 숙소에 돌아왔다. 방금 전까지 신비로운 동화 속 나라에 다녀온 듯 정신이 몽롱했다. 난 푹신한 침대 위에서 꿈나라 속으로 빠져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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