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를 통합권을 사들고 인포메이션 센터를 나왔다. 제일 먼저 향한 곳은 고흐가 머물렀던 정신병원이다. 인포메이션 센터와 제일 가까워서 먼저 가보기로 했다. 구글맵에 'L'espace Van Gogh'를 찍어두고 5분 즈음 걸었더니 노란 건물이 나타났다.
꽃으로 가득한 정원을 감싸고 있는 노란 건물은 고흐가 머물렀던 정신병원을 복원해놓은 것이다. 지금 이곳은 문화센터로 쓰인다고 한다. 이름 모를 색색의 꽃들이 군락을 이루며 피어나 있었다. 중간중간 화단 사이로 길이 나있었다. 그 사이사이를 걸으며 정원을 산책했다. 이곳에 사람들이 별로 없어 나 혼자 정원을 빌린 기분이었다.
아를에 머물던 고흐는 고갱과 크게 다투면서 자신의 귀를 잘라버린다. 그리고 잘라낸 귀를 어느 매춘부에게 건네 주는데 이 사건은 아를 내에서 큰 화제가 된다. 마을 사람들은 미치광이 고흐와 함께 살 수 없으니 그를 정신병원에 가둬달라고 호소했다. 고흐는 공권력에 의해 이곳에 강제 입원하게 된다.
그가 정신병원에 머물며 그린 작품이 하나 있는데 이곳의 모습과 거의 흡사했다. 가운데 있는 분수대와 꽃이 가득한 정원, 노란색 기둥과 화단 사이 난 길까지 모두 그대로였다. 단지 달라진 것은 이곳이 병원이 아니라 문화센터라는 사실 하나였다. 마치 난 그림 속에 들어온 듯 황홀한 기분으로 이곳을 걸었다.
그는 이 정신병원에서 잠시 머물다가 퇴원한 후 다시 생레미 정신병원에 입원했다. 이후 오베르에서 권총자살로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한다. 고흐는 살아생전 단 하나의 작품밖에 팔지 못했다. 가난에 허덕이며 무명화가로 힘겹게 살았던 그가 전세계에서 사랑받는 화가가 되었다. 그를 떠올리며 누군가가 지구 반바퀴를 돌아 찾아올 줄 누가 상상이나 했었을까?
아를이 좋았던 점 중 하나는 작은 도시라서 관광지마다 거리가 무척 가까웠다는 점이다. 도보로 여기저기 왠만한 곳들을 무리 없이 다닐 수 있었다. 나같은 뚜벅이 여행자에게 딱이었다. 노란 건물 밖으로 나와서 고흐의 밤의 카페 테라스라는 그림의 배경이 된 곳을 찾아가보기로 했다. 구글맵에 'Le Cafe Van Gogh'를 찍어보니 내가 있던 문화센터에서 도보로 5분 정도 거리였다.
걷다보니 멀리 노란 건물이 얼핏 보이기 시작했다. 두근두근 심장이 요동쳤다. 길고 긴 여정 끝에 드디어 이 카페를 보게되는구나! 아를에 찾아가야지 맘먹었던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이 노란 카페를 보고 싶어서였다. 어릴적부터 고흐의 별밤이 담긴 노란 카페 그림을 아주 좋아했기에 직접 보고 싶었다. 노랗게 칠해진 건물 벽면과 노란 천막이 드리워진 야외 테이블, 그림에서 보던 그대로였다.
고흐의 밤의 카페 테라스(Terrasse du cafe le soir)라는 그림을 언제 처음 알게되었을까? 마트에서 사 온 퍼즐 조각이 선명한 첫 기억이다. 언제였던가 마트에서 명화가 담긴 퍼즐을 파는 것이 유행했던 때가 있었다. 서적코너 옆에 항상 퍼즐들이 있었는데 많고 많은 퍼즐들 중 난 이 그림이 담긴 퍼즐을 데려왔었다. 그리고 한동안 퍼즐에 푹 빠져 방바닥에 들러 붙어 퍼즐만 맞췄다.
밤의 카페 테라스 (Terrasse du Cafe le Soir)
이 그림은 날 잡아끌었다. 밤하늘에 빛나는 별이 좋았고 노란색과 푸른색의 대비도 좋았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파란색이 하늘에 깔려 있어서 좋았고 어두운 밤이지만 밝고 선명한 이미지가 좋았다. 사람들의 얼굴은 보이지 않아도 모두 행복할 것만 같은 어느 밤 날, 가족들이 모이고 친구들끼리 모이고 그런 흥겨운 분위기가 느껴져서 좋았다.
고흐는 파란색과 보라색으로 하늘을 칠하고 노란색과 초록색으로 카페와 길거리들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밤하늘 위로 반짝이는 별! 저 별들이 없었다면 이 그림은 내 기억속에서 잊혀졌을지도 모른다. 고흐는 사흘 밤낮을 이 그림에 매달렸다고 한다. 그림이 거의 완성될 즈음 푸르스름한 밤하늘 위에 노란색 물감을 톡톡 칠해 넣었을 때 얼마나 황홀했을까?
그림을 제대로 느껴보려면 밤에 이곳을 찾아왔어야 했다. 어두운 밤에 노란색 전등 불빛이 카페와 길거리를 비추는 모습을 본다면 감동이 배로 올 듯 싶었다. 하지만 유럽 여행을 떠나기 전에 어두운 밤에는 혼자 다니지 않기로 내 자신과 약속했었다. 동행이 있을 때만 밤에 나가서 야경을 구경했다. 아를에서는 동행을 구할 수가 없어서 컴컴해진 뒤로는 숙소 안에만 있었다. 내가 선택한 일이니 후회하지는 않았지만 약간의 아쉬움은 남았다.
잠시 쉬면서 목도 축이고 허기를 채우려고 카페에 들어갔다. 노란 카페를 마주보며 먹고 싶어 맞은편 카페 야외 테이블에 자리잡았다. 곧 직원이 다가와 메뉴판을 건네고 주문을 받았다. 미소 가득한 표정과 부드러운 말투에서 따뜻함이 느껴졌다. 내내 혼자 다녔다보니 말할 기회가 별로 없었다. 레스토랑 직원분이나 인포메이션 센터 직원, 기차역 직원 등과 간간히 몇마디 나눴을 뿐이다. 이분들이 날 조금만 친절하게 대해줘도 감동이 밀려왔다.
여기서 먹었던 애플파이는 평생 잊지 못할 맛이었다. 인생 애플파이라고나 할까? 수많은 애플파이를 먹어보았지만 그 어떤 것도 이 맛을 따라오진 못했다. 한 입 크기로 잘라 입에 넣으니 큼지막한 사과 조각들이 부드럽게 씹혔다. 적당히 잘 조려서 너무 뭉그러지지 않았고 속에 아삭거리는 식감이 남아 있었다. 같이 나온 생크림에 찍어 먹고 에스프레소를 한 모금 넘기는데 천국의 맛이었다. 에스프레소는 쓰다고만 생각했었는데 의외로 고소했다. 애플타르트 양이 의외로 많아서 다 먹고나니 한 끼 식사를 마친 기분이 들었다.
카페 인터넷이 빵빵 잘 터지길래 엄마와 보이스톡을 40분 넘게 했다. 하루종일 못했던 말들을 엄마에게 쏟아냈다. 말을 하면서 그리고 엄마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하루를 위로받았다. 힘들었던 일들이 스쳐지나가면서 집이 사무치도록 그리웠다. 돌아다니며 무언가를 보고 느낄 때면 그저 좋다가 이렇게 혼자 있는 시간 멍하니 생각이 깊어질 때면 갑작스레 우울에 빠지기도 했다. 그리운 집에 갈 날도 얼마 안 남았으니 힘을 내서 다시 길을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