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페에서 꽤나 많은 시간을 보냈다. 애플파이와 커피를 다 먹고 자리에서 일어나 또 다시 걷기 시작했다. 목적지는 'Musée Réattu'라는 미술관이다. 인포메이션 센터에서 구입한 아를 통합권으로 두 곳의 뮤지엄에 갈 수 있었다. 아를에 머무는 이틀동안 하루에 한 곳씩 가기로 마음 먹었다.
느즈막한 오후 시간에 아를 강둑을 따라서 혼자 걸었다. 터덜터덜 걷는 걸음에는 힘이 없었다. 하늘은 회색 구름으로 꽉 차있었고 강물은 믹스커피를 타놓은 것처럼 뿌옇기만 했다. 내 주위의 온갖 풍경들이 힘들었던 나를 더 울적하게 만들었다. 아, 혼자가 아니였다면 조금 달랐을까? 누군가와 이야기하며 걷는다면 기분이 조금 풀릴 것도 같은데 강둑은 적막하기 그지 없었다.
아를 론 강변을 지나쳐 마침내 미술관에 도착했다. 오래된 유적처럼 보이는 건물이 눈앞에 서있었다. 켜켜히 쌓인 얼룩진 벽돌들이 지나간 세월을 말해주고 있었다. 미술관에 대한 사전 정보 없이 무작정 찾아온터라 별 기대가 없었다. 하지만 옛스런 건물을 보니 왠지 모를 기대가 생겨 심장이 두근두근했다.
통합권을 보여주고 미술관 안으로 들어가니 여러 종교화들과 사진, 조각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간간히 적힌 영어 안내문 외에는 읽을 수 있는 글들이 전혀 없었다. 불어를 알았다면 더 많은 것들을 느꼈을텐데 아쉬웠다. 작품들을 머리로 이해하는 대신 눈으로 보고 가슴으로 느껴보자 생각했다.
마음에 드는 그림들과 조각들은 사진으로 남겼다. 사실 작품들보다 더 기억에 남는 것은 창문 너머로 비치던 론 강의 모습이다. 방금 전 내가 걸었던 강둑이 멀리 보였다. 날이 좋았다면 다른 빛깔일까? 흙탕물만 보고 가는 것 같아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사진 중에서는 딱히 마음에 드는 작품이 없었다. 글을 읽거나 설명을 듣고 이해가 필요한 작품들이라 그런 것일까? 나는 아무런 설명 없이 그냥 눈으로 보고 끌리는 작품들을 좋아한다. 예전에는 아무 감정이 안느껴지는 작품이더라도 유명한 작가의 것이라면 괜히 무언가를 느껴야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히곤 했다. 널리 알려져 있고 많은 이들이 가치를 인정한다는 사실은 나름의 이유가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서서히 시간이 흐르면서 내 맘 내키는대로 보기 시작했다. 내가 이 분야의 전공자도 아니고 나 좋자고 보는 것인데 굳이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가 없었다. 내가 별로라고 해도 누가 신경이나 쓰겠는가?
두 시간 정도 미술관에서 시간을 보내다가 밖으로 나왔다. 이제 숙소에 돌아가 쉬고 싶은 생각밖에 안들었다. 숙소에 도착했을 즈음 나는 완전히 기진맥진한 상태였다. 한참 늦은 체크인을 마치고 프론트에 맡겨 둔 캐리어를 찾았다. 내가 머물 방은 한층 위에 있었는데 호텔에 엘리베이터가 없어 가파른 계단을 올라가야 했다. 다행스럽게도 친절한 호텔 직원이 내 방 앞까지 캐리어를 들어다 주었다.
나홀로 유럽 여행 친구가 되어준 토끼 인형 바람이
요플레와 토마토, 모짜렐라 치즈
호텔로 오는 길, 잠깐 마트에 들러 간단히 방 안에서 먹을 것들을 샀다. 토마토 두 알과 모짜렐라 치즈, 요플레가 이 날의 저녁식사였다. 와이파이가 잘 터져서 한국 예능을 보며 저녁을 먹었다. 귓가에 들리는 한국말들이 나에게 큰 안정감을 주었다. 마치 집에 온 것처럼 편안했다. 배를 채우고 뜨거운 물로 샤워를 하고난 뒤 침대에 누웠다. 하루동안 있었던 일들을 되돌아보는데 마치 꿈을 꾼 듯 했다. 끝나지 않을 것만 같던 힘든 시간들은 지나가고 내일 또 다른 하루가 시작된다. 여행의 막바지, 난 잘할 수 있을까 걱정되면서도 지나간 고생에 마음이 홀가분해지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