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작나무 숲이 보고 싶어서 영양을 찾았다. 우리 둘 다 난생 처음 영양이라는 곳을 가보았다. 가는 길 내내 푸르른 산들이 주위를 두르고 있어서 눈이 상쾌했다. 창문을 열고 드라이브를 했는데 신선하고 맑은 공기가 가슴 속 깊이 들어왔다. 이런 푸르른 산 속에서 살게 된다면 왠지 아무런 병에 걸리지 않을 것 같았다.
죽파리 자작나무 숲 근처 주차장에 도착했다. 주차를 하고 숲을 향해 걸어가려는데 바리게이트로 입구가 막혀 있어서 느낌이 묘했다. 왠지 저 경계를 넘어 가면 다른 세계가 펼쳐지는 것은 아닐까?
자작나무 숲은 오래 전 어느 겨울날 인제에서 본 적이 있었다. 그 때는 눈이 쌓여 있던 한겨울이었다. 자작나무도 하얗고 눈도 하애서 온 세상이 그저 하앴던 기억이 난다. 여름날 자작나무 숲은 과연 어떤 모습일지 기대감을 한껏 품고 들어섰다.
몇걸음 안으로 들어서니 자작나무 숲길로 향하는 안내판이 나타났다. 자작나무 숲까지는 3.2km를 걸어가야 했다. 만만치 않은 거리를 걸어야 했지만 밥도 먹었겠다 체력적으로 든든한 상태여서 여유롭게 설렁설렁 걸어가면 되겠다 싶었다. 다만 화장실은 이곳에서 꼭 해결하고 가야 한다. 이곳을 지나치면 1시간 뒤 자작나무 숲에 거의 도착해서야 화장실이 나온다.
여름날, 산 길을 걸으며 보이는 온 세상은 푸릇푸릇했다. 멀리 보이는 산도 푸르고 나무도 푸르고 발 밑에 치이는 풀들도 푸르렀다. 길 옆으로는 계곡물이 흐르고 있었다. 이 계곡은 죽파리 마을 이름을 따서 '죽파계곡'이라 불린다고 한다. 졸졸졸 계곡물이 흐르는 소리와 새 소리, 풀벌레 소리가 뒤섞였다. 지나다니는 사람이 없으니 이 깊은 산 속에 온전히 우리 둘만 있는 것 같았다.
게다가 어느 순간부터 갑자기 핸드폰이 먹통이 되었다. 인터넷도 안되고 통화도 안되는 깊은 산 속. 우리는 오롯히 자연을 즐길 수 있었다.
길을 걷다가 우연히 다람쥐를 마주쳤다. 산 길을 걸을 때마다 다람쥐가 보고 싶어서 '다람쥐야!'라고 소리쳤었다. 그런데 한마리도 볼 수 없었고 다람쥐는 정말 운이 좋은 사람이나 보는 것인가 보다 생각했었다. 그런데 자작나무 숲까지 걸으며 우연하게 다람쥐를 3번이나 보았다. 길을 가다가 다람쥐를 발견하고 엇!-하고 소리를 질러 버렸다. 너무 신기하고 귀여워서 한참을 숨을 죽이고 다람쥐를 구경하다가 다시 걸었다.
다시 또 한참을 걸었다. 자작나무 숲으로 가는 길이 정말 맞는 것인지 우리는 여러번 고개를 갸우뚱했다. 사실 자작나무 숲까지 얼마나 걸리는지 알아보지도 않은 상태에서 무작정 걷는 중이었다. 3.2km라는 안내판을 보았지만 우리는 얼마나 걸어야 하는지 전혀 감이 없었다. 그저 금방 나오겠거니 하고 걸었다. 그렇게 계속 걸었는데 2km가 남았다는 안내판을 보고서는 엇, 이제서서야 1/3 정도 온 것이구나 싶었다.
그래도 가는 길 내내 풍경이 좋았고 평탄한 흙길이어서 힘들지는 않았다. 그저 좀 오래 걷는다는 느낌이 들었을 뿐이었다. 귀여운 다람쥐도 만나고 난생처음 보는 꼬리가 길쭉한 신기한 새도 마주쳤고 공기도 맑고 신선하니, 그저 재밌고 신이 난 상태였다.
1km가 남았다는 안내판을 보고서는 이제 정말 거의 다 왔구나 싶었다. 조금만 더 가면 자작나무 숲이 나타날 것이라 생각하니 발걸음에 힘이 붙었다. 자작나무 숲까지 천천히 구경하면서 걷다 보니 1시간 넘게 걸렸던 것 같다.
멀리 하얀 자작나무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파란 하늘 아래 하얀 나무 기둥들이 줄지어 보였다. 기다란 나무 끝은 푸릇푸릇한 잎사귀들로 가득했다. 자작나무들은 마치풍성한 초록 가발을 쓴 것 같았다.
'자작나무 숲길'이라는 안내판 속 글씨 아래 더이상 km가 표시되어 있지 않았다. 드디어 자작나무 숲에 다다른 것이다. 멀리서 보이던 자작나무들은 일부분에 불과했다. 표지판을 넘어 숲 안으로 들어서니 무지하게 넓은 자작나무 군락이 펼쳐졌다. 죽파리 자작나무 숲은 내가 예전에 갔었던 인제 원대리의 자작나무 숲보다 3배가 넓다고 한다.
자작나무 숲은 검마산 깊숙한 곳에 자리 잡고 있다. 산 꼭대기 모양이 칼을 꽂은 것처럼 보인다고 해서 검마산(劍磨山)이라 불린다. 이 검마산에 산림청이 1993년 인공적으로 자작나무 숲을 조성했다. 숲에 가득한 자작나무들이 나와 엇비슷한 나이라고 생각하니 더 친근하게 느껴졌다.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도 나무들은 꼿꼿히 이 자리를 지키고 있을 것 같았다. 먼훗날 이곳을 다시 찾게 된다면 어떤 기분이 들까? 내가 나이를 먹은 것처럼 나무들도 나이를 먹을테고, 이곳에 와 그대로인 나무들을 보면 왠지 모르게 가슴이 뭉클할 것 같다.
자작나무 숲 속 작은 오솔길을 따라 천천히 걸었다. 푸릇푸릇한 여름빛에 하얀 자작나무가 더해졌다. 금방이라도 숲속 요정이 튀어 나와 춤을 출 것 같았다. 영화 속 장면 같기도 하고 달력 속 사진 같기도 했다. 지금 내가 여기 와있다는 순간들이 꿈처럼 느껴졌다. 완전히 생경하고 너무 아름다운 풍경이어서 그랬나 보다.
자작나무에 가까이 다가가 하얀 껍질을 만져 보았다. 조심스럽게 손바닥으로 쓰다듬어 보니 아주 부드러웠고 촉촉했다. 자작나무는 하애서 언뜻 차가워 보이기도 했지만 만져보니 왠지 모르게 따뜻함이 느껴졌다. 나무의 기운이 내게 와 닿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하늘을 올려다 보니 연두빛 잎사귀들이 빽빽했다. 바람이 살랑 어디선가 불어오면 자작나무 잎사귀들이 흔들리며 잔잔한 소리를 내었다. 파르르르-. 조용히 하늘을 바라보며 그 소리를 듣고 있노라면 온 마음이 편안해졌다. 마음 속에 품고 있었던 걱정과 불안들이 스르륵 먼 하늘로 사라졌다. 숲이 사람을 치유해 준다는 말이 무슨 말인지 조금을 알 것도 같다.
언제였던가 자작나무 껍질이 천년을 간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래서 연인들이 자작나무 껍질에 영원한 사랑의 맹세를 새기곤 했다고. 경주 대릉원 천마총에 있는 '천마도'도 자작나무 껍질에 그려진 그림이다. 신라의 역사를 되돌아 보면 이 자작나무 껍질이 얼마나 오래가는지 가늠해 볼 수 있다.
자작나무 껍질이 오랫동안 변치 않는 이유는 기름기가 많아 쉬이 썩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작나무 껍질을 만질 때 왠지 모르게 부드럽게 진득한 느낌이 들었나 보다. 기름기 많은 껍질이 타면서 자작자작 소리를 내어 자작나무라 불리게 되었다는 재밌는 이야기도 있다.
돌아서는 발걸음이 참 아쉬웠다. 이 아름다운 자작나무 숲을 두고 결국에는 돌아가야 하다니 말이다. 조금만 더 일찍 이곳에 도착했더라면 아마 하루 종일 놀다 가지 않았을까? 그런데 갑자기 하늘에서 빗방울이 똑똑똑 떨어졌다. 더 지체 했다가는 거센 비를 쫄딱 맞으며 걸어가야 할 판이었다. 우리는 서둘러 자작나무 숲을 떠나기로 했다.
자작나무 숲으로 향하는 길은 둥실둥실 즐거웠는데 주차장으로 돌아가는 길은 무척 힘들었다. 아마도 너무 많이 걸을 탓일테다. 게다가 비까지 내리고 있었으니 쉬엄쉬엄 쉬었다 가기도 힘들었다. 쉼없이 계속 걸어서 주차장에 도착했다. 다리와 발바닥에서 불이 나는 것 같았다. 이 날 하루 2만보를 넘게 걸었다.
주차장으로 돌아와 차에 올라 탔다. 에어컨을 빵빵 틀고 시원한 바람을 쬐며 쉬니 천국이 따로 없었다. 자연으로 시작해 결국 문명으로 끝나는 구나 싶어서 웃음이 나왔다. 언젠가 다시 이곳을 찾게 되면 그 때는 비가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 쉬엄쉬엄 걷는다면 그리 힘들지 않았을텐데 말이다. 다시 찾을 그 날을 기약하며, 자작나무 숲 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