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싱키 대성당을 지나서 바다가 있는 곳까지 걸어왔다. 멀리 해가 뜨고 있는지 구름이 꽉 낀 하늘이 붉그스름했다. 바다의 비릿한 냄새가 코끝을 찔렀다. 보고 싶던 관람차도 이제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잔잔한 바다 위에는 고요한 반영이 떠 있었다.
우리는 바다를 옆에 두고 걸었다. 흐린 날씨 때문인지 아침 해가 떠올랐건만 세상은 그리 밝아지지 않았다. 하늘은 구름들이 짙게 깔려 있어 칙칙했다. 아침이 아닌 새벽을 걷는 기분이었다.
헬싱키 시청 앞에는 넓은 광장이 하나 있는데 이곳에서 열리는 노천 벼룩 시장을 카우파토리(Kauppatori)라고 부른다. 핀란드어로 '광장(Kauppa)'과 '시장(tori)'이 합쳐진 말이다. 우리가 도착했을 때는 이른 아침이라 그런지 이제 막 천막들이 세워지고 있는 중이었다. 노천 시장은 잠시 후에 다시 와보기로 하고 먼저 실내 시장을 구경하러 발걸음을 옮겼다.
우리는 카우파토리 근처에 있는 기차역 같이 생긴 붉은 벽돌 건물을 찾아갔다. 이곳은 1889년에 문을 연 헬싱키 최초의 실내시장 반하 카우파할리(Vanha Kauppahalli)다. 커다란 나무 문을 열고서 안으로 들어가니 새로운 세상이 펼쳐졌다. 우리는 쭉 이어진 기다란 복도를 따라 걸었다.
안으로 들어서니 일단 따뜻해서 너무 좋았다. 북유럽의 겨울은 듣던대로 정말 춥긴 춥구나, 여행을 하며 더 절실하게 느꼈다. 시장 안의 많은 가게들은 이제 막 오픈 중이었다. 몇몇 문을 연 가게들을 돌아보며 다양한 물건들을 구경했다. 사슴고기로 만든 소시지에서 부터 말린 베리들과 다양한 차, 치즈, 이름 모를 생선들까지. 신기한 것들이 아주 많았다.
길게 늘어진 복도를 따라서 가게들을 구경 하다가 'Story'라는 카페에 들어섰다. 카페 창밖으로 헬싱키 스카이휠과 바다가 보였다. 우리는 추위를 녹이며 이곳에서 잠시 쉬어 가기로 했다. 따뜻한 커피와 핫 토디, 맛있는 빵을 주문하고 창가에 자리 잡고 앉았다.
따뜻한 음료를 한모금 넘기니 몸이 녹아 내리는 것 같았다. 두툼한 니트와 패딩 그리고 목도리와 모자까지 챙겨입고 다녔던터라 걸어 다니는 내내 온 몸이 무거웠다. 두꺼운 외투를 벗어 던지니 몸이 날아갈 듯이 가벼웠다.
카페에서 잠깐 시간을 보내고 난 뒤에 다시 시장을 돌아 보았다. 이제 많은 가게들이 문을 연 상태였다. 시장을 몇바퀴 돌아 보다가 말린 과일들과 블랜딩 티 여럿을 구입했다. 말린 과일들은 여행 중 맛있게 다 먹어 치웠고, 블랜딩 티들은 아직까지도 틈틈히 잘 마시고 있다. 향긋한 차를 마실 때마다 핀란드에서의 기억들이 떠올라서 좋다.
실내 시장을 나와서 잠시 노천 시장을 구경했다. 이제야 많은 가게들이 손님 맞이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이곳저곳을 다니면서 마그넷, 비누, 식료품 등 다양한 물건들을 구경했다. 제일 탐났던 것은 아주 보드러운 동물털로 만든 하얀 모자였다. 몇번을 쓰다 벗다를 반복하다가 결국 사지는 못했지만 아직까지도 눈에 아른거린다.
노천 시장을 구경하다가 헬싱키 시내 여기저기를 돌아다녔다. 서점, 옷가게, 전등가게 등등 여러 곳들을 한참 돌아 보다가 다시 반하 카우파할리로 돌아왔다. 어디서 점심식사를 할까 고민하다가 아침에 시장 구경을 할 때 잠깐 스쳐 지나갔던 수프 전문점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몸이 으슬으슬 추워져서 뜨끈한 스프를 먹으면 몸도 따뜻해지고 든든할 것 같았다.
우리는 반하 카우파할리 안 자리 잡고 있는 '스오파케티오(Soppakeittiö)'라는 식당을 찾아왔다. 이른 아침에 시장 구경을 하며 이곳을 잠시 스쳐 지나갔을 때는 아직 오픈 전이라서 그런지 한산했었다. 점심시간 무렵에 다시 찾은 식당은 수프를 먹으러 온 사람들로 정신없이 북적였다.
앉을 자리가 없어 몇분간 식당 밖에 서서 기다린 뒤에야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사람이 왜 이리도 많은가 싶어 구글 평점을 찾아 보았더니, 오호라 이곳은 평점도 좋고 꽤나 유명한 식당이었다. 이날은 3가지 종류의 수프를 팔고 있었는데 우리는 연어 수프와 머쉬룸 수프를 하나씩 주문했다.
자리마다 빵이 담긴 바구니가 놓여 있어 구수한 빵을 뜯어 먹으며 수프가 나오기를 기다렸다. 드디어 수프가 나오고 우리는 행복한 점심식사를 시작했다. 연어 수프는 고소한 크림과 연어 향이 느껴지는 부드러운 맛이었다. 간간히 씹히는 포슬한 감자의 식감이 좋았다. 머쉬룸 수프는 진한 버섯향이 감도는, 연어 수프보단 좀 더 가벼운 느낌의 수프였다.
정말 맛있게 먹었지만 양이 많아서 다 먹지를 못했다. 기다리는 손님들이 많아서 여유롭게 먹고갈 수 없어 수프를 남겨둔 채 식당을 떠났다. 수프로 따뜻해진 몸을 이끌고 이제 또 어디를 가볼까나, 우리는 헬싱키 거리로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