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로움은 사라지지 않고, 가끔 조금 늦게 도착할 뿐이다
오랜만의 새벽 통화
나이를 먹는다는 건 대체로 조용해지는 일이다.
정확히는, 쉽게 전화를 걸지 못하게 되는 일이다.
특히 밤에는 더 그렇다.
젊을 때의 밤은 느슨했다.
시간은 남아돌았고, 외로움조차 아직은 견딜 만한 장식처럼 보였다. 심심하면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고, 누군가는 그걸 받아주었다.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잠이 오지 않아서. 문득 생각나서. 딱히 할 말은 없지만 그냥 목소리가 듣고 싶어서. 그렇게 몇 시간을 흘려보내다가 어느 한쪽이 먼저 잠들곤 했다. 말이 끊겨도 통화는 끝나지 않았고, 숨소리만 남은 채 새벽이 천천히 흘러갔다.
그때는 그런 시간이 귀한 줄 몰랐다.
대부분의 귀한 것들이 그렇듯, 사라지고 나서야 값이 생긴다.
지금의 밤은 다르다.
더 마르고, 더 정확하고, 더 외롭다.
불이 꺼진 방, 잠들지 못하는 몸, 쉽게 누르지 못하는 몇 개의 이름. 외로움은 대단한 사건이 아니라 그런 식으로 형태를 갖는다.
깊은 밤에 누군가와 오래 통화한다는 건 이제 드문 일이 되었다.
그건 시간이 남는다는 뜻이 아니다. 자기 몫의 피로를 잠시 옆으로 밀어 두고, 다른 사람의 어둠을 조금 들어주겠다는 뜻에 더 가깝다.
어제 새벽, 오랜만에 그런 전화가 왔다.
처음에는 별것 아닌 이야기였다.
안부를 묻고, 잠이 안 온다는 말을 주고받고, 그렇게 대화가 시작됐다. 그런데 통화는 생각보다 길어졌다. 사진 이야기부터 흘러나왔다. 요즘도 사진을 찍는지, 후보정은 얼마나 하는지, 왜 어떤 사진은 지나치게 매끈하면 숨이 막히는지, 왜 노이즈가 낀 화면은 때로 더 정직해 보이는지. 오래된 디지털카메라가 남기는 거친 입자 같은 것들. 세상에는 그런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줄 사람이 많지 않다. 그래서 그런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조금 안심하게 된다. 취향은 이해받을 때보다, 설명될 수 있을 때 더 오래 살아남는다.
사진 이야기는 곧 글 이야기로 넘어갔다.
나는 요즘 사진보다 글이 더 재밌다고 말했다. 예전에는 셔터 뒤에 숨었다면, 지금은 문장 속으로 들어간다고. 블로그에 글을 올리고, 브런치에 글을 쓰고, 강릉을 배경으로 한 소설과 에세이를 붙잡고 있는 시간이 오히려 나를 덜 망가지게 만든다고. 감정은 사라지지 않는다. 다만 장소를 옮길 뿐이다. 한때는 사진 속에 있었고, 지금은 문장 속에 있다. 어쩌면 나는 그저 조금 다른 곳에 나를 숨기고 있을 뿐인지도 모른다.
친구도 비슷한 말을 했다.
사진을 찍기 시작한 뒤부터 자기 삶을 바깥에서 보게 되었다고. 그전에는 그냥 하루를 통과하는 쪽에 가까웠는데, 이제는 아주 잠깐이라도 자기 자신을 프레임 밖에서 바라보게 된다고. 그 말이 오래 남았다. 사람은 자기 삶 안에 너무 오래 머물면, 결국 자신을 가구처럼 취급하게 된다. 늘 거기 있는 것. 너무 익숙해서 보이지 않는 것. 사진이나 글이 하는 일은 어쩌면 그 익숙함에 작은 금을 내는 일인지도 모른다.
대화는 조금 더 아래쪽으로 내려갔다.
가족 이야기. 오래된 상처. 겉으로는 잘 보이지 않는 삶의 무게.
사람은 누구나 말하지 않고 들고 사는 것들이 있다. 가까운 사람이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다. 오히려 가까울수록 더 늦게 알게 되는 종류의 어둠이 있다. 늘 괜찮아 보이던 얼굴 뒤에도 쉽게 열리지 않는 방이 하나쯤은 있고, 잘 버티는 사람의 목소리 안에도 오래 가라앉아 있던 것이 있다.
사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나는 친구라는 말에 꽤 지쳐 있었다.
십수 년을 알고 지낸 소중한 친구와 크게 다퉜다. 오래된 관계였다. 그래서 더 깊게 금이 갔다. 낯선 사람과의 충돌은 겉면만 긁고 지나가지만, 오래된 친구와의 균열은 안쪽까지 파고든다. 시간은 관계를 단단하게 만들기도 하지만, 동시에 더 쉽게 깨지게 만들기도 한다. 오래 알았다는 사실은 이해의 증거가 아니라 기대의 총량일 때가 많다. 기대는 오래될수록 무거워지고, 무거워진 기대는 자주 흉기가 된다.
그 일을 지나오면서 나는 친구라는 관계가 생각보다 훨씬 까다롭다는 걸 다시 배웠다.
어릴 때는 친구를 단순하게 생각했다. 아무 때나 연락할 수 있고, 아무 때나 불러낼 수 있고, 별말 없이도 같이 시간을 죽일 수 있으면 그걸로 충분하다고 믿었다. 하지만 지금은 안다. 친구는 그렇게 단순한 구조가 아니다. 존중이 필요하고, 침묵을 견디는 시간도 필요하고, 상대가 내 기대대로 움직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체념도 필요하다. 때로는 상처를 입을 각오도 있어야 한다. 그러니까 친구는 편안한 사람이 아니라, 불편해질 가능성까지 포함해서 곁에 둘 수 있는 사람에 가깝다.
무엇보다 친구는 미묘하다.
가까운 사이라는 이유만으로 선이 흐려지기 쉽다. 기대는 쉽게 커지고, 서운함은 이유 없이 부풀어 오른다. 어느 순간부터는 위로를 구하는 일이 너무 자연스러워져서, 나도 모르게 상대를 감정의 대피소처럼 여기게 된다. 더 나쁘게는 감정의 쓰레기통처럼 오해하게 될 수도 있다. 내가 처리하지 못한 불안과 피로와 울분을 친하다는 이유로 자꾸 그 사람 쪽으로 밀어 넣는 것이다. 친하니까 괜찮겠지. 오래 봤으니까 받아주겠지. 이 정도는 이해하겠지. 관계를 망치는 건 대개 그런 종류의 방심이다. 악의가 아니라 익숙함. 무례가 아니라 안일함.
돌이켜보면 나 역시 그 선을 잘 지키지 못했던 적이 있다.
어쩌면 지키지 못한 정도가 아니라, 이미 넘어버린 적도 있었을 것이다. 너무 오래 봤다는 이유로, 너무 편하다는 이유로, 설명하지 않아도 된다고 믿었다. 하지만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관계라는 건 없다. 말하지 않아도 알아주길 바라는 순간, 관계는 천천히 무너진다.
친구는 내 마음을 대신 처리해 주는 사람이 아니고, 내 어둠을 무제한으로 받아내는 존재도 아니다.
사람은 늘 그런 단순한 사실을 늦게 배운다.
그래서 한동안은 차라리 혼자가 되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다.
누군가에게 기대하지 않으면 실망도 없고, 가까워지지 않으면 다칠 일도 줄어든다고 믿었다. 실제로 어느 정도는 맞다. 사람을 덜 들이면 마음이 덜 시끄럽다. 하지만 덜 시끄럽다는 것이 반드시 평온을 뜻하지는 않는다. 어떤 고요는 안정이 아니라 공백에 더 가깝다. 사람이 빠져나간 자리에 남는 것은 평화가 아니라, 약간 식어버린 공기 같은 것일 때가 많다.
우리는 그렇게 조금씩 외롭게 나이를 먹는다.
아주 큰 사건이 없더라도.
누가 누구를 완전히 배신하지 않더라도.
그냥 관계를 감당할 힘이 예전 같지 않아서. 누군가를 이해하는 데 필요한 에너지, 서운함을 삼키는 힘, 먼저 손을 내미는 용기, 선을 넘지 않으려는 자제 같은 것들이 해마다 조금씩 닳아 없어지기 때문이다. 나이가 들수록 사람 곁에서 사람이 줄어드는 건 어쩌면 그래서 자연스럽다. 인간관계에 실패해서가 아니라, 예전만큼 무모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에.
나도 몇 가지 이야기를 했다.
부모님에 대한 미안함. 더 철없던 시절의 나.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겨우 이해하게 되는 것들. 지나간 연애 이야기 역시 조금 꺼냈다. 많이 좋아했던 사람들, 오래 붙잡았던 마음, 갑자기 끝나버린 관계들. 그때는 사랑이라고 믿었지만, 지나고 나니 사랑이라기보다 손상에 가까웠던 기억들. 어떤 관계는 끝난 뒤에야 진짜 이름을 드러낸다. 사랑의 얼굴로 들어와 파손의 형태로 남는 것들. 그런 말들은 대낮에는 잘 나오지 않는다. 새벽은 진실을 말하기 좋은 시간이 아니라, 거짓말을 덜 하게 되는 시간에 가깝다.
그러다 어느 순간 친구의 목소리가 느려졌다.
말과 말 사이가 길어졌고, 문장은 조금씩 풀어졌고, 마침내 친구는 잠이 들었다. 휴대폰 너머로 작고 고른 숨소리만 남았다. 나는 그 숨소리를 한동안 듣고 있었다. 그리고 문득, 오래전 어느 밤이 떠올랐다. 한참 연애를 하던 시절, 밤새 통화하다 먼저 잠든 여자친구의 숨소리를 가만히 듣고 있던 어떤 시간.
그건 감정의 재현이라기보다 장면의 재방문에 가까웠다.
어젯밤의 그 친구에게서 그런 마음을 느꼈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사람은 가끔 현재의 소리 위에 과거의 시간을 얇게 포갠다. 비슷해서가 아니라, 밤이라는 것이 원래 그런 식으로 기억을 불러내기 때문이다. 숨소리는 이상할 정도로 오래된 감정을 건드리는 데 능숙하다. 덕분에 나도 잠시 옛 시간 쪽으로 미끄러졌다가, 다시 돌아올 수 있었다.
무엇보다 좋았던 건 그 친구의 안쪽을 조금 더 알게 되었다는 점이다.
우리는 가까운 사람을 안다고 쉽게 착각한다. 하지만 안다는 건 대개 표면에 대한 익숙함일 뿐이다. 진짜 안쪽은 늦은 시간, 느슨해진 목소리, 길어진 침묵 같은 데서 겨우 모습을 드러낸다. 늘 괜찮아 보이는 사람에게도 쉽게 말하지 못하는 밤은 있고, 다 지나간 얼굴로 살아가는 사람에게도 아직 끝나지 않은 계절은 남아 있다.
생각해 보면 친구란 참 이상한 관계다.
가족도 아니고, 연인도 아니고, 그렇다고 완전히 남도 아니다. 피는 섞이지 않았지만 상처는 깊게 남길 수 있고, 법적인 책임은 없지만 감정의 잔금은 오래 남는다. 너무 가벼우면 흩어지고, 너무 무거우면 질식한다. 그 애매한 거리를 오래 유지하는 일은 생각보다 어렵다. 친구는 늘 좋은 것만 주는 존재가 아니다. 위로를 주기도 하지만 피로를 남기기도 하고, 온기를 주기도 하지만 금을 만들기도 한다. 그래서 더 조심해야 한다. 가까울수록 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관계를 완전히 포기하지 못하는 건, 아주 드물게 이런 밤이 오기 때문이다.
사진 이야기와 글 이야기, 가족과 지나간 사랑, 부모님에 대한 미안함, 평소에는 잘 꺼내지 않던 마음들. 그런 것들이 새벽의 어두운 공기 안에서 천천히 떠다녔다. 우리는 서로를 구한 것도 아니고, 어떤 결론에 도달한 것도 아니었다. 다만 각자의 외로움을 오래 들고 살던 두 사람이 잠시 같은 어둠 속에 연결되어 있었다. 친구는 먼저 잠들었고, 나는 조금 덜 고립되었다. 그 정도면 어떤 밤은 충분하다.
삶은 어쩌면 이런 식으로 버티는 것인지도 모른다. 완전히 구원받지 못한 채, 그렇다고 완전히 무너지지도 않은 채, 아주 가끔 걸려오는 한 통의 전화 덕분에 오늘 밤만큼은 조금 늦게 가라앉는 방식으로. 사람은 결국 거창한 구원보다도 이런 사소하고 불완전한 연결들로 하루를 넘기는 존재인지도 모른다. 누군가의 목소리, 길게 이어진 침묵, 먼저 잠들어버린 숨소리 같은 것들. 그런 하찮고도 정확한 순간들이 이상하게 사람을 다시 오늘 쪽에 붙들어 놓는다.
생각해 보면 친구란 참 묘한 관계다. 가족도 아니고, 연인도 아니고, 그렇다고 완전히 남도 아니다. 쉽게 기대할 수도 없고, 함부로 버릴 수도 없다. 가까워질수록 선은 흐려지고, 오래될수록 말하지 않은 기대는 늘어난다. 위로가 되는 순간도 있지만, 피로가 되는 순간도 있고, 온기를 남기기도 하지만 금을 내기도 한다. 그래서 친구는 늘 조심스러운 존재다. 너무 멀어도 잃고, 너무 가까워도 상한다. 그 어중간하고 위태로운 거리를 지키면서 오래 남는다는 건 생각보다 더 많은 이해와 자제, 그리고 때로는 상대의 침묵까지 받아들이는 체온을 필요로 한다.
그래도 결국 사람은 그런 관계를 완전히 포기하지 못한다. 상처를 주고받았다는 사실보다, 아주 드물게 마음의 결을 알아보는 순간이 더 오래 남기 때문이다. 어제 새벽의 통화도 아마 그랬다. 우리는 서로를 구한 것이 아니고, 어떤 답을 찾은 것도 아니었다. 다만 각자의 어둠을 잠시 옆에 내려놓았고, 그 사이를 지나가는 몇 마디 말과 몇 번의 침묵 덕분에 나는 조금 덜 혼자였고, 그 친구도 아마 잠들기 전까지는 조금 덜 외로웠을 것이다. 어떤 밤은 그 정도로 충분하다. 아니, 어쩌면 삶의 대부분은 원래 그 정도로만 겨우 견뎌지는 것인지도 모른다.
친구란, 내 외로움이 완전히 무너지기 전에 잠깐 그 모양을 알아봐 주는 사람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