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담한 생일

케이크의 단면을 바라보며

by 레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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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일은 어느 순간부터 축하받는 날이 아니라 조용히 지나가는 날짜가 되었다.


생일이라는 말이 더 이상 특별하게 들리지 않은 지도 오래됐다. 예전에는 이유 없이 들떴고, 누군가의 연락 한 통에도 마음이 움직이던 시절이 있었다. 지금은 다르다. 달력에 표시된 날짜 하나가 돌아왔다는 사실 정도만 조용히 인식할 뿐이다.


내 생일은 삼일절이다. 공휴일이다. 많은 사람들에게는 나라의 기념일이지만 내게는 그저 생일일 뿐이다. 그래서인지 어릴 때부터 생일이 조금 이상하게 느껴졌다. 누군가는 생일이 지나가도 아무도 몰랐다고 말하지만, 나는 그럴 수가 없었다. 날짜가 너무 또렷했기 때문이다. 삼일절이라는 이름 덕분에 내 생일은 잊히지 않는다. 오히려 그래서 더 조용하다.


부모님은 가끔 이런 이야기를 했다. 일부러 삼일절에 맞춰 나를 태어나게 했다고. 휴일이면 친구들이랑 잘 놀 수 있을 것 같아서 그랬다고. 어릴 때는 그 말을 조금 믿기도 했다.


하지만 어린 시절의 삼일절은 내 생일이라기보다 휴일에 가까웠다. 친구들은 각자 가족들과 어디론가 놀러 갔다. 공휴일이면 집에만 있기 아쉬워 여행을 가거나 나들이를 가는 집들이 많았다. 그래서 삼일절이 되면 동네가 조금 조용해졌다.


그날은 내 생일이었지만 정작 함께 놀 친구는 잘 없었다.


친구들과 케이크를 나누거나 생일을 축하받는 날이 아니라, 그냥 휴일 사이에 끼어 있는 하루처럼 지나가곤 했다. 그래서 생일이라는 날은 특별한 날이라기보다 조금 조용하고 조금 외로운 시간으로 남아 있다.


1980년 3월 1일에 태어난 사람이 또 한 번 같은 날짜를 지나간다. 나이를 먹는다는 건 거창한 변화가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 같은 하루를 받아들이는 방식이 조금씩 달라지는 일에 가깝다. 예전에는 생일이 기다려지는 날이었고 지금은 그저 지나가는 하루 중 하나가 되었다. 특별한 계획이 없어도 괜찮고 축하가 많지 않아도 마음이 크게 흔들리지 않는다. 평범하게 하루가 지나간다는 사실이 오히려 안심이 된다.


그래서인지 부모님이 준비한 케이크는 조금 예상 밖이었다. 동네 제과점의 생크림 케이크. 익숙하고 안전한 선택. 아마 가장 무난하고 실패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셨을 것이다. 그 마음이 고맙다는 걸 알면서도 이상하게 설명하기 힘든 감정이 남는다. 나이를 이렇게 먹었어도 여전히 누군가에게는 챙겨야 하는 존재라는 사실 때문이다.



사람은 결국 누군가의 시간 속에서

생각보다 오래 아이로 남아 있는 존재다.



요즘은 부모님을 바라볼 때마다 시간이 조금 다르게 보인다. 예전에는 변하지 않을 것 같던 사람들이 조금씩 늙어가고 있다는 사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걸음이 예전보다 조금 느려지고, 병원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대화 속에 섞이고, 건강에 대한 말들이 가볍게 오간다. 그런 순간들을 마주할 때마다 마음 한쪽이 조용해진다. 시간은 나만 늙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점점 실감하게 된다.


초를 불고 축하한다는 말을 듣고 작은 소란은 금방 끝났다. 늘 그렇듯 따뜻한 순간은 오래 머물지 않는다. 케이크를 두 조각 잘라 접시에 옮겨 놓고 나서야 시선이 멈췄다. 남은 케이크의 단면이 눈에 들어왔다. 겉은 말끔하게 꾸며져 있었고 안쪽은 생각보다 거칠었다.


그 모습이 낯설지 않았다. 지금의 나도 그렇게 살아 있는 것 같았다. 겉으로는 무난하게 정리되어 있지만 안쪽에는 잘려나간 시간들이 층처럼 남아 있다. 후회였거나 애써 잊은 기억이었거나 돌아보지 않으려 지나쳐 온 시간들.


삶은 조금씩 시간을 잘라내며

지금의 모양이 된다.


요즘 들어 몸이 먼저 시간을 말해준다. 예전에는 밤을 새워 코드를 고치고 화면을 붙잡고 있어도 다음 날 아무렇지 않았다. 새로운 기술이 나오면 밤새 찾아보고 디자인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몇 번이고 다시 만들었다. 그렇게 조금씩 앞으로 가고 있다고 믿었던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속도가 달라졌다는 걸 느낀다. 세상은 계속 빨라지고 기술은 끝없이 새로워지는데 나는 예전보다 조금 더 천천히 따라가고 있다. 어제까지 익숙했던 방식이 금방 낡은 것이 되고 트렌드는 생각보다 빠르게 지나간다.


나이를 먹는 개발자와 디자이너라는 건

시간의 속도를 따라가는 일이 조금 버거워지는 순간을 배우는 일이다.


그래서인지 요즘은 다른 곳에서 숨을 고른다. 사진을 찍고 글을 쓴다. 아무 의미 없어 보이는 장면들을 괜히 오래 바라본다. 세상이 요구하는 속도에서 잠깐 떨어져 나와 있는 느낌이다. 잘 따라가지 못해서라기보다 잠깐 멈춰 서 있는 사람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나는 여전히

시간을 조금 천천히 살아가고 싶은 사람이다.


그리고 가끔 생각한다. 앞으로의 시간은 얼마나 남아 있을까. 부모님은 언제까지 이렇게 곁에 계실까. 내가 키우는 가을이와 봄이는 나보다 먼저 늙어갈 것이다. 그 시간을 나는 잘 견딜 수 있을까. 생일이 되면 축하보다 이런 생각들이 먼저 떠오른다. 앞으로의 일보다 언젠가 사라질 것들에 대한 생각이다.


하지만 삶의 순서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정해져 있지 않다. 우리는 부모를 먼저 보내고 함께 사는 존재들을 먼저 떠나보낸다고 막연히 생각하며 산다. 그러나 시간은 그런 약속을 하지 않는다.


어쩌면 내가 먼저 사라질 수도 있다.



누군가는 떠나고 누군가는 남는다.

하지만 그 순서는 아무도 알지 못한다.



사람은 결국 남겨질 것보다

지나가 버릴 시간들을 더 많이 안고 살아간다.


오늘도 결국 지나갈 것이다. 지금의 감정도 시간이 지나면 흐릿해질 것이다. 그런데도 어떤 장면은 이상하게 오래 남는다. 엄마아빠와 나눠 먹은 케이크, 잠시 조용해진 방 안, 잘린 단면을 바라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던 나. 인생은 거창한 사건보다 이런 찰나의 순간들로 이루어져 있다는 걸 점점 더 자주 생각하게 된다.


그래서 오늘은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한 날이라기보다 나 자신에게 잠깐 말을 거는 날에 가깝다. 잘 살아왔는지 앞으로 어디까지 갈 수 있을지 여전히 알 수는 없다. 다만 여기까지 왔다는 사실만은 분명하다.


인생은 결국

잠깐 머물렀던 순간들이 남긴 조용한 흔적이다.


우리는 그 사이에서

잠시 시간을 지나가고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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