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원의 현실

전쟁은 뉴스가 되고 뉴스는 숫자가 된다

by 레노

이 글의 원래 제목은 ‘1925원의 현실’이었다.

하지만 현실이라는 것은, 생각보다 빨리 지나가 버린다.


일주일 전, 브런치 작가 응모를 준비하며 늦은 밤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막상 글을 시작하려 하니 무엇부터 써야 할지 떠오르지 않아 휴대폰 속 사진들을 무심히 넘겨보고 있었다. 사진이라고 해봐야 대부분 특별한 장면은 아니었다. 길을 걷다 찍어 둔 하늘, 식당의 메뉴판, 어딘가로 보내지지 않은 풍경 같은 것들. 그런 사소한 기록들이 화면 위를 지나가다가 어느 순간 한 장의 사진에서 손가락이 멈췄다.


며칠 전 주유소에서 찍어 두었던 사진이었다.


어두운 밤이었다. 도시의 대부분의 불빛이 이미 잠든 시간에 주유소만이 홀로 환하게 켜져 있었고, 주변은 거의 검은색에 가까운 어둠으로 가라앉아 있었다. 그 가운데에서 주유소의 형광빛은 유난히 또렷하게 떠올라 있었다. 따뜻하다기보다는 차갑고, 편안하다기보다는 거칠게 느껴지는 빛이었다.


그 빛 아래에서 가장 또렷하게 보이는 것은 풍경도 사람이 아니라 숫자였다.

전광판 위에 떠 있던 가격.

1925원.


그 숫자를 바라보다가 나는 그날 밤 글을 쓰기 시작했다. 특별한 상징을 발견했다기보다는 그 숫자가 묘하게 현실적인 느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감정을 크게 흔드는 숫자는 아니었지만 이상하게도 지금이라는 시간을 설명하기에는 충분히 건조한 숫자처럼 보였다.


그래서 나는 그 글의 제목을 **‘1925원의 현실’**이라고 붙였다.


사실 그날 밤의 장면은 아주 평범했다.

나는 별생각 없이 차를 세우고 주유기를 들었다. 손에 익은 동작이었다. 그리고 습관처럼 가격부터 봤다.


1925원.


숫자가 눈에 들어오는 순간 며칠 전부터 뉴스에서 떠들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중동 어딘가에서 전쟁이 시작됐다고 했다. 긴장이 높아졌다고 했고 상황이 심각해질 수 있다고도 했다. 화면 속에서는 꽤 무겁게 들리는 이야기였지만 이상하게도 오래 남지는 않았다.

대신 이렇게 남았다.


1925원.


생각해 보면 세상은 늘 이런 식이다.


누군가의 절박한 현실은 생각보다 조용하게 흘러와서 다른 누군가의 일상 속 숫자가 된다.


어디선가 총성이 울리면 다른 어디에서는 기름값이 오른다. 누군가는 오늘을 끝까지 살아내기 위해 몸을 낮추고 있고, 누군가는 그 결과를 주유기 화면에서 확인한다.


세상은 분명 연결되어 있다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잘 닿지 않는다.

적어도 체감은 그렇다.


나는 그 사실을 알고 있다. 적어도 머리로는 알고 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어딘가에서는 누군가가 살아남기 위해 밤을 버티고 있을 것이다. 집을 떠나야 했을 수도 있고 누군가의 이름을 마지막으로 부르고 있을 수도 있다. 그런 장면들은 분명 뉴스 화면 속에 존재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장면들은 금방 멀어진다.


사람은 생각보다 빨리 현실로 돌아온다.


현실이라는 것은 대체로 단순하다. 숫자 몇 개, 카드 한 장, 그리고 영수증. 나는 주유기를 꽂은 채로 잠깐 멍하니 서 있었다. 그 사이에도 기름은 계속 들어갔다. 금액은 조금씩 올라갔고 리터 숫자도 따라 올라갔다.

모든 것이 아주 정상적인 속도로 흘러갔다. 그게 묘하게 이상했다.


세상 어딘가에서는 분명 무언가가 무너지고 있는데 여기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처럼 모든 것이 평온했다. 아니, 평온하다기보다는 무심하다는 쪽이 더 정확할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우리는 이미 이런 방식에 익숙해진 것일지도 모른다.


큰 일들은 항상 멀리서 일어나고 우리는 그 결과만 조금씩 나눠 갖는다.


전쟁은 뉴스가 되고 뉴스는 숫자가 되고 숫자는 결제 금액이 된다.


그렇게 생각하면 세상은 꽤 효율적으로 돌아간다.

감정이 끼어들 틈이 별로 없다.

잠깐 생각은 한다.


“참 이상한 세상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생각은 거기서 멈춘다. 더 오래 붙잡고 있으면 조금 피곤해지기 때문이다.


주유가 끝났다는 소리가 났다. 나는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주유기를 빼서 제자리에 걸었다. 카드로 결제를 하고 영수증을 받았다. 영수증 위에도 숫자가 있었다.

결국 세상은 이런 식으로 정리된다.


거대한 일들도 결국은 작고 정확한 숫자로 남는다.


차에 올라 시동을 걸었다. 엔진이 조용히 깨어났고 불빛이 유리 위를 미끄러졌다. 백미러 속에서 주유소의 밝은 조명이 점점 멀어졌다. 방금 전까지 현실 같던 장면이 금방 배경이 된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숫자를 보며 세상을 잠깐 생각했는데 그 생각도 금방 흐려진다.

결국 대부분의 일들은 그렇게 끝난다.


누군가는 전쟁 속에서 하루를 버티고 있고, 누군가는 그 전쟁을 뉴스로 보고 있으며, 그리고 나는 기름을 넣고 차를 몰아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집으로 돌아간다.


그날 밤 썼던 글은 완성되지 않은 채 브런치 작가의 서랍 속에 들어갔다.

그리고 일주일이 지났다.


오늘 다시 그 글을 꺼내 읽어 보다가 문득 알게 되었다. 그날 밤 내가 현실이라고 붙여 두었던 숫자가 이미 지나간 숫자가 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1925원이었던 기름값은 어느 순간 2025원이 되어 있었다.

나는 그 숫자가 바뀌는 장면을 본 적이 없다.


세상은 늘 그렇게 변한다. 우리는 대부분 그 순간을 보지 못하고, 조금 늦게 그것을 발견한다.

그래서 가끔은 과거의 현실을 제목으로 붙여 두었던 글을 다시 읽게 된다. 그 글 속에는 이미 지나가 버린 시간이 여전히 남아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래서 사람들은 글을 쓰는지도 모른다. 세상이 너무 빠르게 변하기 때문에, 적어도 한 번쯤은 그 순간을 붙잡아 두기 위해서.


1925원이라는 숫자는 이미 지나갔다.

하지만 그 숫자를 바라보던 밤의 공기와, 그 순간 잠깐 멈춰 서서 세상을 생각하던 마음만은 아직 이 글 안 어딘가에 남아 있다.


세상이 아무 일 없다는 듯 계속 흘러가더라도

우리가 잠깐 멈춰 서 있었던 어떤 밤은 오래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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