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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한글 Jun 21. 2020

김치볶음밥을 먹고 자란 시간

우리의 시간은 그렇게 마음과 마음으로 연결된다

첫 자취 때 만든 김치볶음밥. 계란을 얹었더니 어색했다.


해도 완전히 뜨지 않은 푸르스름한 새벽녘, 나는 잠결에도 부엌에서 바삐 움직이는 엄마를 느낄 수 있었다. 칼과 도마가 부딪힌다, 무언가를 썬다, 기름이 둘러진 프라이팬에 넣는다, 촤르르륵 기름과 만나 볶아지기 시작한다, 그러고 나면 곧이어 코를 간질이는 시큼 새콤하면서도 고소한 냄새가 기분 좋게 퍼졌다. 아귀가 맞지 않는 문을 이리저리 삐거덕거리며 맞추고 열쇠로 잠그는 소리를 끝으로 엄마의 움직임이 더는 느껴지지 않으면, 나는 집안 가득 퍼진 맛있는 냄새에 취해 다시 잠이 들곤 했다. 중천에 뜬 해의 강한 빛에 못 이겨 눈을 뜨면 가장 먼저 홀린 듯 부엌으로 뛰어가 덮여있는 신문지를 들춰보았다. 맛있는 꿈이었으면 어떡하나 하는 걱정을 날려버리듯 산처럼(정말 그랬다) 쌓인 기름기가 좔좔 흐르는 김치볶음밥이 ‘역시나’ 내 눈앞에 있었다.


소분을 잘해야 했다. 주말에는 세 끼를 잘 나눠 해결해야 하므로 나중에 모자라면 안 됐다. 밤늦게 부모님이 돌아오실 때까지 나는 김치볶음밥을 소중히 나눠 먹었다. 산은 어느새 봉우리가 없어지고, 평평한 언덕이 되었다가, 이내 사라졌다, 내 뱃속으로. 산 하나를 다 먹었을 때쯤 되면 부모님은 집으로 돌아왔다, 언제나처럼.


어릴 때부터 가족이 모두 둘러앉아 금방 만든 따뜻한 밥과 반찬을 함께 먹었던 기억이 거의 없다. 함께 밥 먹는 시간은 곧 ‘안락함’을 뜻했다. 경제적으로 힘들었던 우리 가족은 이사를 자주 다녔고, 떨어져 있는 때가 많았던 아빠는 우리의 밥상에서 그 자리가 늘 비어 있었다. 보다 못한 외할머니께서 우리 가족의 정착을 도와주셨다. 몇십 년간, 그 힘들다는 뱃일을 해서 악착같이 모은 돈으로 할머니는 우리 집을 마련해주셨다. 초등학생이었던 나는 그게 뭐 어떻다는 건지, 얼마나 큰 의미인지 잘 몰랐다. 어쩌면 할머니가 살아온 시간 모두를 우리에게 내어준 것이나 다름없었지만, 그때의 나는 그런 집보다는 그 집에서 먹는 김치볶음밥이 더 좋았다. 할머니의 김치로 만든 김치볶음밥. 집안에서 유일하게 풍족했던 것, 우리 집엔 김치가 마를 날이 없었다.


여전히 둘러앉아 밥을 같이 먹지는 못했어도, 부모님은 주거가 안정되고서 더 일에 집중할 수 있었다. 아주 일찍 나가, 아주 늦게 들어오셨다. 할머니가 주신 김치는 푹 익을 새도 없이 볶아졌다. 엄마는 김치가 안 익었다며 볶음밥 대신 다른 메뉴를 고민하곤 했는데, 나는 그때마다 안 익은 김치라도 좋으니 김치볶음밥을 해달라고 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김치볶음밥은 식어도 맛있었으니까. 전자레인지에 살짝 데우기만 하면 완벽했다. 눅눅한 밥은 그냥 두면 초라해 보이지만, 볶으면 그만한 밥이 없었다. 뭐든 괜찮아질 수 있다는 생각이 들 만큼. 기름에 잘 볶아진 김치는 푹 익지 않은 김치여서 새콤한 맛은 질리지 않았고, 사각사각 씹히는 느낌이 유독 좋았다. 화룡점정으로 할머니가 손수 만든 참기름을 두르면, 어디에도 없을 김치볶음밥이 완성되었다.


일 나간 엄마를 대신해 나를 맞이해주는 엄마표 김치볶음밥을 한 끼 먹을 만큼만 그릇에 옮겨 담는다. 엄마는 계란을 넣지 않았는데, 오래 두고 먹을 경우를 생각했을 때, 더운 날엔 계란을 넣으면 쉽게 상할 수 있어서라고 했다. 고작 하루가 얼마나 길까마는, 나는 엄마의 마음을 이해하기로 했다. 엄마의 얼굴에서, 김치가 떨어질까 전전긍긍하며 자주 김치를 가지고 우리 집에 오시던 할머니가 겹쳐 보여서였을까. 김치볶음밥을 먹기 시작할 땐 엄마가 떠올랐고, 다 먹어 갈 때쯤이면 할머니가 떠오르곤 했다. 엄마가 만들면서 할머니가 만드셨고, 엄마가 나를 위해 만들었지만 할머니가 엄마를 위해 만들기도 한, 밥인 셈이다.


김칫국물이 밴 밥알들은 겉보기엔 그냥 붉을 뿐이지만 깊은 맛을 내고 있었다. 생굴과 생새우, 배, 또 이것저것 갈아 만든 양념은 할머니 손맛과 합쳐져서 왜 김칫국물만 한 양념이 없다고 하는지 알 것 같았다. 진짜 그만한 양념이 없었던 것이다. 할머니의 고향은 경남 통영이다. 부산에서 태어나고 자란 나에게 가본 적 없는 통영은 멀게만 느껴졌는데, 그곳이 할머니의 김치 속에 스며들어 있는 것 같았다. 할머니는 통영처럼 바다 가득한 부산에 사시면서도 통영을 그리워하며 김치를 담그셨을까,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아득한 양념 맛을 낼 수 있을까 싶었다. 배추와 붉은 고춧가루가 다인 줄로만 알았던 김치의 깊이를 알고 나면, 어른들이 왜 이렇게 김치 담그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는지 다시금 생각하게 된다. 사서 먹는 것과는 다를 수밖에 없는 기억과 정성이, 담근 김치를 먹어줄 이에 대한 걱정과 애정이, 배추 곳곳에 배어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김치는 맵고, 짜고, 달고, 새콤하고, 시큼하고, 서글프고, 또 깊었다. 이토록 다양한 맛을 담고 있는 음식은 또 없으리라 생각했다.


그런 김치로 볶은 김치볶음밥은 내 주식이었다. 김치가 푹 익기를 기다릴 시간은 없었지만, 김치볶음밥을 먹으며 엄마 아빠를 기다릴 순 있었다. 그 시간이 외롭지 않았다. 덜 익은 김치로 만든 김치볶음밥을 먹으며 시간은 점차 익어갔고, 나는 어느새 자라 어른이 되었다.


부산을 떠나 서울에서 자취하면서 내 손으로 처음 해본 요리다운 요리가 김치볶음밥이었다. 누군가를 기다리면서 오래 두고 먹지 않아도 되니, 계란 프라이도 하나 얹어서 먹었는데, 아주 잠깐 서글펐다. 또 하나 달라진 건, 할머니가 아닌 엄마가 담근 김치로 만들었다는 거였다.


내가 어른이 되는 동안 할머니는 나와 다른 시간의 방향을 걷고 계셨다. 이제는 고향 통영에서의 기억 정도만 가지고 사신다. 대충 이리저리 만들어도 음식 솜씨가 워낙 좋으셨던 할머니가 음식 간을 못 맞추실 때 치매라는 병이 유독 더 실감 난다고, 엄마는 말했다. 할머니는 많이 달라지셨지만, 여전히 잊지 않고 가족들에게 가장 자주 하시는 말씀이 있다.

“밥은 먹었나?”

나는 어린 날의 김치볶음밥을 떠올린다. 할머니가 엄마를 위해 담그신 그 김치를, 채 익기도 전에 볶아 먹고 이만큼 자란 내가, 이제는 할머니 대신 그 시간을 기억하겠다고 되뇐다. 엄마의 김치는 엄마의 엄마 김치를 많이 닮아 있다.


누군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을 물으면 여전히 나는 ‘김치볶음밥’이라고 대답한다. 눅눅한 밥이어도 세상에서 가장 윤기 있는 음식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식어도 맛있을 수 있는, 특별하지 않아 보이지만 가장 특별한 음식 김치볶음밥.


지금도 누군가는 그 사람을 사랑하는 이가 담근 김치로 만든 김치볶음밥을 먹으며 이 시간을 보내고 있을지도 모른다. 마치 연료처럼, 그 시간이 나중이 되어서도 더 나중을 살아갈 힘이 될 것이다. 그랬으면 좋겠다, 내가 그래 온 것처럼.

나는 여전히, 김치볶음밥을 먹을 생각만 하면 힘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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