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엄마와 이야기하다가, 내가 소아 우울증이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삼십 년간 살면서 처음 듣는 이야기였는데, 정신과에 갔던 기억은 안 나지만 두렵고 막막하고 힘들었던 기억은 드문드문 있다. 나는 어릴 때 차를 못 탔고 엘리베이터를 이용 못했다. 차로는 한 시간 거리만 가도 구토를 하고 버스를 타도 사람이 많이 타면 속이 답답해져서 가다가도 내려야 했다. 엘리베이터를 타면 꼭 사고가 날 것 같아서 십 층에 살 때도 매일 계단을 걸어 올라갔다. 그게 우울과 무슨 연관이 있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나는 원인 모를 불안에 휩싸여 살았다. 내가 자라면서 엄마는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아이고 이제 사람 됐네”라고 자주 말했다. 내가 생각해도 사람 됐다. 아마 그렇게 살 순 없었을 거다.
“어린 게 뭐가 그렇게 힘들 일이 있다고…” 엄마는 말끝을 흐렸다. 그러게, 뭐가 그렇게 힘들었을까. 내가 중학생 때 일기에 죽고 싶다고 적었던 걸 엄마가 보고 충격 먹었던 일도 돌이켜 보면, 엄마에겐 참 두려운 순간이었겠구나 싶었다. 그때 나는 일기를 본 엄마에게 화가 났고, 죽고 싶다는 생각도 허락을 맡고 해야 하냐고 엄마에게 따져 물었다. 정작 나에겐 별일이 아니었다. 누구나 죽고 싶은 거 아니겠냐고, 다 그런 거 아니겠냐고 엄마가 호들갑 떤다고 생각했다. 그 이후부터 일기에 속마음을 쓰지 않게 됐다. 일기장에서조차 나는 내 이야기를 할 수가 없었다.
집에 빨간딱지가 붙고, 아빠는 누군가를 피해 다니고, 엄마는 계속 일을 하고, 나는 잠을 못 잤다. 경제적인 어려움이 두려웠던 게 아니라 가족 중 누군가가 견디지 못하고 콱 죽어버리진 않을까 하는 생각에 두려웠다. 나는 자주 죽고 싶었다. 그래서 내가 이런 생각을 하는 것처럼 가족 중 누군가도 그런 생각을 하다가 진짜 죽으면 어떡하지 싶었던 것 같다. 아빠의 악몽 꾸는 소리를 들으며, 자는 척하는 언니의 뒤척임을 느끼며, 미동도 없는 엄마의 코에 손을 대보며 나는 잠들지 못했다.
그때 기억의 파편들은 온통 슬프고 무섭고 두려운 것들뿐이다. 아빠의 고통과 엄마의 한탄과 언니의 투정을 들으며, 나는 내가 가진 두려움은 속으로만 묵혔다. 듣기만 하고 내뱉지 못한 말들은 내 속에 응어리져갔다.
그저, 나만은 이 집에서 짐이 되고 싶지 않다는 생각에, 더 이상의 불행은 막아야 한다는 생각에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을 묵묵히 했다. 나는 이렇게 잘 크고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부모님께 보여주고 싶어서 왜 열심히 하는지도 모르는 채 공부만 했다. 대회에 나가서 상을 타고, 1등을 하고, 반장을 했다. 중학교 고등학교 때도 전교권에 들지 않으면 안 된다고 나 자신을 다그쳤다. 아무도 그러라고 한 적이 없는데 말이다. 정말 가족을 위한 것이었는지, 아니면 그렇게라도 내 존재를 증명하지 않으면 내가 사라질 것 같아서였는지 몰라도 나는 꽤 처절한 10대를 보냈다. 어쩌면 지금의 강박적인 완벽주의도 그때 생겨났는지 모르겠다. 죽고 싶다고 생각하면서도 죽어라 열심히 하는 아이러니였다. 막상 대학에 갈 때가 되자 내가 원하는 게 뭔지 몰랐다.
아르바이트할 수 있는 나이가 되면서는 내가 쓸 돈은 내가 벌었다. 대학 등록금도 한 번이라도 성적 장학금을 못 받으면 안 되니까 그걸 대비해 내내 아르바이트를 했다. 다행히 성적 장학금은 다 받았지만 그렇게 아르바이트를 해서 모은 내 돈은 또 어디론가 흘러갔다. 집에선 나의 희생이 당연했다. 아무도 그걸 희생이라고 부르지 않았지만.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서울로 간 언니와 달리 나는 내내 부모님 곁에서 그들의 고통을 지켜봐야 했다. 남이 고통받는 걸 못 보는 아빠는 가족에게 고통을 주었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나는 그런 아빠가 원망스럽지 않았고 가여웠고, 힘든 엄마를 보면 또 안쓰러웠다.
가족은 모두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아니면 끊어질 관계들이, 내 책임감이 무거웠다. 아무도 짐 지워주지 않았지만 스스로 짐의 무게를 늘려간 탓에 견디기가 버거웠다. 내가 살아있는 한 끝이 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런데도 차라리 내가 힘든 게 낫다고 생각했다. 가족 중 누군가 나와 같은 생각을 할까 봐 무서워서, 나는 말도 못 하고 꾸역꾸역 살았다.
내가 행복이란 걸 느낀 건 우리 아기들(반려견)을 만나면서부터였다. 그 감정이 정확히 행복인지, 그 이름은 모르겠으나 어쨌든 웃는 날이 늘어 갔다. 내가 애쓰지 않아도 나를 있는 그대로 바라봐 주는 존재들이 있어서, 내가 돈이 없고 우울하고 찌질해도 나를 가치 있게 생각해 주는 존재들이 있어서 나는 살아갈 힘이 났다. 그래서 애기들이 나이 들어가는 게 무섭다. 내가 살아갈 존재를 잃는 게 두렵다. 나중에 애기들이 없을 때에도 살아갈 수 있기 위해 나는 매일매일 티 나지 않는 애를 쓰며 산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느끼는 우울 정도인지, 아니면 정말 ‘우울증’이라고 하는 것에 내가 해당이 되는 건지 잘 모르겠지만 언젠가 나도 정신과에 가서 내 이야기를 꺼내 놓을 수 있으면 싶다. 몸이 아프면 병원을 가듯 정신이 아프면 병원을 가야 한다. 사람은 몸과 정신으로 이루어져 있으니까. 혼자이면서도 절대 혼자서는 살아갈 수 없게 되어 있는 사람이라는 존재는 몸의 문제보다는 정신의 문제가 더 자주 일어나는 게 어찌 보면 이상하지도 않다.
가장 가까운 가족에게 가장 거짓말을 많이 하는, 아니 더 정확히 표현하면 진짜 나를 말하지 못하는 나라서 오히려 모르는 사람에게 털어놓는 게 더 편할 것 같다.
요즘은 출근길이 고역이다. 꼭 어릴 때의 나처럼 사람 꽉 찬 지하철이 숨이 막힌다. 어지럽고 식은땀이 나고 눈앞이 흐려져서 출근하다 죽는 게 아닐까 싶은 생각에 매일 아침이 두렵다. 몸의 문제인가 싶다가도 정신의 문제인가 싶다. 정신을 잘 붙들고 있다가 목적지에 내려서 지하철 의자에 한참을 앉아있다가 회사에 간다. 그래서 예전보다 더 일찍 집에서 나와야 한다.
나는 대체로 우울하고 가끔 행복하다. 우울은 이겨내는 게 아니라 함께 사는 거라고, 그렇게 나도 매일을 살아온 거라고 생각한다. 명확한 원인은 모르겠으나 이런저런 우울한 날들을 보내며 얻은 거라면 얻은 게 있다. 내가 그렇듯, 괜찮아 보이는 사람도 실은 괜찮지 않을 수 있는 거라고, 눈에 띄지 않는 애를 쓰며 살아내고 있는 거라고 생각할 수 있게 됐다.
대부분의 사람이 행복은 남의 행복이 더 커 보이고 불행은 내 불행만 한 게 없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불행은 눈에 보이지 않으니까. 나만 아는 것 같으니까. 하지만 불행도 저마다 색깔과 모양이 달라서 비교대상이 되지 못하는 게 아닌가 싶다. 저마다의 이유로 우울하다. 그리고 내가 우울하다고 해서 우울한 다른 사람을 100퍼센트 이해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래도, 나를 비추어 남을 생각할 수 있다면, 보이지 않는 힘듦이 다른 이에게도 있음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우울한 사람도 밥을 먹고 일을 하고 친구를 만나고 웃기도 한다. 그리고 또 우울해지는 날의 반복이지만
나름대로 노력하며 살아간다.
요 며칠, 모르는 사람의 우울 일지를 읽으면서 많은 생각이 들었다. 닿지는 않더라도, 응원을 보내고 싶은 마음이다.
이 글이 언제 또 사라질지 모르겠지만
일단 오늘은 그런 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