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당장 설국열차에서 뛰어내려라.
더블린에서 홈스테이 집-어학원-카페(혹은 간혹 전시회)-집 이렇게 단순하게 살 때는 몰랐다.
그냥 생각 버리기 연습을 많이 했던 것 같다. 아빠를 닮아서 그런가 (아빠 미안~ ㅠ.ㅠ) 생각이 머릿속으로 가득 차서 오전에
'그래 그래, 떠나오길 잘했어. 다르게 살아보는 거야. 생각 많이 하지 마. 가능 한한 무념무생으로 시간 죽이며 살아보는 거야. 벤치에서 멍도 때리고, 차 한잔 마시고, 우아하게 살아보는 거야. 어차피 그렇게 살 수 있는 시간도 1년이야'
이렇게 생각했다가도 1시 전후로 학원 수업이 끝나고 아무것도 하지 않을 자유시간이 주어지자 감당할 수 없는 불안감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아놔, 여기 다 너무 비싸. 오늘은 또 몇 유로나 쓴 거야? 나 뭐하지? 뭔가 인생이 바뀔 줄 알고 온 건데 이렇게 죽치고 있어도 되나. 뭔가 바뀔 줄 알았는데 바뀌는 게 하나도 없네?'
이렇게 하루에도 십 수 번씩 오길 잘했다 VS나 여기서 뭐하고 있는 거냐 의 감정이 대립했다.
과거의 나는 어떤 여자?
거짓말 조금 더 보태면 시간을 분 단위로 쪼개서 사는 여자였다. 운동 안 하고 막 먹으면 살찌는 체질이기 때문에 출퇴근 전후로 30분씩 걷는 것 까지 감안하고, 황금 같은 주말에 집에서 죽치고 있으면 역시 시간 낭비라 생각했기 때문에 주말이 더 바빴다. 사람을 만나느라 바쁜 게 아니라 (나는 사람이 뭐가 되려면 자기만의 외로운 시간이 있어야 한다고 강력 주장하는 쪽) 내 스스로가 만든 계획을 지키느라 바빴다. 오전에 몇 시에 일어나서 스무디 갈아 마시고, 양재천까지 걸어가든가, 한강에서 자전거 타든가 등의 운동을 좀 해주고, 오후에는 요리도 좀 만들어 먹든가, 밀린 영어잡지도 좀 읽어주면서 감 떨어지지 않으려고 노력도 좀 하고...
내 자랑이 아니라 이렇게 빡빡하게 살아야 잘 사는 것 같았다. 이렇게 안 살면 불안했다. 근데 이렇게 살아도 나는 늘 하루하루 허덕이고, 몸도 마음도 가난해져 갔다. 몇 번의 이직을 통해 연봉도 올랐고, 적금에 보험도 하나 들고, 너무 꼬질꼬질하게 살지 않기 위해 가끔 나를 위한 사치로 마사지도 받고 여행상품을 지르기도 했다.
그래도 나는 가난했다. 더욱 가난해져 갔다. 그렇게 살아도 원룸을 벗어날 순 없었고 나 같은 흙수저와 태생이 금수저인 사람과의 격차는 벌어져만 갔다. 그리고 에라이~ 이러고 떠나 온 거지 뭐.

누가 나에게 그러니까 너 지금 어쩌자는 건데? 한국 가서 뭐할 건데... 여턴 지금처럼 낭창 낭창 하게 살 수는 없고 돈 벌어야 할거 아냐. 국민연금도 건강보험도 다시 내야 하잖아. (지금은 국민연금 정지상태, 건강보험은 오빠 밑으로) 그것만 내? 휴대폰 비도 내야 하지, 보장성 보험료도 한 달에 8,8000씩 내야지. 너 계획이 뭐야?
이러면 나도 모르겠다. 그런데 걱정은 많이 줄었다.
뭐 오늘 저녁에 뭐 먹을지도 모르는데, 내 3개월 뒤를 어찌 알아. 뭐라도 되겠지. 밥은 먹고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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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국열차라는 영화 다들 본 적 있으신지.
처음 봤을 때는 기대를 너무 하고 봐서 인가, 감독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 보다는 그 양갱같이 생긴 그 검정젤리를 보면서 '저거 진짜 양갱 아님? 분명 양갱일 거야. 양갱 사이즈를 좀 크게 만들어서 영화 소품화 한 거 아닐까?' 이런 엉뚱한 생각만 하다가 영화관을 나온 경험이 있는데...
요새 새삼 설국열차가 많이 떠오른다.
서로 죽고 죽여서 일정한 인구수를 유지해야만 했던 추악한 진실.
지금 한국에서 전염병처럼 돋아나는 추악한 진실. 세대 간의 갈등, 성별 간의 극혐오, 계급 간의 차이. 등등 서로를 뜯어 죽이지 못해 안달 난 것처럼 보인다.
잘못을 저지른 위정자들이(설국열차의 특실 승객) 우리를 내려다 보면서 웃고 있을 때 우리끼리 치고 박고 죽이지 않았으면 좋겠다. 나 혼자 잘 사는 건 아~무 의미 없다.
내가 정규직이라고, 내가 대기업 다닌다고 비정규직의 불구덩이에서 빠져나왔다고 가슴을 쓸어내리며 백수들, 비정규직의 삶을 외면하지 마시길. 노동개혁으로 인해 해고는 쉬워졌고, 그대 역시 언제 비정규직이 될지 모른다는 사실. 나는 현대 중공업 사무직이지만, 생산적이 산업재해로 죽어갈 때 본인 생산직 아니라고 상황 외면하지 마시길.
정규직도 언젠가는 은퇴든 해고든 자발적 백수든 상황을 맞이하기 마련이고, 지난 10년간 2만 2천 명이(통계로 확인할 수 있는 숫자만 그러하다) 사망했다. 모른 척 하지 말자. 그렇게 비정규직을 이기고, 여자를 이기고, 생산직을 이기고, 나 혼자 잘 먹고 천년만년 살 것처럼 억대 연봉받고, 판교에 집 사고, 내 자식은 유학 보내고, 내 자식은 병역의무 기피하고 그렇게 나만, 내 가족만, 챙기며 언제까지 지속할 수 있을 것 같은지...
결국은 승자 1명을 남기고 나머지는 다 죽이는 배틀 로열 게임에 우리 모두 자발적으로 참여하고 있는 것 아닌지.
나와는 상관없을 것 같은 시리아 난민들.
나와는 아무 상관없던 세월호 희생자들.
죽어 거는 북극곰들.
다 껴안으면서 다 함께 부둥켜안고 잘 살아야 한다는 게 정답이다. 그래야 헬조선이, 이 그지 같은 세상이 좋아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