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에서 중요한 결정은 갑자기, 우연히, 그냥 그렇게 일어나는 법
그렇게 나는 6월 24일부터 일주일간 스코틀랜드 글라스고(Glasgow)에 머물렀다. 그곳이 글라스고여야 하는 이유는 딱히 없었다. 어학원이 끝날 무렵, 나는 우연히 접한 BBC 드라마 "립 서비스"에 한창 빠져있었다. 동성애를 다룬 드라마라는 사실은 영상을 보면서 확인할 수 있었지만 스토리가 워낙 탄탄해 별다른 거부감 없이 흥미진진하게 즐길 수 있었다. UK 영어에 익숙해 지기 위해 선택한 작품이지만 드라마 로케이션에 유독 관심이 갔다. 건축장식이 유독 예쁜 이 곳은 어딘고 싶어서 인터넷을 검색하니 드라마 촬영의 배경이 된 곳이 바로 글라스고 였던것.
그렇게 나는 아무 목적 없이 비 오는 여름날의 글라스고를 낭창낭창 걸으며 혼자만의 여행을 시작했다. 많은 사람들이 보통 일주일을 글라스고에 머물게 되면, 하루 이틀 일정으로 에든버러를 다녀오는 여행 일정을 계획하곤 하지만 나는 일주일이면 일주일, 보름이면 보름, 처음 정한 여행지에서 움직이지 않고 다시는 오지 않을 사람처럼, 그리고 현지인처럼 샅샅이 여행하는 걸 선호했다.
가벼운 가방 하나를 메고, 스마트폰을 꼭 쥔 한손에 지도 앱 만을 켜 놓을 상태에서 그렇게 동서남북 글라스고를 헤집고 걸어 다녔다. 현지인처럼 살아보고자 다운타운에서 걸어서 40분 정도 걸리는 곳에 AirBnb 숙소를 일주일간 예약했으나 내가 운이 없었던 건지 일주일을 함께 살아야 하는 주인이 까다로웠다. 오후 6시에 이전에는 방에 불도 못 켜게 했고, 본인이 키우고 있는 고양이가 내 방에 들어가면 안된다며 항상 방문을 닫고 있도록 요구하는 게 많이 불편했지만 무엇이든 불평하기 시작하면 끝도 없는 법. 호스트가 원하는 대로 패턴을 맞추어 었다.
<6일간 빠지지 않고 지나다녔던 글라스고 브리지>
여행 첫날 이곳저곳을 여행하고 아파트로 돌아와서 간단히 샤워하고 이메일을 열람하자 스코틀랜드 여행 일주일 전에 Gocambio.com이라는 회사에서 코리아 컨츄리 매니저를 뽑는다는 포스팅 보고 갖고 있던 CV는 업데이트해서 지원했던 곳에서 답메일이 와있었다. 모레쯤 화상 인터뷰를 보고 싶다는 답장과 함께 인터뷰 중에 아래와 같이 Gocambio.com 에 대한 아이디어를 제시해 줄 수 있겠냐는 제안이 와 있었다.
we ask our applicants to prepare a short report or presentation on how they would market GoCambio to their country. However the interview is at short notice, but it would be still great if you had time to think of a few areas that you could talk about.
사실 아일랜드 구직 사이트에서 별다른 기대 없이 지원한 회사였다. 여행을 기반으로 한 회사 콘셉트에 흥미를 느꼈고 일단 생긴지 반년도 안된 창업회사라는 게 제일 먼저 마음에 들었다.
한국에서 직장생활을 하면서 내가 느꼈던 가장 힘든 부분은 앞 뒤 꽉 막힌 조직생활이었다. 근기법상 주 40시간을 표방하고 있지만 실제로 지난 7년간 몇 곳의 외국계 회사를 거치면서 6시에 퇴근할 수 있는 회사는 없었다. 나는 항상 8시 반쯤이면 출근해서 빨리 퇴근하면 7시쯤, 그러나 대개는 8시 반에서 9시 사이에 퇴근했다. 상사에게 욕먹을 것을 각오하고 6시 칼퇴를 감행한 적도 있었지만, 그럴 때는 대개가 이직을 코앞에 두고 있을 때만이 가능했다. 그러지 않고서는 상사와 아무 탈 없는 직장생활 자체가 불가능했다. 주 40시간만 일하면 되는 당연한 나의 권리를 두고도 나는 끊임없이 눈치를 보고, 할 일 없어 퇴근하는 무능한 직원이 되거나, 아니면 난 야근수당 없이 죽도록 일하는 개가 되어야만 했다.
더 이상 이렇게 살기 싫어 도망쳐 나온 한국이었지만 다시 외국의 회사에 지원하게 된 이유는, 아일랜드 홈스테이 가정에서 6개월간을 살면서 아내와 저녁을 함께 준비하는 아일랜드 가정을 지켜보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외국에서 회사 생활을 하면 어떨까 하는 호기심에서부터 시작된 Gocambio.com지원은 지난 2015년 3월에 생길 스타트업 회사이기에 더욱 맘에 들었다.
여행 온라인 플랫폼 회사 답게 세계 각국에서 온 친구들과 같은 공간에서 일할 수 있다는 생각에 설렜다. 그러나 이 모든 기대와 희망은 우선은 면접에 통과해야 가능할 터.
간단히 사이트를 둘러보고, 지원했던 Job Description 도 다시 한번 자세히 읽어보았다. Gocambio.com이라는 회사가 과연 한국 시장을 진출해도 좋을지 객관적으로 검토한 후 "한번 함께 일해보고 싶다"라는 욕심이 생겼다. 그리고 이틀 뒤, 매니징 디릭터라고 본인을 소개한 로지 맨즈필드와 30분가량 Skype을 통한 화상 인터뷰를 마쳤다. 그리고 다음날 바로 Welcome to Gocambio 이메일을 받을 수 있었다.
이로써 일주일 전까지만 해도 한국으로 돌아가는 비행기 티켓팅을 언제 하면 좋을지 고민하던 내가 아일랜드에서 여행자가 되어 삶을 관조하는 게 아니라 제대로 살아낼 수 있는 또 다른 문이 열리게 되었다.
의외로 인생의 고비고비의 중요한 결정은 의도된 그 어떤 인과관계없이, '아주 우연히, 그냥, 어쩌다가' 일어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우리는 그동안 너무 많은 것을 계획하고, 고민하고, 심각해 해왔다. 그런 식으로 우리를 옥죄이지 말고 그 순간과 현재에 집중하면서 최대치로 사는 삶을 지향해야 하는 게 아닐까. 뇌가 기분 좋게 단순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