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간 것은 지나간대로 그런 의미가 있으니까.
부산에서 태어나서 부산에서 24년을 살다가 아빠를 만나서 충청도에서 45년을 살아온 우리 엄마.
그 당시 "꽤 넉넉한 형편" 이었던 "억세게 운좋은 여자"들이 아니면 대학을 꿈꿀 수 없었다는 것 쯤이야 익히 들어서 알고 있었기에 부지불식 간에 당연히 우리엄마의 최종 학력을 고졸 이라고 알고 있었다.
나는 박사학위를 갖고 있는 아빠보다 엄마가 늘 말도 잘하고 똑똑하다 라고 생각해 왔었기 때문에 여자로서 대학을 꿈꿀 수 없었던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좀 안타까워 하기도 했고, 엄마가 대학을 갔더라면 아빠랑 결혼을 하지 않았을거라는 생각도 종종 했었다. 왜냐면 내가 보는 엄마는 사실 아빠보다 모든 면에서 똑똑하고 박학다식 했기 때문이다. 단순히 생활의 지혜를 넘어선 명석함 이라고나 해야할까?
뭐 물론, 그랬으면 나도 존재하지 않았겠지만. : (
가끔 부산인 외가에 갈때마다 엄마에게 '엄마는 오랜만에 동창 안만나?' 라던가 '엄마는 왜 학창시절 사진이 없어?' 라고 묻곤 했었는데 엄마의 학력을 의심해서 물어본 질문이 아닌 정말 순수한 궁금증 이었다.
그럴때마다 엄마는 '여자는 결혼하면 또 상황에 따라서 친구가 바뀐다' 라던가 '결혼전까지 이사를 하도 많이 다녀서 사진을 잃어버렸다' 라는 답변을 했었다. 물론 충분히 이해 갈만한 상황에 더 묻지는 않았다.
근데, 최근에 어쩌다가 엄마 보다 두살 위인 초등학교 교장으로 계신 큰외삼촌이 중,고등학교도 졸업하지 못하고 검정고시를 본 후, 부산교대를 입학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리고 당시 외할아버지는 신장암에 걸려서 약값을 대느라 집을 팔고 큰 빚까지 있었다는건 암암리에 들어서 알고 있었기 때문에 크게 놀라지도 않았다. 그렇게 20년 이상 누워만 계시고 돌아가신 외할아버지를 난 어렴풋한 기억으로만 안고 있었다.
그러다가 문득, 큰오빠가 중학교도 못나왔는데, 2살 아래 엄마가 고등학교까지 나왔다는 사실이 전혀 앞뒤가 맞지 않다고 생각이 들었고 언젠가 한번 확인해 보긴 해야 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지난주 엄마가 성지순례 여행을 떠났고 나랑 아빠만 집에 남은 상황에서 나는 이때다 싶어서 그동안 궁금했던 점을 조그조근히 여쭈었다. 아빠는 뭔가 결연한 표정으로 말씀하셨다.
"사실, 엄마 국졸이야. 니가 이미 대충 눈치 챈 것 같아서 말하는거니까 니가 알고 있다는 사실을 엄마가 알게 해서는 안돼. 명심해. 절대로 엄마가 알아서는 안돼. 짧게 말하면 외할아버지 쓰러지시고 결국 진학할 수가 없었대. 몇년간 공장에 다니면서 살림에 보탰다고 들었어.
너 진짜 약속해야 한다. 엄마한테는 상처고 금기니까. 너 툭하면 엄마한테 고등학교 몇회 졸업생 이냐는 둥, 여고 동창 안만나냐는 둥 그런 질문 엄마한테 하지도 마라. 니가 그런질문 할때마다 엄마랑 아빠랑 가슴이 철렁했다."
사실 난 이 말을 듣고 처음에는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시간이 갈수록 심장이 좀 콩콩 뛰었다.
내가 충격을 받은건 엄마의 초졸 학력이 아니라 그걸 나에게 까지 숨겼던 엄마의 상처받은 마음 때문이었다.
아직 50대인 엄마가, 그 시절 대학까진 힘들다 하더라도 고등학교 까지는 어지간 하면 다 졸업했을 나이에 집안 사정으로 중학교를 포기했을때 그 어린 14살의 우리 엄마는 마음이 어땠을가. 그리고 자식에게 까지 차마 말을 못하고 그때그때 순간을 얼버무리고 넘어가야 했을 엄마.
응답하라 1988에서 엄마 라미란과 아들 정환의 통화 장면이 화제가 된 적이 있었다. 전화로 급하게 여권 영문 성함을 불러달라고 하는 아들 정환을 몇번씩이나 피하다가 라미란이 뱉는 말,'엄마가 사실 영어를 읽을 줄 몰라' 였다.
내가 이 장면을 엄마와 함께 보며 뭐라고 말했던가...
"중학교도 안나왔나? 중학교만 나와도 영어는 읽을 수 있지 않아? 초등학교 밖에 안나온 설정은 너무 작위적이다. 요새 그런 사람이 어딨어."
모르긴 몰라도 엄마는 그런 나를 보면서 더욱 입을 닫고 상처 받았겠다 라고 생각하니 심장에 봉숭아 물을 들인 것처럼 알싸하게 아렸다.
절대 엄마에게 아는 척을 해서는 안된다는 말에 나는 엄마의 학력 문제를 두고 엄마에게 [엄마, 학교따위 아무 문제도 되지 않는데, 그걸 왜 나한테까지 그렇게 꽁꽁 숨겼어. 그동안 많이 상처받았겠다] 라며 위로조차 하지 못하는 이 마음이 그저 안타까울 뿐이다.
그리고 한때 열네살 소녀였던 우리 엄마는 교복을 입고 카라를 한껏 세운 또래 친구들이 너무 부러웠을 것이다. 그리고 그 상처를 극복하지 못한채로 자식에게 까지 숨겨야 했던 그 작은 마음이 너무 안쓰러워서 나는 속으로 혼자 몇번이고 "엄마 학력따위 나와 아무 상관없다니까. 지나간 것은 지나간대로 다 의미가 있는건데 떳떳할 자격 충분히 있어요~!" 하고 외쳤는지 모른다.
아빠에게 얘기를 다 전해 듣고 나는 또 문득 궁금해졌다.
"근데, 아빠는 언제 알았어? 엄마가 초등학교만 졸업했다는거?"
아빠는 그때가 생각 난 다는 듯이 씨익 웃었다.
"아빠가 엄마랑 지역이 달라서 1년에 몇번 못보고 대신 편지를 주고 받으면서 연애 했거든. 근데 엄마가 그러더라고. 사실은 제가 형편이 안좋아서 중학교를 진학하지 못했습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이 여자랑 결혼해야 겠다 생각이 들었어. 니네 엄마 똑똑하잖아. 되게 똑똑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국졸 이라는 말을듣는 순간 똑똑하기만 한게 아니라 솔직하기 까지 한 모습에 홀딱 반한거지뭐."
나는 말없이 아빠를 향해 엄지를 척하고 내밀었다. 항상 꽁생원처럼 답답하다고 생각했었는데 의.외.로. 우리아빠 멋있다. 난생처음으로 우리아빠 같은 사람이랑 결혼해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하늘이 어두컴컴 금방이라도 비가 쏟아질것 같다.
스페인 남부 성당을 돌며 열심히 미사드리고 있을 엄마가 보고 싶다.
그리고 진심으로 한 10년쯤 뒤에는 치타여사 라미란 보다 더 쿨하게 "사실은 딸~ 엄마가 중학교에 가본적이 없어." 라는 말을 건네며 웃는 엄마의 모습이 보고 싶다.
지나간 것은 지나간대로 의미가 있으니까. 그리고 나는 우리엄마가 참 똑똑하다고 생각하는 딸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