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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동수 Nov 18. 2022

8년의 시차

교육하다

1. 2014년


"소비자가 원하는 제품을 만들어야 판매가 되듯 대학도 사회가 원하는 인재를 양성해야 한다."


박용성 중앙대 이사장이 한 말이다. 중앙대는 이 교육철학을 학교에 이식시키기 위해 회계학을 공통필수 교양과목으로 지정했다. 다른 대학의 학생들도 '기업이 원하는 인재상'에 부합하고자 자신의 전공과도 관계없는 경영학 과목을 수강한다. 이처럼 경영·경제 관련, 곧 기업경영에 필요한 과목이 대학과 대학생들 사이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다. 하지만 대학은 기업이 원하는 인재 양성에 급급할 뿐, 노동과 관련된 지식이나 그 현실을 가르치려 하지 않는다. 그 결과, 노동자에게 필요한 노동법 교육은 무시되기 일쑤다. 하물며 대학생의 대부분은 알바 노동 등을 통해 일을 하는 경우가 빈번함에도, 그때 꼭 필수적으로 작성해야 하는 근로계약서의 존재를 쉽게 무시한다.


그만큼 대학은 노동자의 권리보다 자본의 이해를 더 대변하는 존재로 변질돼 가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대학의 뒤에 숨겨진 존재가 바로 대기업과 대자본이며, 그 논리가 우리 사회를 광범위하게 지배하고 있는 탓이다. 이를테면, 기업의 돈이 투여돼서 완공된 건물에 해당 기업의 이름을 붙인 것이 현 상황을 증명한다. 서울대의 SK경영관과 LG경영관, 고려대의 LG-POSCO경영관, 연세대의 삼성관 등처럼 말이다. 하지만 이런 대학의 현실에 저항하려는 학생은 좀처럼 보기 힘들다. 학생들이 직접 나서서 노동법과 노동 현실에 대해 알려고 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대다수 학생들은 갈수록 힘들어지는 취업 탓에, 기업의 하청업체를 자부하는 대학에 열광하고 지지를 보낸다. '취업의 전당'으로 전락한 대학, 거기서 배출될 예비 노동자들은 노동과 그 가치를 도외시한 채, 기업가적 자아만을 알게 모르게 형성하고 있는 것이다.


지난해 12월, 중앙대 청소노동자들은 노동환경 개선을 요구하는 파업을 시작하였고, 지금까지 지속하고 있다. 그 절차도 적법했다. 하지만 중앙대는 "용역업체와 노동자들 간의 일"이라며, 되레 파업을 벌이는 노동자들에게 온갖 방해 공작을 펼쳤다. 게다가 총학생회는 이 파업이 학교의 가치를, 아니 기업의 고용 구매도를 떨어뜨리는 행동이라 파악했는지, 청소노동자들을 지지하기는커녕 이들이 소속된 민주노총에 "노동쟁의를 중단하고" "학교에서 철수해달라" 요구했다. 이 어처구니없는 사태는 청소노동자의 노동3권보다 학교와 학생의 '안녕'만을 더 생각한 대학본부와 학생회가 노동법과 노동조합의 역할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탓에 발생한 것이나 다름없다. 노동자의 언어, 노동법이 이렇게 대학에서 존재의 이유를 잃어가고 있다.


노동자의 권리는 노동자들이 "근로조건의 향상을 위하여 자주적인 단결권·단체교섭권 및 단체행동권을"(헌법 제33조 제1항) 보장받을 때야 비로소 실현 가능하다. 그 이유는 "근로조건의 유지·개선과 근로자의 경제적·사회적 지위의 향상을 도모하고, 노동관계를 공정하게 조정하여 노동쟁의를 예방·해결"(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 제1조)하는 데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실은 중앙대 청소노동자들의 파업이 보여주듯, 노동3권과 여타의 노동기본권이 법조문의 내용과는 달리 자본의 논리에 휘둘리고 있다. 이뿐만 아니다. 정리해고와 비정규직 양산 등 반인권적인 행태를 저지르는 기업의 횡포 때문에, 노동자들은 노동법의 사각지대에 무방비로 노출돼 있는 상황이다. 그마저도 정부의 기업편향적인 모습에 노동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렸다.


노동자는 있지만 노동, 그 권리는 없다. 노동은 노동자의 생존권을 넘어 사회권까지 모두 포괄하는 행위인데도, 여전히 우리 사회는 그 단어 자체까지 불온시하려 한다. 노동법마저 자본에 의해 법의 지위를 상실한 지 오래다. 노동법을 배우는 노동자도, 가르치는 대학도 적다. 자본의 시대, 노동이 사라진 대한민국의 현주소다. 이런 와중에 노동법을 안다고 해서, 노동자의 권익이 단시일에 보호·신장되는 것도 아니다. 그래도 대학생이라면 노동법을 배워야 한다. 노동과 그 현실에 관한 체계적인 교육과정도 필요하다. 현재의 노동현실을 제대로 이해하고 노동기본권이 침해되는 것을 최대한 방지하기 위해, 더 나아가 인간의 존엄성을 짓밟는, 지금의 불합리한 노동환경을 개선하기 위해 노동법은 유용한 도구이자 최후의 무기이기 때문이다.





2. 2022년


지난달 4일부터 덕성여대 청소노동자들의 점거농성이 진행 중이다. 지난해 11월 시작한 교섭의 연장이다. 줄곧 시급동결을 고집해왔던 학교 쪽은 얼마 전 2026년까지 정년퇴직하는 청소노동자 12명의 후임을 새로 충원하지 않는 방안에 합의하면 노조 쪽 요구조건(시급 400원 인상)을 수용하겠다는 조건부 수정안을 제시했다. 하지만 이 안대로 한다면 청소노동자들의 노동강도가 지금보다 더 세질 것이 분명하기에, 노조 쪽은 구체적인 대안 마련 없이는 받아들일 수 없는 안이라며 맞서고 있다. 이런 일련의 과정에서 일부 학생들은 청소노동자들을 비난, 혐오하는 대자보와 메모지들을 써서 학내에 붙였다. '학생 볼모 반대한다. 하청파업 철회하라' '노동자 OUT(아웃)' '13개 대학 중 덕성여대는 최고금액 얼마나 더 지급해야?' 등등. 모두 청소노동자들의 요구와 농성이 이기적이라고 지적하는 내용이다.


고전경제학에는 '개인의 이기가 사회 전체의 후생을 향상시킨다'는 원리가 있다. 하지만 이 원리는 모든 개인에게 골고루 적용되지 않는다. 경제주체들 가운데 노동자의 이기는 유독 불온시하기 때문이다. 고전경제학이 긍정하는 개인의 이기심이 모든 이기적인 행동까지 다 포괄하는 건 아니라는 얘기다. 그 기준이 명확하지 않기에 실생활에서는 각 주체의 입맛에 맞게 재해석된다. 생산자 처지에서는 비용을 최소화하고 이익을 최대화하는 일이, 소비자 처지에서는 질 좋고 값싼 상품을 소비하는 것이 이기적이지만 합리적인 의사결정이 된다. 노동자의 합리적인 선택은 개선된 근로조건에서 일하는 것이지만, 노동자의 이기는 인건비라는 비용상승의 원인이 된다. 이는 가격상승으로도 이어질 수 있기에 생산자와 소비자, 두 경제주체의 합리적인 선택에 방해가 될 수밖에 없다. 희소한 자원을 배분하는 문제 앞에서 노동자의 이기를 제일 먼저 배제하려는 건 이 때문이 아닐까?


지난 9월, 김건희 덕성여대 총장은 이렇게 이야기한 바 있다. "(청소노동자들의) 임금은 학생 등록금으로 충당된다. 대학이 재정적으로 어려운 만큼 학생의 교육환경 개선을 위해 예산을 써야 한다."


이 발언은 '청소노동자의 이기'(시급 인상) 탓에 '학생들의 이기'(학습권)가 침해받을 현실을 우려하는 것이지만, 따지고 보면 '학교의 이기'(시급동결)를 관철하기 위한 여론전의 일환이기도 하다. 일부 학생들이 이 여론전에 화답했다는 점은 그 자체로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사용자의 논리를 기준 삼아 자신의 이기와 반대되는 목소리를 억누르려 했기 때문이다. 덕성여대 교내에 '학생임금 9160원 청소근로자 임금 9390원'이라 적힌 메모에서 볼 수 있듯, 시급 9160원을 받는 노동자가 소비자의 위치에서 9390원을 받는 청소노동자의 시급인상을 반대하는 일은 노동자의 이기가 억제돼야 할 것으로만 취급되는 우리 사회의 현주소를 적나라하게 반증한다.


하지만 이렇게 생각해볼 여지는 정녕 없었을까. 청소노동자들의 점거농성은 그동안 그들의 가치를 제대로 인정받지 못한 결과가 아닐까? 오히려 그들의 점거농성을 방치하는 건 총장의 이기심을 넘어 탐욕이 아닐까?


청소노동자 혐오 대자보와 메모지들은 어쩌면 노동자의 이기를 제대로 학습하지 못한 결과인지도 모른다. 소수의 연세대생이 집회를 연 청소노동자들을 향해 민·형사의 책임을 묻겠다고 밝혀 사회적으로 큰 주목을 받은 뒤 벌어졌다는 점에서 징후적이기까지 하다. 사실, 노동자의 이기는 초·중·고 정규교육 과정에서 잘 다뤄지지 않는다. 그 대신, 생산자의 이기는 기업가라면 추구해야 할 최우선의 덕목으로 칭송될 만큼 주요하게 다뤄져 왔다. 개인의 이기가 불평등하게 해석될 수밖에 없는 환경에 이미 학생들은 노출돼 있었다. 이런 기조는 대학 교육과정에서도 마찬가지다. 대학에 기업의 인재상을 터득하는 공간인 '일자리센터'는 있지만, 노동자의 인권을 대변하는 '노동인권센터'는 없지 않은가.


'노동자의 이기가 사회 전체의 후생을 향상시킨' 사례들(노동운동의 역사)을 지금이라도 가르친다면, 이러한 현실이 바뀌게 될까? 교육의 효과는 단시간에 나타나지 않으므로, 당장의 효과를 기대하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더군다나 노동자의 이기가 지금 당장 정규 교과에서 중요하게 다뤄질 가능성도 거의 없다. 지난 9일 교육부가 발표한 '초·중등학교 및 특수교육 교육과정' 행정예고 안에서 노동교육은 교육목표로 명시조차 되지 않았다. 결국 사용자의 시선에서만 바라보도록 학습된 노동자의 이기가 누군가에게 무조건적인 비난과 혐오의 대상으로 비치는 건 지극히 당연한 귀결 아닐까? 대학 청소 '노동자들'이 근로조건 개선 요구를 멈추지 않는 한, 학생 '소비자들'의 비난과 혐오도 한동안 계속될 수밖에 없는 이유다.





3. 2030년?


8년의 시차를 두고 쓴 두 개의 글은 공통점이 있다. 여전히 근로조건 개선을 요구하는 청소노동자들을 이야기하고, 동시에 노동교육의 중요성을 다룬다. 그때나 지금이나 청소노동자들의 농성에 반대하는 학생들이 존재한다는 점 역시 같다. 공교롭게도 두 글 모두 <한겨레>에 실렸다.


그렇다면 8년 사이에 달라진 건 무엇일까? 전혀 없지는 않다. 우선, 2014년의 이야기는 내가 대학이란 울타리 안(대학생, 20대)에서 쓴 글이고, 2022년의 이야기는 대학이란 울타리 밖(노동자이자 르포작가, 30대)에서 쓴 글이다.


차이점은 또 있다. 그때와 달리 현재는 일회성에 그치기는 하지만, 교실에서 노동인권 교육을 한다. 하지만 지금의 현실을 바꾸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환경이다. 그래서일까. 대학 청소노동자들의 근로조건 개선 요구를 이기적으로 보는 대학생들의 시선이 점차 늘어나고 있다.


또다시 8년 후, 대학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대학 청소노동자들의 노동조건은 얼마나 달라져 있을까? 그들은 학내에서 점거농성을 하고 있을까? 청소노동자들의 노동운동을 바라보는 교육 소비자들의 태도는 어떨까? '사용자의 이기'와 '노동자의 이기'를 평등하게 배울 수 있는 토대가 마련돼 있을까? 이를테면, 대학은 노동교육을 공통필수 교양과목으로 지정하고 있을까? 초·중·고 학생들이 노동교육을 일회성이 아닌 정규교육의 형태로 학습받을 수 있을까?


그즈음이면, '대졸 출신'의 대학 청소노동자들도 본격적으로 탄생할 것이다. 나 역시 대학에서 청소일을 하고 있을지 모른다. 현재 대학 청소노동자들 중에는 40대도 있다.


미래가 어떻게 변할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하지만 8년 후에도 '노동자의 이기'와 '사용자의 이기'를 평등하게 가르치는 토대가 마련되어 있지 않는다면, 근로조건 개선을 요구하는 노동자들에 대한 무차별적인 비난과 혐오는 절대 멈추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지금보다 더 심해질 가능성이 높다.


교육 문제는 쉽게 해결할 수 있는 듯 보여,  이면에는 정치, 경제, 계급, 젠더 등의 문제가 복잡하게 얽혀 있다. 그래서 노동교육 문제의 해법 역시, 절대 간단치 . 8년간 변하지 않은 과거가 이미 증명해주고 있지 않은가. 앞으로 8 후의 모습이 지금과 다를 거라고 쉽게 예측할  없는 이유다. 만약 정말로 바뀌지 않는다면, 2030년에 나는 2014년과 2022년에 썼던 주제와 같은 글을 또다시 쓰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때와는 달리, 당사자(대학 청소노동자)로서 말이다.





* '1. 2014년'은 2014년 2월 7일, 『한겨레』에 실렸던 「대학생들이여, 노동법을 배워라」를 일부 수정한 글입니다.     

* '2. 2022년'은 2022년 11월 15일, 『한겨레』에 실렸던 「덕성여대도 '청소노동자 비판' 대학생글…왜 '노동자의 이기'만 불온시될까」를 일부 수정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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