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 상해를 가 보고 싶은 건 임시정부 김구 선생님을 생각했기 때문이다. 백범 김구를 읽고 나서 상해로 향했다. 3박 4일이었다. 금요일 오전 아홉 시 집을 나서 공항 가는 버스를 탔다. 잠을 설쳤다. 가방은 배낭 하나와 다닐 때 멜 작은 가방이다. 옷도 한 벌씩만 준비하고 화장품도 샘플로 준비하여 되도록 짐을 줄이려고 했다, 여행할 때 짐이 없는 것이 좋다. 짐을 나눠 들어줄 사람이 없는 길은 짐이, 짐이 된다. 11시에 모임인데 난 10시에 도착했다. 여행서 깨달은 건 짐을 늘려오지 않는 것이다. 대신 추억을 많이 만들어 오는 것이다. 추억이 많은 사람이 잘 사는 거라 여긴다.
상해와 주가각, 향주 서호를 간다는 생각만으로도 설레었다. 한편 상해임시정부 유적지를 후손으로서 너무 늦은 방문 아닌가 하는 반성이 생겼다.
아시아나 항공 OZ365편으로 2시 10분 출발이었다. 성인 279,000원(왕복 항공료와 인천 공항세 17,000원 관광 진흥 기금 10,000원 전쟁보험료, 중국 현지공항세, 전 일정 식사 및 관광지 입장료 1억원 여행자보험) 불포함은 중국 비자 단체 비자 25,000원, 현지 가이드와 기사 팁은 전 일정당 1인 40달러 오만 원이었다. 유류할증료 및 TAX 95,300원, 선택 관광 일부 중 송성 가무쇼 35달러, 일반석이고 로얄 석은 25달러 추가였다. 점심으로 참치김밥을 먹었는데 기내식으로 간단하게 점심이 제공되었다.
두 시간 걸려 15시 10분 현지 도착하니 상해 전문 가이드가 피켓을 들고 있었다. 다른 일행들이 화장실 갈 때마다 기다려야 했다. 가이드는 모두 29명이 다 모여서야 차에 올랐다. 이층버스였다. 기다리는 것도 즐기려 했다. 16시에 공항을 나왔다.
중국은 우리보다 한 시간 시차가 있었다. 광천수 한 병씩을 가이드가 주어 물부터 마셨다. 흐린 상해 하늘이다. 석화가 주유소라는 걸 알았다.
오늘의 일정은 황푸강에 가서 유람선을 타고 야경을 보며 선상 식사를 하고 항주로 옮겨간다고 했다. 중국은 34개 도로 나눈다. 공항도 3대 공항이 베이징, 홍콩, 상해인데 상해 공항은 한 번에 8대가 동시에 뜨고 내릴 수 있는 만큼 거대한 공항이다. 중국은 넓다 보니 보통 이동시간이 전용 버스로 한 두 시간은 보통이다. 상해의 랜드마크 (상징건물) 동방명주 탑과 서커스 중국 문화예술의 대표적 송성가무쇼를 강조하는 가이드의 말을 들으며 황푸강에 도착하니 벌써 날이 어두웠다. 홍콩의 야경만큼 황포강의 야경도 아름답다.
상해는 건물들이 많고 집이 다닥다닥 관사처럼 일정하다. 아파트도 고층 건물도 많았다. ‘역시 중국은 인구가 많구나.’ 생각했다. 이 많은 인구가 다 무얼 해서 먹고살까 은근히 궁금해졌다. 거지가 별로 없다고 한다. 상해에는 깡패도 없다고 했다. 그래야 국제도시 상해가 아닐까. 중국 경제의 중심지요 아시아 경제도시인 상해다. 북경이 정치의 중심이라면 상해는 부자들이 많다고 한다. 손님은 가이드를 잘 만나야 하나 가이드도 손님을 잘 만나야 된다고 강조했다. 흑룡강, 연변은 함경도 사람이 많이 차지하고 있다. 연변서 온 가이드는 북한 말씨와 비슷했다.
상해는 춘추전국시대 초나라 땅이다. 상해는 바다 위에 있는 도시로 상하이 트위스트 노래가 생각났다. 참으로 와보고 싶은 곳이었다. 한강의 강남과 강북처럼 황푸강을 사이에 두고 동과 서로 나눈다.
19세기 영국은 청나라에 모직물과 면화를 수출하고 청나라로부터 홍차, 비단, 도자기 등을 수입했다. 청나라는 은을 받고 홍차를 팔았다. 엄청난 양의 영국 은이 중국인 청나라로 흘러 들어오자 영국은 중국무역에서 큰 손실을 보고 있었다. 1840년 아편전쟁이 생각났다. 청나라는 자급자족하는 나라로 유럽 것은 중국에 안 팔리자 영국이 아편을 만들어 중국에 팔았다. 결국 중국이 수입하는 아편의 양이 수출하는 홍차보다 많아졌다. 또한 아편중독자도 늘자 청나라는 아편을 금지, 모두 아편을 태워버렸다. 영국이 이일을 빌미로 1840년 6월 청나라를 공격한 것이다. 간신, 충신, 낮과 밤이 있다. 아편으로 돈 못 버니까 전쟁 못 하게 싸움을 안 해 진 것이라 했다. 난징조약을 체결하고 영국은 이때 홍콩섬의 지배권을 얻었다.
상해로 모험가, 돈 많은 사람들이 도망가려고 상해로 왔다.
북경이 500년 역사라면 상해는 100년 역사다. 과거, 미래, 현재가 공존하는 시대가 상해다.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 든 90년대 개방 아시아 경제 중심지가 된 상해,
남경로를 갔다. 남경로는 명동과 같았다. 7시간 다 걸어도 다 못 걷는다는 남경로다. 신세계가 있었다. 반가웠다. 남경로에서 핸드폰 잃어버리거나 짝퉁 사러 온다. 싼 거 좋아한다고 깡패는 없어도 소매치기는 조심하란다. 중국이 기름 음식을 많이 먹는 건 추위를 안 타려고 하는 건데 살이 안 찌는 이유는 차 문화 때문이다. 차를 많이 마신다. 뚱뚱한 사람을 찾아볼 수가 없다.
남포 대교를 지난다. 빌딩 숲에는 나무하나가 없다. 등소평이 직접 썼다는 남포대교 글자를 본다. 남포대교는 그림 그리기 대회에서 한 어린이가 내 마음의 상해를 상상하며 그린 그림을 그대로 다리로 만들었다. 다리가 돌아서 내려가게 설계를 한 건 황푸강과 상해시를 두루 보게 한 배려다.
101층의 하얏트 호텔과 동방명주 타워도 보인다. 바다와 가까워 강우량이 많다. 1990년대 는 고층이 없었다. 한강의 기적처럼 황포강의 기적인가. 상해는 기적이다. 만리장성의 기적인가. 오토바이가 연기가 나지 않는다. 전기로 오토바이가 간다.
상해 건물 디자인은 다 다르다. 한국 돈 560원이 인민 폐다. 1달러에 560위엔이다. 황포동과 황포서로가 우리나라 강남과 강북처럼 나누어진다. 건물들의 유령 같다. 황포강의 달이 어둠이 내리니 달이 선명하다. 6,300만 평, 삼천만 시민이 산다.
중국 한자가 8만에서 10만 단어다. 삼천 개 상용한자를 쓴다. 책 궁력과 주역 책을 권한다. 상고시대 주문왕 팔괘 복희가 생각난다. 주역은 세상 만물이 다 포함된다. 편의점이 보인다. 全家 라고 썼다. 선상식을 위해 둥글게 앉았다. 돌려가는 원탁 식탁에 각자 접시에 덜어 먹는 것이다. 중국 식당은 늘 비닐을 덮어놓는다. 야채를 볶아도 기름이 흥건하다. 그래서 중국인들은 차를 많이 마신다. 유럽식 촛대처럼 환하다.
선상 위에서 보니 야경이 아름답다. 빌딩마다 조명을 켜 화려하고 찬란한 퍼포먼스를 한다. 유람선 서너 대가 관광객을 태우고 돌고 있다. 이만한 조명은 우리 한강도 이런 야경을 연출할 수 있을 것이다. 검은 바닷물 출렁이는 달을 본다. 동방명주타워가 찬란하다. 물이 노랗다. 어둠이 낳은 화려한 풍경들이다. 야경연출을 위해 일제히 등을 밝힌 건물들이 안쓰럽다. 인위적인 아름다움이 작위적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난 달만 쳐다보았다.
7시 30분 항주로 출발, 3시간을 가야 한다. 저 건물들 뒤로 뒷골목은 너무 어둡다. 동방명주는 옥쟁반 위에 진주가 구르는 소리가 좋아 그렇게 옥쟁반 위에 진주가 들어 있는 것으로 만들었다. 그렇게 만들고 나니 중국 고속 증가하여 동방 101층보다 126층자리 빌딩이다. 상해 상징은 동방명주라고 30달러라고 가이드는 권한다. 난 남산 타워를 생각한다. 야경 너머 뒷길과 가는 길은 어둠이다. 가이드는 서커스, 공연, 동방명주 타워 세 가지를 자꾸 강조한다. 옵션 선택 관광이다. 호텔에 닿아 짐을 푼 시간이 근 11시였다. 역시 중국은 넓다 이동시간이 세 시간이다.
절강성에 있는 항주는 중국 7대 옛 수도의 하나다. 아름다운 경치로 인해 예부터 지상의 낙원이라 한다. 토요일 오전 8시 출발이다. 여섯 시 반 모닝콜을 해준다. 호텔 조식을 먹는다. 한겨울 호텔 앞, 차 만드는 붉은 꽃이 피어있다. 남쪽이라 이른 봄 날씨 같다. 영상 2도다. 찐 감자와 찐 자색고구마 방울토마토, 만토우 빵과 커피로 아침을 먹었다.
이번 여행에서 가장 인상적인 곳은 역시 김구 선생님이 활동하던 상해임시정부청사 터를 가 본 것이었다. 현재 상해의 고층 건물들 속에서 소박하고 초라한 사무실에 충격을 받았다. 상해임시정부는 1919년 4월 11일 중국 상하이에 설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전신이다. 김구의 아들 김신 장군이 쓴 회고록‘조국의 하늘을 날다’을 읽어보면 그 당시 독립운동하는 고난과 어려웠던 생활이 나타나 있다.
신천지에 남아있는 유적은 독립운동가들이 자주적으로 운영하는 정부로서 국권 회복과 독립 자주 국가 수립을 목표로 중추적 활동을 벌였던 열악한 현장이었다. 난 경건한 마음이 들었다. 더 하루하루 열심히 살아서 어렵게 일군 우리나라에 어떻게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될까 생각했던 것 같다. 상해하면 늘 김구 선생님이 떠오르고 안창호 윤봉길 등 독립운동가들이 떠올랐다. 1945년 일본의 패망 후 독립이 이루어지면서 상해 임시 정부는 법적 지위와 역사적 성취를 인정받았다.
상해를 떠나면서 나도 모르는 애국심이 가슴속에서 솟아나는 걸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