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가 있는 행성
***아래 글은 월간중앙 취재 의뢰를 받고 쓴 글로 월간 중앙에 발표된 글입니다.
*내 고향은 외계보다 낯설다. 화성엔 오래된 시간 여행을 할 수 있는 곳이 많다. 화성 공룡알 화석지나 융·건릉이나 당성 같은 유적지도 있지만 숱한 생명을 감추고 하루 두 번씩 신비한 모세의 길을 열어 주는 제부도와 물결이 스치고 지나간 자리에 주름이 잡혀있는 갯벌에서 무수한 생명들이 자라는 곳이다. 또한 화성팔경의 절경들도 사람들을 불러들인다.
나는 경기도 화성군 남양면 시리에서 2남 2녀 중 셋째로 태어났다. 반농 반어촌에서 자란 나는 엄마가 새벽마다 굴을 따다 안방 가득 쏟아놓고 굴을 까는 풍경 속에서 자랐다. 갯벌이 안방으로 옮겨온 듯했다. 그 틈에서 둥근 밥상을 펴고 밥을 먹고 그 상에서 공부를 했다. 맛살이나 바지락을 잡아와 늘 집안에선 갯내음이 났다. 바다와 섬과 갯벌들과 산과 들과 오솔길들이 나의 모든 감각을 발달하게 했다. 고향이 나에게 풍부한 시적 감성을 길러 준 것이다.
부모님이 나에게 물려준 유산은 정직과 성실뿐이다. 고향이 내게 준 선물은 자연과 서해의 물결이다. 버스비가 없어 십리 길 넘는 길을 걸어 다닌 짜디짠 가난도 나에겐 더 걷고 더 생각할 수 있는 기회였다. 이른 아침 등굣길을 나설 때마다 비나 눈에 지지 말자고 다짐했었다. 모의고사 때도 입시생 때도 예외 없이 밭에 풀을 뽑고 밥과 쇠죽을 쑤어가며 공부한 건 간절함 때문이었다. 공부가 세상에서 가장 쉽다는 걸 힘겨운 농사와 갯벌에서 노동을 통해 배웠던 시기다. 황톳길을 걸어 다니면서 밤이면 달빛과 별이 친구가 되어주고 들꽃과 새들도 구름도 친구가 되어주었다. 돌보는 이 없이 아무렇게나 자라나 핀 야생화를 들여다보며 사는 동안 꽃 한 번 피운다는 건 스스로 강해지는 일이라는 걸 어렴풋하게 알아가던 시절이었다. 난 그 시절부터 강인한 기질을 가지고 혼자서도 잘 노는 방법을 터득한 것 같다. 영어 단어장을 외우며 다녔던 그 울퉁불퉁하던 길이 그립다. 산을 넘으면 또 산이 나타나고 산을 넘으면 또 산이 버티고 있던 고개들이 내가 살아온 삶의 길이었다. 아버지는 장남인 오빠를 초등학교 때부터 서울로 전학시켜 공부시켰지만 나는 남양 초등학교, 남양 중학교, 남양 종합고등학교(인문반)를 졸업했다. 여자가 무슨 대학이냐고 반대하던 아버지를 어기고 서울로 대학을 가기 전까지 난 내 고향에서 18년을 살았다.
*효심을 심어주는 용주사와 융· 건릉=내게 고향은 어머니다
화성은 효의 고장이다. 효심 지극한 정조의 마음과 정신이 고스란히 깃들어 있는 용주사와 융·건릉을 향해 걸음을 옮겨본다. 늘 역사와 함께 호흡할 수 있는 곳이다. 역사의 숨결을 느끼며 잠시 사도세자의 삶을 되돌아본다. 조선 제21대 영조의 둘째 아들로 태어난 사도세자가 영조 25년 부왕을 대신하여 대리청정(代理聽政)을 하게 된다. 이때 세자는 경종의 죽음과 신임사화에 대한 문제에서 집권 노론(老論)세력을 불신하여 대립하게 되었다. 숙의 문씨, 화완옹주 등의 모략과 참언에 의해 영조의 노여움을 사게 되었다. 급기야 영조 38년 나경언이 윤급, 홍계희 등의 사주를 받아 세자의 비행을 상소하는 고변(告變)사건이 발생하여 사도세자는 영조에 의해 뒤주 속에 갇혀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 것이다. 영조는 세자가 죽은 후 곧바로 자신이 잘못하였음을 알고 세자의 죽음을 애도하며 사도(思悼)라는 시호를 내리고 묘호를 수은묘(垂恩墓)라 하여 경기도 양주 배봉산(현재 서울시 동대문구 휘경동)에 장례(葬禮)했다. 영조가 서거하고 정조가 즉위하자 묘소를 격상하여 영우원(永祐園)이라 하고 천원(遷園)을 하게 된다. 뒤주에 갇혀 죽은 사도세자, 아버지의 넋이라도 위로하고자 정조는 화성의 양지바른 곳에 능을 세웠다. 아버지 사도세자와 나란히 사후에라도 가까이 하고 싶은 마음에 융·건릉을 마련한 것이다. 융릉은 사도세자와 혜경궁 홍씨 합장릉을 말한다. 정조가 지극정성으로 마련한 봉분에는 모란과 국화가 섬세하게 새겨져 있었다. 정조가 심었다는 소나무는 정조의 효심처럼 변함없이 푸르고 울창했다. 정조는 사도세자 아버지를 위해 이곳에서 송충이를 손수 잡았다고도 한다. 사도세자가 불우하게 일생을 마감한 것을 생각하니 마음이 무거웠다. 역사는 현재와 미래를 말해주는 것 같다. 조선왕조를 통해 지금의 권력을 생각하며 건릉으로 무거운 발길을 옮겼다.
건릉은 정조와 효의왕후의 왕릉이다. 한창 발간 중인 정조의 초장지를 둘러보니 정조가 정말 아버지를 그리워하는 마음과 죽어서도 가까이서 함께 있고 싶어한 마음이 전해져 숙연해졌다.
퇴락한 왕릉 위에 서 있자니 문득 엄마 생각이 났다.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바 있는 융·건릉 전역에 빽빽이 들어선 노송에 백설이 덮인 풍경은 머리가 하얀 엄마를 떠올리게 했다. 능을 거닐면서 정조의 효심이 내 심장에 효심의 소나무 한 그루로 옮겨 심어진 것일까.
나에게 고향은 어머니라고 여겨진다. 내게 고향은 내 시(詩)의 자궁이기도 하다. 2012년 새해 계획을 세우면서 나에겐 첫 번 째 순위가 엄마를 많이 보러 가는 것이었다. 그러나 잘 지켜지지 않았다. 늘 삶이 그랬다. 그래도 가끔씩 엄마를 보러 갔다. 고향의 품 안은 어머니의 품이므로 늘 따스했다. 엄마는 키가 큰 식물을 닮았다. 팔순을 바라보는 엄마를 두고 올 때마다 발길이 잘 떨어지질 않았다.
몇 년 전 여름 딸을 데리고 고향집을 갔다가 물끄러미 엄마와 같이 원두막에 앉아 물끄러미 풀밭을 바라보았다. 참 행복했다. 작은 미생물이 죽는다고 수챗구멍에 뜨거운 물도 버리지 못하게 하고 죽은 화분을 가져가면 잘 살려내는 엄마가 요즘 부쩍 기억이 헐렁해졌다. 엄마는 겨울이면 내게 파를 보내왔다. 비료푸대나 빈 박스에 대파를 심어 올려보내 주었다. 그 파를 뜯어 먹으며 겨울을 나고 겨울을 이겨내었다. 그럴 때마다 엄마의 젖은 손에서 나던 파 냄새가 생각났다. 세상에서 가장 좋은 냄새는 사랑하는 이의 숨냄새라고 어느 누가 말했지만 나에게 가장 좋은 냄새는 내 어릴 적 엄마 냄새다. 손에서도 치마에서도 나는 엄마의 파 냄새마저도 좋아했다.
늦가을 파밭,
말라버린 젖꼭지
아직도 땅에 젖을 물리고 있는 파,
곧 무서리가 내릴 텐데,
파는 얇아진 피부 위에
바람을 껴입고 살아온 것일까
까칠해진 존재의 부피만큼
잔뿌리를 내리며
시들어가던 시간 속에서, 파는
짙은 체취를 품고 있다
파는 이제 고요하다
푸른 핏줄 끊임없이 흔들어대던
둥근 몸의 파동도
뿌리 근처에서 멎었다
가만히 파밭의 흙을 거두어내고
젖은 잔뿌리를 들추어보니 파는
제 몸이 흔들릴 때마다
향기를 쟁인다
가슴속의 아픈 생각들을 밤새
하얀 실핏줄로 풀어내고
제 몸의 허공을 채우기 위해
스스로 매운 향기로 맺힌다 (졸시 ‘파밭’ 전문)
그린벨트로 묶여있는 고향 마을도 이농 현상을 겪으며 바로 윗집이 빈집이 되었다. 지난 봄날 엄마와 같이 달래를 캐러 빈집에 간 적이 있다. 사람이 잘 다니지 않는 길이 푸석푸석해 자꾸 발이 흙 속에 빠졌다. 좋은 길은 사람이 많이 밟아주고 많이 다닌 길이라는 엄마 말을 듣고 시의 영감을 얻었다. 그날 캐온 달래를 넣고 엄마가 끓여준 된장찌개 맛을 잊을 수가 없다. 엄마는 맨손으로 뜨거운 된장찌개 그릇을 식탁으로 옮겼다. 나의 여린 살은 장갑을 끼어야만 잡을 수 있는 뜨거운 그릇이었다. 엄마의 손을 가만히 들여다보니 손에 굳은 살이 박혀 있었다. 난 엄마의 굳은 손과 땅의 살이 굳어 좋은 길이 된다는 두 가지를 연결해 굳는다는 것에 대한 사유를 시작하였다. 다시 고향집을 갔는데 엄마가 모과를 주었다. 그런데 엄마가 준 모과를 가져와 책상 위에 두고 무심했는데, 어느 날 모과 향기가 방안을 가득 메웠다. 모과가 단단히 굳어가며 향기가 더 진해지고 있는 것을 발견해 모과란 시를 완성했다.
땅의 살이 굳어지면
길이 된다
많이 밟힐수록
좋은 길이 된다
어머닌 굳은 손으로
뜨거운 냄비나 그릇을 덥석덥석 집어 올리나
난 아직 뜨거운 밥그릇 하나 들지 못한다
굳는다는 건
수많은 길들이 내 안으로 천천히 들어오는 것
책상 위 모과가 굳어가면서
향기가 더 진해지고 있다 (졸시 ‘모과’ 전문)
융·건릉과 멀지 않은 용주사로 차를 돌렸다. 용주사는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의 명복을 빌기 위해 세운 원찰이다. 고즈넉한 분위기 속에 호성전으로 향한다. 호성전은 사도세자 내외분과 정조 내외분 모두 4명의 위폐를 모시고 있었다. 용주사를 둘러보다 고사되어 가는 회양목 한 그루를 만났다. 아버지가 있는 곳은 궁궐과 같은 곳으로 여겨 정조가 직접 이곳에 심은 회양목이라는데 200여 년 버티다가 몇 해부터 병해를 입어 고사 되고 있다니 안타까웠다. 용주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을 보러 발길을 옮겼다. 부모를 향한 마음이 진하게 전해지는 부모은중경이 목판화로 새겨져있었다. 부모은중경을 읽으면 부모를 생각하는 마음이 커진다. 천천히 용주사를 돌아보며 나를 생각하고 내 뿌리와 부모에 대한 은혜를 새기는 시간을 가져본다, 그리고 자주 고향 부모를 뵈러 오겠다고 잘 지킬 수 없는 약속을 또 다짐한다. 고향에서 중고등학교 때 수학여행으로 자주 오던 용주사는 시인 조지훈의 명시인 ‘승무’의 탄생지로도 유명하다. 1938년 당시 조지훈이 용주사 여승의 승무 춤을 보고 그 느낌을 시로 담았다고 한다.
남양에 도착하자 특히 눈에 띄는 건 공장에 종사하는 외국인 노동자들이 늘어 남양시내가 국제화된 느낌이 들었다. 내년 2월이면 제2서해안 고속도로 마도 IC가 개통된다. 화성 시청이 남양에 들어서고 나서 남양은 뉴타운이 개발되고 있다. 아침저녁으로 현대기아 기술연구소 출퇴근 버스 수백 대가 장관을 이루며 남양을 지나가는 풍경이 진풍경이다. 남양 시내와 접한 곳에 요즘 들어 부각 되는 남양성모성지를 먼저 보기로 했다. 남양 삼거리 저 멀리 화성 시청과 내가 다닌 남양 중고등학교가 보이고 남양 시립 도서관도 보인다. 남양성모성지 정류장이 나타난다. 길만 건너면 남양성모성지로 들어가는 입구가 나온다.
남양성모성지는 병인년(1866년) 대박해 때 이름 없이 치명하신 많은 순교자들을 현양하는 순교성지이며, 한국 천주교회에서는 최초로 성모성지로 공식 선포된 곳이다. 복잡한 남양 시내와는 달리 이 성지 안에 들어서니 성모마리아의 숨결과 숲의 평화를 온전히 느낄 수 있었다. 침묵이 주는 힐링을 몸소 체험할 수 있는 곳이었다. 극과 극이 통한다는 걸 알게 해준 곳이기도 하다. 천천히 성지를 걸으면서 차분해지고 편안해졌다. 고요가 위로가 되었다. 눈모자를 쓴 성모마리아 상을 보니 자비로운 어머니의 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내 숨소리와 눈길을 걷는 뽀드득 소리가 소음이 되었다. 설경에 쌓인 이곳에서 빽빽이 솟아난 나무들이 죽은 영혼들처럼 느껴져 엄숙한 분위기를 자아내기도 했다. 심호흡을 크게 하고 가만히 서 있다 보니 내가 살아 있다는 것의 소중함이 온몸에 와 닿았다.
엄마가 싸준 김밥을 들고 달걀을 삶고 사이다 한 병을 가지고 소풍을 가던 길의 추억을 더듬거리며 봉림사로 향했다. 북양동 642 무봉산 자락에 위치한 봉림사 가는 길 양옆으로 펼쳐진 공장지대가 참 아이러니하다. 안산이나 서울 등지에서 이곳 남양에 공장지대가 이전해왔다는 소식은 들었지만 봉림사 바로 아래까지 공장지대가 펼쳐질 줄은 상상도 못했던 일이다. 공장지대를 지나 봉림사에 들어서는 것이 마치 해탈하는 과정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늑하면서도 소담스런 봉림사가 심장처럼 소중하게 여겨졌다. 폭설이 뒤덮인 도량은 더욱 깊고 고요했다. 산등성이가 병풍처럼 포근하게 감싸 안은 도량은 고독해 보였다. 봉림사는 신라 진덕여왕(647~653)때 고구려와 백제의 잦은 침략을 부처님의 위신력으로 물리치고자 창건하였다고 전해진다. 창건 당시 궁궐에서 기르던 새가 절 근처의 숲속에 날아들어 봉림사라고 불리게 되었다. 현재 대웅전과 봉향각, 범종각이 남아 있고, 고려 후기인 14세기에 조성된 보물 제980호인 목조아미타여래좌상이 대웅전에 본존으로 모셔져 있다. 나는 한 해의 소망을 고드름으로 매달아 놓고 도량을 나섰다.
*원효대사가 해골물 마시고 깨달음을 얻은 당성을 가서 고운 최치원을 만나고
제부도로 가는 길에 화성 당성을 들렀다. 고향에 갈 때마다 친구와 등산을 하곤 했던 곳이 바로 당성이 있는 산이었다. 드라마 ‘계백’이나 ‘대왕의 꿈’에서 나온 당항성이 바로 우리 고향 지역의 당성인 것으로 추정되는 곳이다. 당성은 서신면 상안리 산 32번지 일원 21만 1천 595㎡ 부지로 사적 제 217호로 지정되었다. 원래 이곳은 백제 영역이었지만 고구려 당성군이 되었다가 6세기 이후 신라의 영역이 된 후 당나라와의 활발한 교역활동으로 중요 해상무역지로 발달 되었다. 삼국 간의 격전이 한창이던 642년에 백제와 고구려가 합심하여 신라와 당나라의 교역지인 당성을 공격했지만 선덕여왕은 끝까지 당성을 지켜냈다. 둘레가 약 1천 2백 미터, 높이 3미터 규모로 백제시대에 축조된 산성의 흔적과 고려시대 망해루로 추정되는 건물터의 초석들이 남아 있다. 당시 백제와 고구려의 접경 지역이자 중국으로 가는 최단거리 항구였던 당항성을 두고 백제와 신라가 각축전을 벌였고 결국 신라가 이 지역을 점유하면서 이후 삼국통일을 위한 기반을 마련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당시 해상무역의 가장 큰 역할을 했던 곳이다. 그런데 이 당성에 얽힌 이야기가 있어 흥미롭다.
원효대사와 의상대사가 중국으로 불법을 배우러 가던 중 원효대사가 해골물을 마시고 대오각성한 곳도 당성 어딘가로 추정되고 있다. <송고승전>이라는 책에 보면 원효와 의상 대사가 중국으로 가던 중 당주의 경계에 이르러 비가 많이 쏟아져서 토굴에서 잠을 잤고 첫날 달게 자고 일어나 보니 그곳이 토굴이 아니라 무덤이라는 것을 알았다 한다. 둘째 날도 비가 많이 와서 떠날 수가 없어 다시 그곳에서 잠을 자게 되었는데 그날은 귀신에 시달리고 가위에 눌려 잠을 잘 수가 없었다고 한다. 원효대사는 결국 모든 것이 마음의 변화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깨달아 중국으로 가지 않고 경주로 돌아왔다는 내용이 소개되어 있는데 이 책에 나오는 당주가 바로 당시의 당성, 지금의 남양이라고 보고 있다(졸옹집이라는 문집에 남양을 소개하는 글에서 남양의 옛 이름이 당주라고 소개되어 있다). 또한 당성은 고운 최치원의 시를 만날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나, 진성은 신라의 왕이다>라는 장편 서사시집을 쓰면서 책으로 최치원을 만나곤 했는데 여기 고향 당성에 와서 다시 시를 만나니 새삼 감회가 새로웠다. 정계에서 물러난 최치원이 당성에 와서 읊은 시(詩)다.
당성에 나그네로 노닐면서 선왕의 악관에게 주다[旅遊唐城贈先王樂官〕
성했다 쇠하는 사람의 일이여 / 人事盛還衰
실로 서글픈 허망한 인생이라 / 浮生實可悲
누가 알았으리 천상의 곡조를 / 誰知天上曲
바닷가에 와서 연주할 줄이야 / 來向海邊吹
물가 궁전에서 꽃구경도 하였고 / 水殿看花處
바람 부는 난간에서 달도 보았지 / 風欞對月時
반염이라 이제는 모두 끝이 났으니 / 攀髥今已矣
그대와 함께 두 줄기 눈물 흘릴 수밖에 / 與爾淚雙垂『고운집(孤雲集)』제1권「시(詩)」
(반염이란 수염을 붙잡는다는 뜻으로, 임금의 죽음을 뜻하는 말이다.)
당성에서 건너 바라보니 화량진과 대원군의 눈물이 서린 마산포가 보인다. 화량진은 조선시대 중부지역 서해안의 방어를 책임지던 해군기지가 있던 곳이고 마산포는 조선시대 포구가 있던 곳으로 한 말 대원군이 청나라로 나포되어 갈 때 이곳에서 배를 타고 가서 유명해진 곳이다. 두 곳 모두 중요한 곳이나 아직 유적지가 정비되어 있지 않아 볼거리가 없는 것이 안타까웠다.
*나의 바다는 제부도, 오늘도 내 정신의 바다에는 바람이 분다.
화성에도 파도가 친다. 당성을 내려와 제부도 갯벌에 발을 담근다. 하루에 두 번씩 바다가 열리고 닫히는 제부도의 신비한 모세길을 지나며 내 삶의 막힌 길도 이렇게 신비롭게 열리길 소망했다. 물의 고통은 끝이 없기 때문이다. 한편으로는 바닷길도 열리는 내 고향 화성은 미래의 땅이 아닐까 하는 자긍심도 솟구쳤다. 서울에서 한 시간 반이면 닿을 수 있는 곳에 있는 바다라 그런지 평일인데도 찾는 이가 많았다. 바다 위에 조성한 제부도 올레길은 연인들의 데이트 코스다. 예전에는 이 모세길을 이용하여 일부러 애인을 데려와 뭍으로 나갈 수 없는 것을 이용하여 하룻밤에 만리장성을 쌓고 결혼까지 골인하는 경우가 많았단다.
누구나 자기만의 바다를 가지고 산다. 나에게 바다는 고향의 제부도다. 뻘밭에 새겨진 시간의 무늬를 볼 수 있는 곳이다. 물결이 스치고 지나간 자리에 주름이 잡혀있는 갯벌에서 무수한 생명들이 자라는 곳이다. 제부도가 다가오자 나의 심장은 뛰었다. 서해의 일렁이는 파도를 보니 내 영혼도 덩달아 출렁거렸다.
일렁이는 삶이 좋다
고여오는 말들 어쩌지 못하고
따스한 말이 해초로 자란다
언제나 처음 만나는 것 같은
바다만 보면 바다의 갈피 속으로 편입하고 싶은
밀물과 썰물로
제 영혼을 씻은 조개
뻘흙을 입 안 가득 머금고도 푸르디푸른 해조음 사이
바다를 찾아온 흔적이 물결무늬로 새겨지는 소금별 자욱한 밤
누대에서 누대로 흘러온 설레임이 파도가 되어
(졸시 ‘서해에 들다’ 전문)
제부도에서 싱싱한 횟감을 앞에 두고 앉았다. 서해 물고기와 동해 물고기는 맛이 다르다. 서해에서 잡은 물고기는 동해에서 잡은 물고기보다 더 쫄깃하고 탄력이 있고 맛있다. 밀물과 썰물을 하루 두 번씩 견디는 동안 서해 물고기들의 살은 더욱 단단해지고 탄력이 생긴다. 서해 물고기들에겐 밀물과 썰물이 오면 나는 살아야겠다하고 물살에 시달리며 물살을 움켜잡으며 물살에 쓸려나가지 않으려고 발버둥치는 동안 강해진다. 물고기도 긴장하는 물고기가 오래 살고 생명력이 더 강하다. 계곡물에 던진 돌멩이가 물고기를 긴장하게 하듯 밀물과 썰물이 서해 물고기를 긴장시킨다. 가끔 고향에 다니러 와서 궁평리나 제부도에서 먹는 서해 물고기들은 정말 달고 고소하며 쫄깃쫄깃하다.
제부도에서 나서 자란 친구는 ‘바다’ 하면 잡아먹는 생각만 난다고 일요일에도 낚시를 한다. 한 친구는 도시에서 살다 내려와 나무를 심고 나무를 팔며 배 과수원을 한다. 한 친구는 외국 나가 살다가 고향으로 와 송산 포도 농사를 짓는다. 뿔뿔이 흩어져 살던 친구들이 귀향하는 일이 늘어나 고향에 가도 심심치가 않다. 조금만 가면 바다가 있고 산과 들과 시내가 다 있어 먹을거리도 풍부하고 풍경도 아름다운 고향을 떠나선 살 수 없단다. 친구들 모여 술 한 잔 나누며 낚시한 걸로 매운탕을 끓여 나눠 먹는 것이 사는 맛이란다.
제부도 갯벌에선 생태체험과 맛조개를 잡을 수도 있어 어린이들을 위한 가족 단위 사람들이 많이 몰려와 제부도 가는 길가엔 다양한 음식을 맛볼 수 있는 곳이 즐비하다. 친구들과 갯벌에서 맛살조개 잡던 기억이 떠올랐다. 내 시의 영감들을 제부도나 고향에서 얻을 때가 있다. 내 마음의 뿌리엔 늘 고향이 있듯이 내 마음의 풍경엔 늘 고향 바다와 섬과 갯벌과 산야가 들어 있다. 풍경 뒤의 풍경을 보려 해도 늘 부족하다. 빠듯한 일정상 제부도를 나와 다시 고정리로 방향을 틀었다.
*공룡아, 놀자! 국립 자연사 박물관은 공룡의 꿈!
(한반도 최초 뿔 공룡이 발견된 화성시 공룡알 화석지를 가다)
오래된 시간의 여행을 위해 공룡알 화석지를 찾았다. 가는 길에 가수 조용필의 고향집이 있는 송산면 고정리를 지나고 넓은 갈대밭을 지났다. 1994년의 송산면 고정리 산 5번지 시화호 일대 물막이 공사를 통해 1999년 발견된 공룡알 화석산지는 2000년 3월 21일 천연기념물 제414호로 지정되었다. 약 1억 년 전인 중생대 백악기 공룡들의 집단 서식지와 방문자 센터에 들러 공룡알들을 보니 신비롭다. 시간이 거꾸로 흘러 내가 중생대 백악기에 와 있는 착각이 든다, 공룡알 최적층의 독특한 풍경 앞에서 이곳이 강이었다는 것을 짐작하면서 영화 속에서 보았던 공룡이 걸어나와 여의도 면적 두 배에 이르는 이곳을 어슬렁거리는 것 같다. 모래알 위에서 알을 낳는 장면이 순간 떠올라 짜릿했다. 지금까지 12개 지점에서 30여 개의 알둥지와 200여 개의 알 화석이 발견되었고 흔적화석도 다수가 발견되었다. 갯벌 속에 묻혀 있을 공룡알까지 확인된다면 세계적 규모의 공룡알 화석산지가 되는 셈이다. 새삼 내 고향에 대한 자긍심과 함께 내 고향에 대해 알아간다는 것이 나의 정체성을 알게 해주는 좋은 기회로 여겨졌다. 소중한 시간 여행을 하는 순간순간이 행복했다. 그대로 보존되어있는 시화호 간척지가 보인다. 시화호 간척지 사업으로 생업의 터전이던 어장이 사라지고 농사만 짓게 된 부모님이 떠올랐다.
국립 자연사 박물관 유치를 바라는 공룡의 꿈을 가진 고향 친구들과 함께 공룡알 화석단지를 둘러보며 대자연의 앞에서 나는 새삼 겸손해졌다. 자연의 위대함과 소중함을 뼛속 깊이 느꼈다. 자연유산인 갯벌과 다양한 동식물생물보고와 천혜의 자연환경을 가진 가치를 보니 국립 자연사 박물관이 들어설 최적지로 여기만한 곳이 또 있을까 여겨졌다. 갯개미취, 꼬마부들, 칠면초, 갯방동사니, 퉁퉁마디, 해홍나물, 범부채, 갯보리사초, 산조풀, 청설모, 너구리, 고방오리, 고라니, 멧토끼, 꿩, 중대백로, 황로, 청둥오리, 황오리, 수리부엉이, 검은머리물떼새, 쇠오리, 딱새, 말똥가리, 쇠백로, 흰뺨검둥오리, 황조롱이가 시화호에 서식하는 동식물들이라니 시간이 되면 자주 와보고 싶은 고향이었다. 저 멀리 화성 유니버설 스튜디오가 들어설 부지가 보인다.
*노을만 봐도 눈물이 나던 궁평리 낙조를 다시 가보다
누군가가 바라봐주면 죽어있던 풍경들이 살아난다. 풍경도 볼 때마다 변하기 시작한다. 풍경 속에는 많은 사연과 이야기와 감정이 배어있다. 풍경이 세계를 발명하기도 한다. 난 내 고향의 아름다운 풍경들 속에서 영감을 받아 시를 썼다.
서해안의 낙조는 가슴 깊숙한 곳에서 살아있다는 행복과 아름다움을 느끼게 한다. 크고 작은 섬들이 많은 화성의 해안가는 그리운 휴식처가 되어준다. 궁평리의 노을은 또 다른 날의 시작을 설레게 한다. 특히 궁평리 노을을 바라보면 표현할 수 없는 문장이 있음을 절감한다. 다만 붉은 태양의 불덩이가 내 영혼의 바닷속으로 풍덩 빠지는 말의 둥근 혓바닥을 쓱 닦아내며 난 열정적인 삶의 자세를 배웠다. 내 빈곤한 삶터 어디에서도, 내 피로한 길 위에서도 난 허기진 저녁, 노을을 보면 눈물이 나곤 했다. 아마도 고향과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밀려오기 때문일 것이다. 100년도 더 된 노송들이 해풍에 견디며 장관을 이루는 것을 보며 세상에 스스로만이 스스로를 책임질 수 있다는 걸 주경야독한 대학시절부터 어렴풋이 알았던 것 같다. 궁평리는 옛날 궁에서 관리한 땅이 많아 ‘궁평’ 혹은 ‘궁들’이라 불리게 되었다. 궁평리에 위치한 해안 유원지는 수도권 일일 관광 휴양지로서 해송과 모래사장이 어우러진 곳이다. 남양, 사강, 서신을 지나 궁평리 관광어촌 휴양지에 닿으면 곳곳에 천일염전들이 눈에 들어온다. 전형적인 농·어촌의 전원풍경을 한눈에 볼 수 있다. 손님이 오거나 친구가 오면 가끔 궁평리로 데려온 적이 있었다. 드라이브를 나온 연인들도 눈에 자주 띄었다. 궁평리 해안유원지는 길이 2㎞, 폭 50m의 백사장과 수령이 100년이나 된 해송 5천여 그루가 한데 어우러져 한 폭의 동양화 속에 들어온 느낌이 든다. 만조시에는 하루 2시간 이상 해수욕을 즐길 수 있고, 간조시에는 약 2km의 뻘이 형성되어 서해 특유의 갯벌 체험을 할 수 있는 곳이다. 20㏊의 조개 채취장에서는 직접 조개잡이와 바다낚시를 겸할 수도 있다. 궁평리 낙조는 화성 8경 중 4경에 꼽히는 절경이다. 선착장에서 농어, 우럭, 굴, 꽃게 등을 구하여 시원한 해물잡탕을 맛볼 수 있는데 별미다. 저녁 썰물에 물고기도 바다로 돌아가는 시간, 어두워지는 숲으로 새들도 날아가고 사람들도 집으로 돌아간다.
*화성은 한국근대음악의 산지(産地)-홍난파 생가에서 고향의 봄을 느끼다
아담한 마을을 돌고 돌아 설국 위에 세워진 작은 초가집이 바로 우리나라 현대음악의 여명기를 개척한 난파 홍영후(1898~1941년)의 생가라니 너무 소박하다. 홍난파는 1898년 3월 19일(양력 4월 9일) 화성군 남양면 활초리(活草里)에 있는 한 농가에서 대대로 이 집에서 살아온 남양 홍씨 23세손 홍순(洪淳)의 2남 2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난파는 어린 시절 고향에 있는 글방에서 한학(漢學)을 배우다 7세경 서울로 이주를 했다. 현재의 생가 건물은 당초 멸실되었던 것을 1986년에 복원한 것으로 목조 초가 4칸의 ‘ㄱ’자형 구조였다. 방 2개와 부엌으로 단촐하게 구성된 집에는 아담한 마당이 딸려있고 건물 처마 밑으로 난파의 초상화와 생전에 사용했던 유품을 찍어놓은 사진 몇 장이 걸려 있었다. 초가집 위로 <고향의 봄 꽃동산 조성사업계획안>이 마련되어 있어 그나마 앞으로 기대가 모아졌다. 바람이 불고 손발이 얼어붙자 ‘고향의 봄’이 그리워졌다. ‘고향의 봄’ 가락을 콧노래로 불러보는 것만으로도 훈훈한 온기가 올라오는 듯했다. 홍난파는 1920년 「봉선화」를 작곡하였다. 1998년 북한에서 발간된 『조선음악명인전』을 보면 <봉선화>의 창작 배경에 대한 글이 있다. “1920년 고향 화성을 찾아갔는데, 어릴 때 소꿉동무였던 ‘봉선이’란 처녀가 방직공장 여공으로 팔려 가게 되었다. 봉선이는 홍난파가 왔다는 소리를 듣고 떠나기에 앞서 인사를 하러 찾아와 마지막으로 바이올린 소리를 듣고 싶다고 말했다. 홍난파는 빚값으로 팔려 가는 그녀를 위해 지난날을 추억하는 듯 슬픔을 담은 감정과 현실에 항거하듯 불타는 분노를 안고 몸부림치는 즉흥곡을 연주하였다. 봉선이를 떠나보내고 난 다음 연주했던 그 곡을 오선보에 옮겨 놓으면서 <애수>라는 제목을 붙였다. 봉선이의 가련한 운명이 이 땅의 수많은 봉선이들의 불행한 운명이자 나라를 잃은 민족의 설움이고 비운이라는 생각이 치밀어 그러한 민족의 슬픔을 담은 곡조라는 뜻에서였다. 김형준은 작곡가의 창작 동기와 체험담에 기초하여 이 곡에 가사를 지어 붙이면서 제목을 <봉선화>라 하였다 한다. 이 이야기의 진위 여부를 떠나 북한 주민들에게 ‘화성은 홍난파의 고향이자 민족의 혼을 담은 명곡 <봉선화>의 탄생지’로 알려져 있는 것이다.
1941년 8월 지병인 늑막염이 악화되어 43년간의 길지 않은 생을 마쳤다. 작품으로는 봉선화, 성불사의 밤, 옛 동산에 올라, 달마중, 낮에 나온 반달 들이 있다.
고향에서 하룻밤을 잤다. 폭설이 내린 지붕 아래 제부도의 파도를 덮고 잤다. 일어나 보니 폭설에 길이 미끄러워 차를 몰기가 두려워졌다. 이를 어쩌나, 아직도 가볼 만한 곳이 많이 남아 있어 난감해졌다. 미공군의 끊임없는 폭격훈련으로 55년간 주민들의 피해가 컸던 매향리와 ‘나는 왕이로소이다.’를 쓴 노작 홍사용 시인이 묻힌 묘역과 기념관을 보고 싶었다. 또한 일제 강점기 때 일제가 보여준 만행 현장인 제암리 3·1운동 순국유적지를 가려던 계획이 폭설에 감금되는 지경이 된 것이다. 그뿐만인가. 사람들을 부르는 곳으로 화성에서 놓칠 수 없는 입파도와 국화도가 있는데 졀경을 볼 수 없게 가로막는 하늘이 야속했다. 피서객이나 낚시꾼들에게 인기가 많은 붉은 홍암의 입파도와 서해에 국화꽃처럼 떠 있는 국화도에 대한 마음을 졸시로 대신하려한다.
쉽게 가라앉지 않는다
평생 짠물만 들이키며 산 내공이 만만치 않다
풍랑 따라 이리저리 흔들리지 않고
자신의 의지대로 살아간다 부족한 대로 살아간다
제 몸이 깎이면서 절벽을 만들고
적당히 슬퍼지면서 계절이 늘 스쳐지나가도
바다가 해일을 몰고 와 떠밀어도 갈 곳이 없다
바다는 나의 전부, 나의 세계, 나의 시
몰락이 아름다운 바다를 떠날 생각이 없다
난파당한 자들, 야만인들, 해적들, 약탈자들이 몰려와도
붉어지는 바다 속이 따뜻해
파랑 높은 파도가 치면
섬의 아랫도리는 묘한 간지러움에 생기가 피어올라 (졸시 ‘섬’ 전문)
돌아오는 길에 동창들을 만나러 갔다. 제부도에서 잡은 낚지볶음을 먹고 나면 다음날 오줌발이 달라진다는 동창의 말이 웃음꽃을 피우게 한다. 포도가 익어가는 계절이 오면 송산포도 축제가 벌어지고 친구는 송산포도를 보내 줄 것이다. 이국적인 풍광을 자랑하는 전곡항의 세계 요트대회 축제가 벌어지는 유월이 오면 나에게 바다는 또 기별을 보낼 것이다. 고향에 좀 다녀가라고 성화를 부릴 것이다. 제부도 바지락 축제가 시작되면 바지락 칼국수를 먹으러 다시 걸음 할 것을 기약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