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광석 콘서트 뮤지컬을 다녀와서
문우가 김광석 노래 뮤지컬 콘서트 가자고 제의를 해왔다. 두 시간 공연이다. 평일 공연 감상은 귀가가 늦어 토요일 낮 공연을 원했다. 마침 토요일 오후 3시 자리가 있었다. 첫눈이 온 뒤 금요일 거리가 얼어붙었다가 토요일에는 겨울비가 잠시 왔다. 김광석을 만나러 가는 가슴이 촉촉해진다. 오늘 뮤지컬 제목이 ‘바람으로의 여행’이다. 나는 추억으로 여행을 나서는 길인데 제법 바람도 불었다. 김광석은 나와 같은 64년생이다. 나는 지금도 살고 있지만 김광석은 31살에 우리 곁을 떠났다. 당시 포크송, 기타 하나 들고 그렇게 좋은 노래를 부르며 인기가 있던 가수가 왜 죽음을 선택한 걸까. 한창 뜨거워야 할 청년이 왜 삶을 포기한 걸까. 당시 삼풍백화점이 무너진 것도 미스터리요 김광석 가수가 죽은 것도 미스터리다. 우리 삶에는 수많은 미스터리가 존재하므로 미스터리는 미스터리로 남겨두기로 한다.
83학번 성균관 대학교를 다닌 나에게 대학로는 산책길이었다. 참으로 오랜만에 와보는 대학로다. 젊은이들이 삼삼오오 모여 걷는다. 연말이 오고 있음을 느낀다. 거리에서 파는 붕어빵 냄새도 대학 시절 배고픔을 떠오르게 했다.
대학로 스튜디오 블루를 찾아가는데 간판들이 낙엽들처럼 나부낀다. 하도 간판이 많아 찾기가 힘들었다. 일본을 갈 때마다 간판이 단순하고 작은 것이 인상적이다. 뮤지컬 형식을 빌려 김광석 노래로 들을 수 있다면 이정도의 길 찾기 고생은 즐거움이라 여겼다.
가끔 싱어게인이나 라디오에서 김광석 노래를 들으면 하던 일을 멈추게 된다. 역시 좋은 노래구나 고개를 끄덕인다. 왜 지금 나오는 노래들은 저렇게 심금을 울리지 못하는 것일까 하는 의문도 들었다.
입구는 한산했다. 들어서니 아담한 작은 소극장에 이미 사람들이 가득 차 있다. 그런데 인상적인 것은 관객들이 중년 이상이다. 이들도 나처럼 그리움을 찾으러 왔구나. 젊은이는 보이지 않았다. 머리가 흰 남성분들도 많이 눈에 들었다. 좌석에 앉아 핸드폰을 끄고 곧이어 공연이 시작되었다.
서인대학교 바람밴드가 등장하고 이풍세 역의 김소년이란 바람밴드의 메인 보컬의 목소리가 단단하고 짱짱했다. 고등학교 때부터 김광석 같은 가수의 꿈을 키운다. 서인대학교 바람밴드의 리더 퍼스트 기타 김상백 역 강철도 기타 연주가 수준급이다. 특히 한겨레역의 서인대학교 94학번 정치외교학과 바람밴드 퍼커션, 학생운동에 관심을 가지고 참여하는데 나의 학창시절이 떠오른다. 그 시절 명륜동 성균관대학교 입구부터 체류탄을 날마다 맞았다. 수업도 휴강이 많았던 시절이었다. 가슴을 저미는 노래와 이야기가 이어져도 관객들의 표정과 몸짓은 무겁고 조용했다.
나는 따뜻한 소극장이 마치 간이역에 닿아 잠시 내린 것 같았다. 한 걸음 한 걸음 노래의 바퀴에 몸을 싣고 나는 조금씩 마음이 열렸다. 중간부터 나도 모르게 박수를 쳤다. 누군가도 쳤다. 한때 우리와 같은 시대와 세상을 위로하던 노래 앞에서 하나가 되어갔다. 어떤 예술보다 노래의 힘이 강하다는 걸 새삼 느꼈다. 노래는 영원하였다. 김광석이 그리웠다. 아니 나의 젊음이 그리웠다. 다시 푸른 대학시절로 돌아가고 싶었다. 다시 선택하고 싶었다. 많은 노래가 스토리 텔링을 입고 날았다.
사랑이라는 이유로(김형석 글 곡), 너에게(김형석의 글과 곡), 그녀가 처음 울던 날(이정선 글과 곡), 맑고 향기롭게(노영심 글과 곡), 내 사람이여(백창우 글과 곡)부치지않은 편지(정호승글 백창우곡),사랑했지만(한동준 글과 곡),곡들도 좋았지만 아래와 같은 곡은 나를 추억으로 데려가 주었다.
어느 60대 노부부의 이야기(김목경 글과 곡)에서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다. 오년 전 85세 엄마를 보낸 생각도 났다. 여전히 엄마 없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배우지 못하고 나는 살고 있다. 엄마 생전 엄마가 해주던 김치, 된장, 고추장, 간장 없이 살고 있다. 엄마가 해주던 고춧가루, 들기름, 참기름도 사서 먹고 있다.
이등병의 편지(김현성 글과 곡)를 노래할 때 뜨거운 눈물이 다시 터졌다. 아들이 강원도 삼척으로 군대 간 시절이 떠올랐다. 노래를 통해 다시 그 시간을 만났다. 미안한 것이 아들에게 많았다. 면회도 한번 가보지 못했다.
거리에서(김창기 글과곡)를 들으며 수묵화 한 편을 보는 듯 먹먹햇다. 바쁘게 지나온 거리의 풍경들, 난 올해 2월 퇴직을 했다. 근 40년을 일터에서 보낸 세월이다. 19세 대학 들어와 20세부터 알바로 시작해 등록금과 서울 생활비를 벌어야했다. 결혼해서도 두 아이 키우며 내내 일을 해야했다. 딸아이는 이제 나의 부모가 되어가려는지 잔소리가 늘어나고 나를 아기 취급할 때도 있다. 디지털을 배우지 못한 디지털 문맹의 설움이랄까.
잊혀지는 것(김창기 글과 곡)이란 노래가 나올때는 퇴직하면서 살아서 겪는 장례식처럼 세상에서 잊혀지는 걸 실감한다. 명함첩을 정리하고 핸드폰 속 주소록 전화번호 거래처도 지워버린다. 잊혀지는 걸 받아들이며 대신 25년 퇴직 후 두 가지 도전을 했다. 하나는 기후환경에 관한 시를 써 공모전에 내는 것이고 하나는 수영을 배우고 동네 산 둘레길을 걷는 것이었다. 3월부터 6월 말까지는 도서관과 환경 보호 활동을 하고 시를 썼다. 그리고 날마다 산둘레길을 걸었다. 둘레길을 걸으며 개똥수거 캠페인도 벌였다. 7월부터 10월까지 4개월간 자유형과 배영을 배웠다.
바람으로의 여행 (글 이지상 곡 최영길,)노래를 들으며 올해 나를 위한 선물로 다녀온 여행 두곳이 떠오른다. 5월에 사진반 글쓰기 강연을 쉬고 두바이를 딸과 다녀왔다. 사막은 바람이 많은 곳이다. 두바이는 워낙 돈이 많은 나라인지라 건물 안에 에어컨이 다 작동하고 역을 가든 쇼핑센터를 가든 호텔을 가든 연결되어 있어 시원하고 깨끗했다. 딸이 일본의 음식과 일본의 정갈함을 좋아한다. 11월 말 오키나와를 다녀왔다. 태평양의 에메랄드빛의 깨끗한 바다와 아침저녁 온천에 몸을 담근 휴식이 힐링이었다. 올해는 이제 한 달도 남지 않았다.
변해가네(김창기 글과 곡)를 통해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은 없을 것이다. 사람의 마음도 우리의 몸도 관계도 다 변해간다. 사랑도 시간 앞에선 변해 간다.
그대가 기억하는 나의 옛모습(한동준 글과 곡)과 그날들(김창기 글과 곡)노래가 소극장을 울릴 때 난 한 선배 생각이 났다. 첫사랑이 연락이 오면 만나지 말 것을 권한다. 선배는 첫사랑이 연락 와 고민하다가 퇴근 후 먼 시골까지 찾아갔다. 막상 가보니 너무 아팠다. 늙고 고생한 얼굴과 살찐 모습이 슬프더란다. 그날 양주 한 병을 다 마시고 다음 날 출근을 하지 못했다고 들려주었다. 머릿속 푸릇하고 가녀린 그녀가 사라졌다고 만나러 간 것을 후회하였다.
서른즈음에(강승원 글과 곡)에 나는 이미 두 아이의 엄마가 되어 있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신혼부부이던 오빠네 작은 아파트에서 학교를 다녔다. 졸업 후는 있을 곳이 없어 결혼을 한 경우다. 준비가 안 된 결혼은 시댁 시집살이로 시작했다. 다시 24살이 된다면 난 결혼은 하지 않을 것이다. 서둘러서 결혼하지 않을 것이다. 나의 청춘이 없었다. 내가 없었다. 취미도 없었다. 육아와 시집살이와 일이 전부였다. 늙어서 혼자되는 두려움으로 결혼을 하지는 않을 것이다.
l 흐린 가을하늘에 편지를 써(김창기 글과 곡)와 일어나를 앵콜곡으로 들으며 모두 일어나 박수를 치고 김광석을 다시 고마워했다. 남겨진 그의 노래의 여행을 통해 나를 돌아보게 했다.
김광석 길이 생겼지만 아직 가보지 못했다. 가보고 싶어졌다. 김광석 길은 故 김광석이 살았던 대봉동 방천시장 인근 골목에 김광석의 삶과 음악을 테마로 조성한 벽화거리다. 2010년 ‘방천시장 문전성시 사업’의 하나로 방천시장 골목길에 11월부터 조성하기 시작한 김광석 길은 중구청과 11팀의 작가들이 참여하였다한다. 350m 길이의 벽면을 따라 김광석 조형물과 포장마차에서 국수 말아주는 김광석, 바다를 바라보고 있는 김광석 등 골목의 벽마다 김광석의 모습과 그의 노래 가사들이 다양한 모습의 벽화로 그려졌다하니 기대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