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려움을 배우는 중입니다

-기술의 빛과 인문의 그늘 사이

by 안명옥

요즘은 속도가 지배하는 세상이다. 하루게 다르게 인공지능이 생활 속에 파고든다. 인공지능을 모르면 손해인 것도 같고 세상에서 밀려나는 느낌이다. 속도를 숭배하는 이면에는 공포가 있다. 모든 재빠름은 그래서 슬프다. 모든 속도가 두렵고 슬프다.

한 문우는 유튜브를 만들어 풍경과 문학기념관을 소개하고 있다. 지난해에는 성인 사진반에서 글쓰기 강의를 일 년간 했다. 시니어 모델을 하는 제자는 가사를 적어 인공지능이 작곡한 노래를 다양한 버전으로 보내온다. 지인 중에는 주부로 지내며 취미로 글쓰기를 해서 책으로 펴내는 곳에 등록 후 자신이 쓴 글을 인공지능의 도움을 받아 벌써 여러 권 그림 디지털 북을 펴냈다. 시도 소설도 인공지능이 써내고 있다. 누구라도 작가가 되고 있다. 앞으로는 회계사나 변호사들도 인공지능이 대체할지도 모른다. 한 친구는 문화센터에서 10년간 갈고 닦은 자신의 노래를 유튜브 한다. 또 다른 친구는 라틴댄스 10년을 배우고 유튜브를 준비 중이다. 나 역시 수영을 배울 때 유튜브에서 자유형과 배영 익히는 데 도움을 받았다.

인플루언서 광고나 인플루언서 협찬, 인플루언서 체험단 등 다양한 채널을 통한 인플루언서 마케팅이 대세다. 누구나 도전하면 실제 경험과 신뢰에 기반한 인플루언서가 될 수 있는 세상이 되었다. 영향력 있는 인플루언서도 탄생하고 수억의 수입을 올리는 메가급 인플루언서도 스타처럼 태어난다. 브랜드와 소비자 사이를 연결하는 공감과 신뢰를 바탕으로 한 전략적 소통 수단으로 대세가 되고 있다.

그래도 나는 빠른 세상에서 느린 마음으로 버틴다. 여전히 종이 신문을 사랑해서 아침마다 조간신문을 만져보며 펼쳐보고 읽고 있다. 젊은 벤처 백만장자 탄생 소식이 나올 때마다 나와는 상관없는 세상의 소식인 양 내 마음을 붙잡지 못한다. 나는 여전히 연필을 깎아서 원고지에 시 쓰기도 하고 종이책을 읽는데 전자책으로 바꾸는 문학 잡지들도 늘고 있다. 하루가 다르게 디지털 세상의 신조어들이 쏟아져 나와 어리둥절해진다. 기술의 파도 앞에서 드는 작은 두려움과 반감이 든다. 속도의 시대 앞에서 나는 인문을 붙잡는다. 디지털 시대에 인문은 어떤 힘이 될까.

기업은 왜 인문학적 소양을 요구하는 걸까. 아이패드를 런칭하던 2010년 스티브 잡스는 –기술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사실이 애플사의 DNA에 박혀있다. 기술과 인문학이 결합했기에 우리의 마음을 울리는 결과가 생겨난 것이다.-라고 했다. 상상력이 반복되는 삶에서 창조성을 발휘하게 하듯 인문학적 소양은 새로운 답을 만들어가는 것을 위한 기본적인 힘을 갖게 한다. 이런 디지털 세상에 주눅만 들어간다. 씩씩하게 버텨오던 나 자신이 위기감을 느낀다. 평소 기계에 대한 거부감을 가졌던 나는 두려움을 떨쳐버리고 디지털을 익히고 있다.

사르트르는 -인생은 B와 D사이의 C다. 인생은 삶(Birth)과 죽음(Death) 사이의 선택(Choice)의 연속이다.-라고 했다. 삶은 매 순간 선택을 해야 한다. 공룡이 멸망한 것도 새로운 시대에 적응하지 못한 탓이다. 이렇게 매 순간 선택을 하는 데 있어서 인문학은 나의 통찰력과 안목을 키워준다.

이런 인문학을 하는데 가장 좋은 방법은 독서인데 한 선배는 노안이 와서 책을 멀리한다고 했다. 친구도 책을 다 버리고 집에 기타 방을 만들었다고 한다. 어느 집에 가면 나는 책부터 보게 된다. 그 방에 있는 책이 마치 그의 영혼 같아서다. 유명한 배우네 집에 가보니 있을 건 다 있는데 책 한 권이 없더라는 인터뷰기사가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다.

아들 결혼을 앞두고 누수가 되는 아파트를 냉온수관 교체부터 도배장판까지 리모델링을 했다. 방 사면에 가득 들어찼던 책을 중고 서점과 시집 박물관에 보내고 제자와 문우들에게 책을 나누어 주었다. 그래도 100권 정도는 책을 남겼다.

나는 지금 두려움을 배우는 중이다. 인터넷을 처음 배울 때처럼 낯설다는 것은 두렵다. 낯선 동네, 낯선 나라, 낯선 언어 앞에서는 주눅이 든다. 익숙해지면 동네도 나라도 언어도 두렵지 않듯 디지털도 익숙해지려 노력 중이다. 디지털 문맹은 디지털 교육을 받지 못한 세대다. 무인 카페에 들어가 키오스크 앞에서 작아져 커피 한 잔 마시는 걸 포기한 적도 있다. 그래도 아날로그 인간으로 생활하던 삶의 패턴이 바뀐다. 식당 메뉴 주문이나 병원비, 주차비를 무인 정보 단말기로 정산할 정도는 되었다.

속도가 마음을 앞질러 갈 때 수많은 정보가 쏟아지는 세상에서 외려 지식을 버리고 지혜만 쌓으며 균형을 잡아가는 인문학의 필요성은 더욱 절실해진다.

초교 동창은 인공지능 탑재된 핸드폰 하나로 메모부터 녹음 등 회의록을 대체하고 인공지능 네비게이션, 맛집 안내를 받는다. 사업상 도움을 받는 인공지능을 비서처럼 사용하고 있다. 디지털 혁명이라며 나에게도 인공지능 사용을 권한다. 책 한 권이면 하루를 보내는 나는 여전히 아날로그의 삶의 방식을 사랑한다. 네비게이션을 믿지 않고 초행길 헤매면 헤매는 대로 가보지 않은 길도 가보고 새로운 길에서 만나는 맛집 기쁨도 누린다.

발품을 팔지 않고 간단한 클릭, 만으로 쇼핑을 하는 사람과는 다르게 나는 현장에 가서 장을 본다. 옷도 직접 입어보고 사는 편이다. 디지털 세상의 이방인 같다. 카뮈의 이방인 중 뫼르소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라는 공동체에 속하려면 우리는 같은 것을 공유해야만 한다. 그래서 우리(공동체)는 이방인(차이와 다름)을 경계하고 추방하려한다. 하지만 이방인(차이와 다름)이 있어야 성립될 수 있다.-

우리가 인문학을 해야 하는 이유도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자세를 가져야 하기 때문 아닐까. 기술만으로 충분한 세상일까. 빠르게 돌아가는 세상에서 느리게 흔들리는 나를 발견한다.

제시간을 놓쳐 버린 프로그램을 원하는 시간에 다시 볼 수 있는 점은 편리하다. 요리가 막힐 때 인터넷 요리사가 해결해주어 솜씨가 부쩍 늘었다.

지인이 완판된 내 시집을 구할 수 없냐고 하기에 다시 출판하기는 부담스러워 대신 인스타그램과 페북을 이용하고 있다. 완판된 시집 속 시들을 한편씩 페북과 인스타그램에 소개하고 있다.

앙리 베르그송은 ‘시간은 측정 단위가 아니라 삶을 경험하는 방식이다.’라고 했다. ‘즉 남들이 만든 24시간 내에서 나를 통제하는 표준시간을 버리고 나서야 진정으로 나의 시간을 경험할 수 있었다. 그제야 나는 나의 시간을 살 수 있었다.’라고 한다.

스스로 창의적인 생산을 하는 사람들은 절대적인 자신만의 시간이 필요하다. 이들에게 진정한 파이어족이란 경제적 자유를 넘어 자신이 하고 싶은 창의적인 시간을 자유롭게 가지는 것일 것이다. 80이 되어도 현역에서 창작이든 그림이든 사진을 찍는다. 예술에는 정년이 없다는 사실이 다행이다. 90세까지 산다고 가정해도 앞으로 30년을 놀며 살기에는 지루하다. 열심히 일한 뒤 주어지는 휴가가 달콤한 법이다. 그래서 다시 일을 시작했다. 새로운 세계와도 조우다. 일터인 일상에서 시를 건져 올릴 수 있어 설레인다.

퇴근 버스를 타거나 지하철을 타면 하루의 고단함을 핸드폰을 들여다보며 영화를 보거나 인스타그램을 보거나 틱톡 같은 곳에서 숏폼을 보는 이들이 눈에 들어온다. 사유하거나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질 수 있는 시간을 살지 못하는 건 아닐까. 나는 지금 잘 살고 있는가?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되는가? 가끔 자신에게 질문을 던져주자.

저녁상을 물리고 책 대신 누군가는 리모컨 하나로 하루를 마감한다. 누구는 핸드폰을 잠자리에서도 들여다보다가 잠든다. 컴퓨터 등대가 이끌어주는 대로 따라가다 보면 그의 속도와 그의 전 존재를 실감한다. 자야 할 시간을 놓쳐 수면사이클이 깨져 잠들기 힘들어질 때도 있다.

이메일도 편리하지만 한 자 한 자 정성을 들여 쓴 편지를 우체국까지 걸어가 부치고 돌아올 때의 뿌듯함이 다시 그리워진다.

신문 역시 종이 냄새를 맡아 가며 집까지 배달해준 배달원의 손길을 느끼며 천천히 자세히 읽는 맛을 어떻게 인터넷신문과 견줄 수 있을까. 서점에 가서 이책 저책 뒤적여보고 도둑글도 읽어보고 책을 사는 이들도 만나고 돌아올 때 사 온 책이 더욱 정이 가고 다 읽게 되는 힘이 된다. 아무리 디지털 세상이라지만 디지털이 해결해줄 수 없는 영역이 많다는 것을 느낀다.

자고 일어나면 세상은 저만치 달려가 있다. 디지털 혁명은 산불처럼 확산 중이다. 로봇은 우리 삶을 바꾸고 있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나에게 손짓하는 디지털 밖의 친구들의 정감 어린 눈빛을 그리워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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