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안성 5주차 만인보 아카데미 참관기>
‘어떻게 시를 살아야 할까’를 배우다
안명옥(시인)
《시와소금》에서 연락을 받았다. 만인보 5주(11월 14일 토요일)차 아카데미를 참관해 달라는 것이었다. 이번에는 《시와소금》의 날로 정해 함께 하는 모양이었다. 나는 잠시 망설였다. 어느 하루 시간을 내어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게 그리 쉽지만은 않은 나날들이다. 하지만 나는 기꺼이 길 나설 채비를 갖추었다.
얼마 전 《시와소금》 <혀> 출판기념회 및 시상식에서 만났던 시인들도 다시 보고 싶어졌고, 고은문학연구소장으로서 ‘만인보 아카데미’를 주관하는 김완하 시인과의 인연도 나를 이끌었다. 김완하 시인은 2002년 《시와시학》제1회 전국신춘문예 공모전에서 예심을 맡아 나를 뽑아주신 분이다.(예심은 김완하, 박주택 시인, 본심은 정희성, 이가림 시인이었다.)
물론, 가장 센 인력으로 나를 끌어당긴 건 고은 시인의 ‘시와 삶의 거처’를 직접 느껴본다는 사실이다. 고은 시인께서 시집 『만인보』를 통해 말씀하시는, ‘민중 서사의 따뜻한 궤적’도 귀감이지만, ‘나의 문학은 세상을 구하기보다 나 자신을 구하기 위해 씌어졌다’는 고백이 그 못지않게 내겐 공감이 되었다. “사람은 사람 속에 있을 때 사람이다”라거나 “올라 갈 때 보지 못한 꽃 내려갈 때 보았다”는 통찰의 한 말씀 또한 나를 이렇게 멀리까지 움직이도록 하는 힘의 원천이 되었다.
게다가 아카데미 5주 강의는 김승희 시인과 유홍준 시인이었다. 김승희 시인의 시집 『달걀 속의 생』등과『33세 팡세』, 『남자들은 모른다』같은 산문집을 읽으며 나는 시인이 되고 싶어졌다. 그렇게 책으로만 만나 뵙던 김승희 시인을 가까이서 뵐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 것이다.
생각해 보면, 삶이란 관계인 것만 같다. 잘 산다는 것도 이웃이든 동료든 가족이든 친구든 관계가 좋은 생활인 것 같다. 내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관계가 내 삶을 만들고 있다. 오늘도 인연이 길을 나서게 만든다. 금요일 내내 가을비가 내리더니 토요일 아침은 날이 개었다. 단풍잎이 떨어진 풍경이 마음을 차분하게 해준다. 단풍잎들이 마치 바닥에 색색깔로 쓴 연서 같기도 하고 붉은 융단 같기도 하다.
자연의 이치를 알면 시의 이치도 인간 삶의 이치도 알 수 있게 된다. 가을비가 내릴 때마다 나무는 제 욕망을 내려놓고 있다. 나무는 다시 재생과 봄을 위한 긴 잠에 들 것이다. 날마다 죽고 아침이면 깨어나는 우리 인간들과는 달리 나무는 소멸 앞에서 저렇듯 붉게 제 존재를 허공에 표현하고 있다.
아침 아홉시 반 출발하여 서둘러 내려가는데 길이 막혔다. 끝없는 삶의 행렬들이 길게 늘어서 있다. 주 5일 근무로 주말이면 집을 벗어나 어딘가로 떠나는 사람들이 늘어난 모양이다. 길들은 자꾸 생겨나고 있다. 안성으로 가는 길은 멀어도 새로운 만남의 예감이 나를 설레게 한다. 만남은 새로운 세계와의 조우가 아니던가.
오후 한 시 안성시 대림동산길 고은 선생 거처 부근에 도착할 수 있었다. 조용한 공원을 걸어갔다. 지금 내가 가을을 살고 있구나 싶었다. 예식장을 지나는데 문득, 오늘 강사로 나오실 김승희 시인의 「만파식적-남편에게」라는 시가 떠올랐다. “더불어 살면서도/ 아닌 것같이,/ 외따로 살면서도/ 더불음 같이,/ 그렇게 사는 것이 가능할까?” 더불어 산다는 것의 지난함을 잘 헤쳐 나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만파식적에 실린다.
김완하 교수가 이끄는 대로 고은 시인의 자택 쪽으로 걸어갔다. 노란 은행잎들이 거리거리를 물들이며 반겨주었다. 고은 시인이 떠난 집은 그대로 방치된 채 집안은 굳게 문이 닫혀 있었다. 창문 속으로 보이는 집안에는 시인의 온기가 묻고 지문이 묻었을 책들이 가득 쌓여 있었다. 고은 시인께서 글을 쓰다 잠시 나와 서성거리거나 산책했을 뜰에는 단풍나무가 허공을 불태우고 있었다. 시인의 문학에 대한 열정만큼 시심과 만인에 대한 사랑이 뜨거워서였을까.
당장에라도 저 문을 열고 시인이 나오셔서 ‘술 한 잔씩 들고 가라’고 청하실 것만 같았다. 이 집에서 시를 쓰고 글을 쓴 대가의 정기는 사라지지 않았는지 어떤 기운이 느껴진다. 뵙지 못한 아쉬움에 발길이 선뜻 돌려지지 않았다. 단풍잎만 뒹굴고 있는 뜰에 언제 다시 주인이 돌아와 살 수 있을지 남겨진 숙제 같았다. 적막이 집을 지키는 시인의 집을 배경삼아 사진을 찍는 것으로 위안을 삼을 수밖에 없었다.
경기도 안성에서 태어나 지금은 대전 한남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로 후학들을 가르치고 있는 김완하 시인은 고은 선생님과의 인연을 이렇게 말했다. “고은 선생님께서 1983년 5월에 안성으로 오신 이후 20대 중반 선생님을 찾아뵙고 많은 가르침을 받아오다가 1987년 10월 《문학사상》 신인상에 당선되었다. 이후에도 고은 선생님께 끊임없는 가르침과 많은 영감을 받아오고 있다.”
그는 고은 시인을 마음속 스승으로 모시고 있는 것 같았다. 갑자기 안성이라는 지역에서 태어난 그가 부러워졌다. 고은 시인은 안성 자택에서 한국문학의 큰 업적이라 할 수 있는『만인보』와 서사시 『백두산』 등 당신의 저서 150권 이상을 쓰셨다. 안성이 고은 문학의 한 터전이었던 셈이다. 그러다가 2013년 8월, 안성에서의 30년 생활을 접고 수원시에 있는 광교산으로 이주하셨는데 안타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화천의 이외수문학관을 다녀온 바 있는 나로서는, 안성시가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큰 시인을 다른 지방에 이주하도록 놓친 것이 아쉽게 느껴졌다. 안성에는 고은이 있다고 자부할 수 있는 그런 문화 콘텐츠, 관광 콘텐츠가 없었다. 안성시에서는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지 못한 것일까? 김현 평론가의 말대로, 자본주의 시대에 문학은 유용한 것이 아니라서 그런 것인가?
내 생각과도 같이 뜻있는 안성 사람들에게는, 안성의 30여 년 자존심이던 고은 선생의 이주가 마치 보물을 잃어버린 것 같은 느낌이었던 듯싶다. 그리하여 안성 자택에 ‘만인보아카데미’를 개설하고 고은문학연구소도 열었다. 나는 지금이라도 고은문학연구소가 생기고 만인아카데미가 개최되고 있는 것이 다행스럽다고 생각한다.
고은문학연구소 고문으로 있으며 안성에 살고 있는 정진규 시인의 축사로 ‘만인보아카데미’ 강좌는 본격적인 막을 올렸다. 곧이어, 「쌍봉낙타」란 시처럼 뜨거운 사막 속을 낙타로 걸어가던 김승희 시인(서강대 국문과 교수)의 강연이 시작되었다. 여전히 젊은 시를 쓰는 김 시인의 카리스마가 강의실을 장악했다.
“전후시의 언술 특성(애도와 우울증의 언어)”이란 강의는 정말 좋았다. 고은 시인의 초기시 「폐결핵」이나 「사치」 같은 시들을 통해 고은 시인의 시 세계를 엿볼 수 있게 해주었다. 「폐결핵」에서 시적 화자는 질병에 걸린 사람인데, 그는 병이 나으면 안 되는 이유가, 그의 죄를 무죄로 만드는 유일한 방법이 병을 앓는 것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영화 <일포스티노> 속에서 우체부 청년 마리오가 “나는 아프고 싶어요. 나는 치료받고 싶지 않아요.”라고 했던 예를 들며 김승희 시인은 고은 시인도 외려 병이 떠나갈까봐 두려워하는 자가 아닐까 싶다고 해석했다.
한편, 「사치」에서는 병을 주는 ‘나’는 병을 받는 자로서의 ‘누님’에게는 가해자로 여기어 낫고싶지 않은 자로 보았다. 고은 시인은 스스로 “내 시의 본적은 한국 전쟁의 폐허.”라고 한 바 있다. 고은 시인에게 시는 전쟁을 통해 죽어간 목숨들에 대한 깊은 죄의식의 발원이기도 한 것이다.
김승희 시인은 고은의 시 세계가 왜 애도의 작업들로 이루어지게 되었는지 그 과정을 이와 같은 시들을 예로 들어가며 설득력 있게 풀어주었다. 김 시인의 뛰어난 해석 덕분에 나는 내가 미처 알지 못했던 고은 시인의 시 세계를 확장할 수 있게 되었다.
특히 이번 강의에서 의미 있었던 부분은 고은 시에 들어 있는 아름다운 운율에의 발견이다. 하나의 시 안에서 빼어난 선율이 밀물과 썰물처럼 움직이며 심미적으로 승화되는 느낌을 알게 되면서는 어떤 전율이 일었다.
시를 가르치는 교실에서 나는 제자들에게 “시를 살아야 한다”고 말하곤 했다. 시를 멀리서 찾지 말고 나 자신의 삶과 경험 속에서 찾아야 한다고 강조했던 것이다. 그런데 유홍준 시인도 나와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가 “나의 삶, 나의 문학”이란 강의를 진행하면서 제지공장 삶 속에서 나온 시 「소음은, 나의 노래」를 함께 읽었는데 울림이 좋았다. 유 시인은, “백지 쏟아지는 노동자로서 살았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그때가 참 좋았다.”고 회고했다. 경험이 시를 끄집어낸 멋진 사례가 아닌가 싶다.
그는 이어 제지 공장을 그만두고 3년 동안 정신병원에서 근무했는데, 그때 경험을 담은 시가 「몸무게를 다는 방법」이다. 그는 이 시를 쓰면서 “인간이란 뭘까? 정신이란 뭘까? 평소 좀처럼 아파하지 않는 편인데 그때 몹시 아파했다.”고 고백했다. 유 시인이 가장 힘들어 한 부분은 사람들을 감금하고 침대에 억지로 눕히는 행위들이었다고 한다. 그건 마치 고문 같았기 때문이다.
나 역시 아주 잠깐이지만 정신이 아프고 술에 중독된 사람과 몸이 아파 요양해야할 사람들이 입원해있는 병원 원무과에서 4개월 일한 적이 있다. 그때 나 역시 마음을 앓았었다. 글 쓰는 사람들에겐 어떤 곳이든 오래 들여다보면 애정이 생기고 글감이 되고 하는데 난 그 시절 온몸으로 느끼고 날마다 겪었던 감정을 여전히 글로 쓰지 못하고 있다.
나는 유 시인의 말을 들으며 문득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란 영화가 생각났다. 사람이 사람에게 가하는 폭력은 얼마나 무시무시한가. 인권 유린 앞에서 시는 무엇인가 하는 의문이 꼬리를 물고 사유의 각을 세웠다.
유 시인은 이후 이병주 문학관에서 일하기도 하고 북천에서 살았는데 그때 나온 연작시 「북천-까마귀」는 소월문학상 수상작이라고 한다. “북천에서 생존전략이 무기력이었다.”고 말했는데 그 쓸쓸한 진술에 가슴이 뭉클해졌다. 하지만, 그곳 북천에서 시를 40편이나 얻었다니 시인으로서는 얼마나 부자보다 더 풍요로운가.
새삼 세상에 공짜가 없다는 말을 실감한다. 특히 문학에선 더 그런 것 같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고흐나 뭉크의 그림들을 봐도 예술가들은 불행이나 결핍을 먹고 사는 사람들 같다. 그런 점에서 시인이나 예술가들에게 고통이나 불행은 에너지요 간절함이 아닐까. 현실을 잊고 몰입하는 동안 태어난 작품이 사람들을 감동에 젖게 하는 것이다. 나도 그런 간절함 속에서 시를 쓸 때가 있었는데, 지금은 다 어디로 새어나갔지 하고 잠시 회억에 빠졌다.
참여한 시인들의 시낭송이 이어졌다. 나는 「혀」라는 내 자작시를 낭송했다. 평소 시인들의 행사는 너무 진지하고 경직되어 보였는데 이날은 달랐다. 신기한 마술쇼도 펼치고 노래공연도 색다른 분위기를 자아냈다. 저녁이 창문을 지나가고 있었다. 이제 일어서야 할 시간이다.
문학 하는 사람들에겐 어떤 시간이라도 낭비되지는 않는 것 같다. 오늘 만난 사람들, 풍경들, 강의들이 나를 성장으로 나아가게 한다. 어떤 시간을 살더라도 창의적이고 생산적이기를 바라는 나에게 오늘 하루는 충분히 의미 있고 뜨거운 시간이었다.
돌아가는 어둔 길, 다시 가을비가 내리고 있었으나 살가웠다. 저녁밥을 먹지 않았어도 김승희 시인과 유홍준 시인의 삶과 시 이야기로 넉넉해졌다. 고은 시인의 열정적인 창작 의지와 시 정신이 내게도 조금은 스며들어서인지 문득 시심이 슬그머니 솟아나고 있었다.
엄마가 해주고 싶은 말은 "어떤 삶을 살더라도 생산적이고 창의적인 시간을 살아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