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은 만큼 보인다.

#14

by 분갈이

어릴 적에는 그냥 얼굴 예쁘면 홀딱 반해서는 정신을 못 차렸다.


고1 겨울에 다니던 학원에는 내 마음을 설레게 하던 얼굴 예쁜 동갑내기 여고생이 있었다.

어느 날 학원 건물 앞에 다른 친구들과 있는 모습을 슬쩍 보았다.

운동화를 구겨 신고 있는 모습.

그 순간 눈살이 찌푸려지더니 그 아이를 향한 관심의 불빛들이 차단기 떨어지듯 탕탕탕 꺼졌다.


'아, 나는 저런 걸 이 정도의 강도로 싫어하는구나.'


군복무 시절 TV에서 어떤 댄스 여가수의 무대를 보고 있는데 좋은 기분이 들었다.

'어, 왜 내가 저 가수를 보고 기분이 좋지? 원인이 뭘까? 그녀도 그저 단백질 덩어리일 뿐인데.'

마침 인체 해부 도감 책을 보며 만화 공부를 하던 후임이 있어서 해부 도감을 보여달라고 했다.

'아, 나는 여성의 내전근에 반응하는구나.'

그때 처음 '내전근'이라는 근육을 알게 되었다.


그 후로도

'아, 나는 허리를 곧추세우고 바르게 앉아 있는 이성에게 매력을 느끼는구나.'

'아, 나는 담배 피우는 이성은 완전 안 되는구나.'

'아, 나는 단발머리를 좋아하는구나.'

'아, 나는 모두 벗은 상태보다는 적게 착장한 상태를 아주 좋아하는구나.'

'아, 나는 나른한 목소리에 사로잡히는구나.'

'아, 나는 골반과 허리의 곡선에 환장하는구나.'

'아, 나는 두꺼운 피부 질감을 좋아하는구나.'

'아, 예뻐도 대화가 안 되면 도저히 안 되는구나....'

'아, 얘는 우리를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좋아하는 누군가가 있는 자신의 상태를 원하는구나.'

'아, 운동 안 하는 사람은 안 되겠다.'


이렇게 사람은 내가 아닌 것들을 경험하며 그들을 통해 나를 알아간다.

내가 선택하거나 설정하는 것이 아니다.

나를 발견하는 것이다.

나로 거듭나는 것이고.

나를 찾는 것이고.

나로 살아가는 것이다.



'내 속에서 솟아 나오려는 것.

바로 그것을 나는 살아보려고 했다.

왜 그것이 그토록 어려웠을까.'

<데미안>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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