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력기술서 쓰다가 불현듯 찾아온 현실 자각 타임, 고민 일기
10년간 사회를 이루는 하나의 부품으로써 분주히 제 역할을 해왔다. 타고난 저질 체력으로 의지와는 달리 삐걱거릴 때도 있었지만 톱니바퀴가 서로 잘 맞물리도록, 맡은 팀 프로젝트가 멈춰서지 않도록 호록호록. 라면 연료도 틈틈이 넣어가면서.
그렇게 열심히 '시키는 일'만 하다 문득 깨달은 한 가지. "부품은 망가지면 쉽게 교체될 수 있다." 급작스런 각성에 조금 흥분 상태가 된 부품은 돌연 해외도주를 자행하기도 했지만 이내 고국으로 돌아왔다. 코로나라는 역병이 돌고, 사유의 시간이 많아지며 급작스런 각성은 기억 저편으로 잊혔다.
부품은 다시 안전한 하드웨어 속으로 들어가려 부단히도 애를 썼다. 프리랜서보다는 정직원을, 서울 셋방살이보다는 경기도 내집 장만을 선택했다. 하지만 택한 하드웨어들은 예전의 부품 역할만으론 동력을 갖지 못했다. 신생 소기업과 30년 가까이 된 구축 소형 아파트를 동시에 구동시키기에 부품은 한없이 작았다.
선택지는 제품 폐기 후 재생산 뿐이었다. 작디 작던 부품은 버려졌다. 버릇, 성격, 마음가짐 등 가지고 있던 소양이 리셋되고 새로운 소프트웨어가 탄생했다. 콘텐츠 기획·제작, 강의, 제품 관리, 영업, 그리고 살림능력까지… 모든 것이 가능하며 어디 설치해도 막힘없이 구동되는 호환성 괜찮은 프로그램!!
새로 태어난 소프트웨어는 제법 본인의 모습이 맘에 들었다. 명령어가 입력되면 어떻게든 결과물을 만들었다.출력할 때마다 다른 결과값이 흥미로웠다. 하루가 다르게 자신감이 상승했다. 더 튼튼한 하드웨어를 찾아 떠나도 되겠어! 그동안 결과값에 매진하느라 따로 리스트업해두지 못한 프로젝트들을 복기하고 정리했다. 그런데, 계속 에러 메시지가 떴다.
'404 Not Found : 결과를 찾을 수 없음'
뭐야 대체.
최근 <시대예보> 시리즈를 집필한 송길영 작가의 오프라인 강연을 들었다. 다음소프트 부사장이었을 때도 이미 빅데이터 전문가로 잘 알려진 그가 본격 작가로 홀로서기하며 대중에게 던진 새로운 개념 '핵개인'. 처음엔 낯설었지만 어느새 익숙해진 단어. 강연장에서 본 청중들도 이 개념이 그리 생경하지 않은 듯, 진중하게 집중하고 활발히 질문했다.
핵개인 : 울타리에 의존하지 않고 혼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사람. 지난해 폴인 콘텐츠에서 그가 직접 인터뷰어로서 만난 인터뷰이들이 대표적인 예다. 윤종신(뮤지션), 노홍철(엔터테이너·사업가), 이슬아(작가), 이연(콘텐츠 크리에이터). 이들의 업적을 조금이라도 아는 이라면 단번에 핵개인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으리라.
유튜브, 인스타그램 등 거대 플랫폼엔 끊임없이 다양한 매력의 인플루언서들이 등장하고 있다. 관료제라는 시스템을 거치지 않아도, 리스크를 감수하고 개인 사업을 벌이지 않아도 밥벌이 그 이상을 하는 사람들이 셀 수 없이 많아졌다. 혼자서 충분히 헤쳐나갈 수 있게 된 유연한 사회.
송길영 작가의 강연은 흐름이 빨랐다. 사회 변화의 속도 만큼이나. 그리고, 내가 현 기업에서 성장한 속도 만큼이나! 그래서 쉽게 고무되었다. "아 나도 할 줄 아는 게 많으니까, 핵개인이 될 수 있겠다." 강의 끝나갈 즈음엔 이미 인플루언서로 데뷔한 느낌이었다. 강연이 준 파이팅의 기운은 꽤나 오래 갔다. 연차 내고 경력기술서를 다시 정리하면서 지난 4년간의 나를 돌아보았다.
웬걸?
하나로 정의할 수 있는 필살기가 없다. 많은 프로젝트를 동시다발적으로 진행하면서도 틈틈이 부수적인 것들은 잘 쳐냈다 생각했는데 한 장에 정리해놓고 보니 매력적인 능력이 영 눈에 띠질 않는다. 그냥 이것저것 많이 한 사람. 핵개인은 커녕 기기괴괴 핵괴인 그자체.
그래서 잠시 또 헤매는 중이다.
탄탄한 핵개인이 되기 위한 과도기다. 라고 생각하면 조금 위로가 되기도 하지만 위로는 섣부르고, 간만에 지원하고 싶은 기업의 서류 전형 마감은 일주일 앞으로 다가왔다. 초조하다. 그런데 동시에 잠시 멈춰서서 호흡할 시간도 필요하다. (조금) 미쳐버리겠다.
슬슬 미쳐 가는 사람의 장황한 일기가 누군가에겐 웃픈 하나의 이야기로 여겨지길 바라며,
읽어주신 분들, 감사합니다.
- 2024.11.02. 밤 9:44
ⓒGeorgigian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