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뢰렉신 Feb 03. 2017

보통의 존재

하지만 나는 특별한 존재

모든 미디어는 항상 나를 투영해준다


라는 관념으로 나는 독서를 하고 영화를 보고 음악을 듣는다. 그게 왜냐면 계속 전달해오는 그 내용 안에서 끊임없이 나를 대입하여 보기 때문이다. 그 대입을 통해 결국 나의 현 모습과 심기(心氣)가 투영되고 드러난다.

그걸 보는 게 재미있고 신기하기도 하고 반성하기도 하고,

또한 흠칫 감동하기도 한다.



얼마 전 읽었던 이석원 님의 '언제 들어도 좋은 말'은

그런 측면에서 정말 나에게 굉장히 센세이션 한 자극을 주었다. 책을 통해 느껴보는 꽤 오래간만의 즐거카타르시스였고, 내가 쓰려고 갈팡질팡하는 글짓기의 어긋난 산만성을 툭툭하고 쳐주어 큰 틀에서 수직적 정리를 해준 안내 같은 느낌이었다.


그 후, 

그 책을 빌려준 '그 녀석'과 며칠 동안이나

지하철에서, 카페에서, 또는 길거리에서

시도 때도 가리지 않고 침을 튀기며

이석원 님에 대해서,

책 내용에 대해서,

그리고 내가 앞으로 쓸 글짓기에 대해서 흥분된 수다를 떨었다.


그 흥분이 가라앉기도 전,

근하는 지하철 안에서 '멸망의 색(色)'인

노란색 양장 표지의 책 한 권을 그 녀석이 손에 들고 있길래,

뭐냐고 하니까 이석원 님의 처녀작 산문집 '보통의 존재'란다. 지금 읽고 있는 중 책이라던데, 내가 인터셉트해서 먼저 읽겠다고 우겨서 집으로 모시고 왔다.


궁금했고 설레었다.

과연 이석원 님의 '언제 들어도 좋은 말'의

그 짜릿한 자극이 이 책에서도 이어질까?



'보통의 존재(2008)' 이석원 作







모든 것은 어느 날,
자신이 결코 특별한 존재가 아니라는
섬뜩한 자각을 하게 된 어떤 사건으로부터
비롯되었다.   

(보통의 존재 中)



어떤 사건은 누구에게나 항상 종종 일어난다.

사건 중 몇몇은 우리 삶에 꽤나 깊은 영향을 주곤 하는데, 자신의 존 의미가 불현듯 밝혀지는 그런 날이기도 하다. 그런 날에는 꼭 사건이  마련이다.



어릴 때부터,

나는 '특별한 존재'라는 망상(?)이 있었다.


특별한 존재를 넘어서

그냥 나는 '위인전'에 나오기로 예약되어 있는 사람이라  굳게 믿었다. 그리고 현재는 그 '위인'의 삶이 라이브 되고 있는 중이라는 발칙한 생각 속에 살았다.


따라서 모든 품성과 행동은 위인처럼 완벽해야만 했다(?)

또한 에디슨이 계란을 품었던 일화처럼 내 ' 위인전'에 나올 에피소드를 많이 만들어 놓아야 했다. 강박으로 의도된 엉뚱한 짓을 참 많이도 하고 돌아다녔다.


사람이 일평생 유년기의 기억에 지배를 받는다는 사실은 불행일까 행복일까.
그리움에 젖어 돌아갈 수 없는 시절을 그리워한다는 것으로만 보면 불행일 것이고,
그리워할 대상이 있다는 것은 또한 행복일 것이다. p70


가끔 주변 사람들과 담소 중에,

내 어릴 적 이야기를 들려주면 깜짝 들 놀랜다.


"에? 되게 부유하게 자라 신지 알았는데요?"


나는 가난한 환경에서 자랐다.

초등학교 2학년부터 중학교 3학년 때까지 신문 배달을 해야 할 정도였다. 어머니의 행 기준은 아버지가 월 30만 원씩 따박따박 받으시는 월급쟁이가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글쟁이 아버지는 늘 월 20만 원도 채 못 버셨다.


몇 백 원으로 살 수 있는 학교 준비물을 못 사가서,

교실 복도에서 벌을 설 때도, 학급 반장이라 학우들에게 예방 접종비를 걷으면내 이름 옆에 돈을 내었다는 체크 표시를 못하는 상황에서도


'이런 상황들 모두가 훗날 내 위인전에 불우한 환경 속에서도 꿋꿋이 이겨나갔던 하나의 에피소드가 되겠지?'


라며 스스로를 위안하고 긍정적으로 생각했다.


그런 '난 특별한 '라는 내 스스로의 존재 인식이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낙관적이고 긍정적인 성격을 형성하는데 큰 영향을 끼쳤다. 지금 와서 생각하면 우스웠던 유년기 시절이었지그 절대적 '믿음'이 지금의  인격을 만들지 않았나 싶다.




# 내용 1

이석원 님이 지금까지 살아온 '스스로의 인생' 예를 들면서 꼭 특별한 존재가 아니더라도 보통의 존재로 자각하고 그 현실을 받아들여 그냥 뭐가 되지 않아도, 명확한 삶의 의미를 찾는데 몰두하지 않고 살아가도 그게 나쁜 게 아니라는 것을 말해주었다.


누구나 배우가 되고 감독이 되고 싶어 하는 건 아니라는 것이다. 누구나 배우나 감독이 될 자질이 있는 것은 더더욱 아니고 그러니 남은 생을 사는 동안 내가 그저 관객의 안온한 자리를 지키며 살아간다 할지라도 꿈이 없다 뭐라 할 수 있을까. p36


사람이란 게 참 그렇다. 욕심이 있지만, 지레 포기해버리고 욕심을 부리지 않는 경우도 있다. 타인과 비교를 하면 자존감이 떨어지기 때문에 일부러 비교 없는 삶을 꾸려나가기도 한다. 우리가 소위 말하는 '정신 승리'를 실천하는 것이다. 그렇다. 내 '정신과 마음'만 평화롭게 유지가 된다면, 내게 주어진 환경과 내 기질을 받아들이고 그 속에 만족하며 살아가도 하등 문제 될 것이 없다.


그러나 나는 이석원 님의 과 다르게 강조하고 싶은 부분이 있다. 꿈이나 목표는 본인의 환경과 역량에 맞게 재조정하며 사는 것은 맞지만, 자신을 사랑하는 것에는 양보하지 말라는 것이다.


본인을 제대로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 다른 사람의 존재도 귀하게 생각하고 사랑할 줄 안다고,

나 자신 스스로 존재의 고귀함과 특별함을 인정할 수 있어야 다른 사람을 대할 때도 그렇지 않을까 싶다.

객관적으로는 보통의 존재라 해도 주관적으로는 특별한 존재성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은 어쨌든 스스로 납득할 수 있는 복한 삶의 기반이 만들어질 수 있는 동력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본인을 사랑하자. 그리고 남들이 보통으로 봐주든말든,

나 스스로는 '특별한' 존재라는 애착을 쑥스럽게 생각하지 말자.



# 내용 2

이석원 님은 불행과 어두움이 본인 삶에 끼친 영향에 대해서 몇몇 에피소드로 써 내려갔다.

20대 초반 정신병원에 입원하게 된 이유를 어린 시절 불완전하게 형성된 자아에 두고 있다. 그리고 그런 부분들이 예술을 써 내려가는 동력이 되었고 불행과 어두움이 크면 클수록 깊어진 주름을 가진 예술과 창작의 관록으로 치환될 수 있다 하였다.


내가 만들어온 많은 것들은 불안과 고통의 산물이었다.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상상력과는 무관하다.
창조는 천재성이 아닌 고통에서 더 많은 것이 비롯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인생의 굴곡이 험준할수록 작품에도 그만큼 진한 드라마가 담기기 마련이니까. p92


나도 일정 부분 동감하는 부분이긴 하다. 현실이 힘들고 지칠수록 뭔가에 의지하고 싶어 지고 내뱉고 싶은 것들이 많기 때문이다. 그런 상황에서 영감이 튀어나오고 털어내고 싶은 고통과 고독이 글이나 그림, 음악으로 창작되어져 쏟아져 나오면 그때 뭔지 모를 벅차오름이 있다. 이를 통해 갱생되고 보상받았다는 자위 감도 느낄 수 있다.


어쨌든 글을 쓰기 시작한 나는 불행과 결핍이 예술의 영감과 깊이를 준다 해도 삶의 어두움은 피해갈 수 있으면 피해 가고 싶다. 그 대신 행복과 삶의 찬미를 기반으로 한 예술적 영감과 표현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아름다움을 기술하고 싶고, 이 세상 누구에게나 똑같이 제공된 유한한 삶 속에서 '행복과 평화' 그리고 '사랑'이라는 명제를 표현하는 글짓기를 하고 싶다.


만약 불안과 고통만이 좋은 글, 더 깊이 있는 작품을 창작해 낼 수 있다는 절대적 규칙이 있다면, 나는 글쓰기를 포기할 것 같다. 그냥 글 따위는 안 쓰고 평온하게 소소하게 가족과 주변 사람들과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 평화로운 삶이면 만족한다. 그냥 그게 더 이득이지 않나 싶다.




# 내용 3

다소 산만한 내용 중 친구나 연인에 대한 글 많았는데, 그중 친구에 대한 글 내가 예전부터 갈구하던 친구에 대한 로망을 이석원 님도 그대로 원하고 있었음에 큰 공감이 이루어졌다. 역시 사람들은 다 거기서 거기인가? 다들 그런 생각들을 어렴풋이 하고 있지만 이렇게 글로 표현된 것을 보니, 맞아 나도 그래!라고 타인의 생각이 나와 같았다는 것이 판단되는 순간, 이산가족 만난 듯한 기쁨이 느껴진다.


우정의 거미줄을 촘촘히 쳐놓은 채 단 한 사람이라도 나와 생각과 취향이 비슷하며, 나에게 동류라는 동질의
행복감을 느끼게 해줄 수 있는 사람, 같은 것을 보고 웃을 수 있는 유머의 코드가 맞는 사람, 나를 이해해주고 내 편이 되어줄 수 있는 사람을 묵묵히 기다리다 언젠가 그물에 누군가 걸리기라도 하는 날에는 최선을 다해서 나를 보여주고 마음을 열 생각입니다. p219


나는 좁은 오지랖과 사람을 잘 못 믿는 성격 때문에 대인 관계의 한도 거리가 반경 3미터 이내 일 정도이다(내 생활 반경 3미터 밖의 사람에게는 전혀 관심이 없다. 극단적으로는 투명인간이다...;;)


거기에 주색잡기, 음주가무에 소질도 없고 혐오감도 적잖게 가지고 있기 때문에 사회생활, 특히 남자들과의 관계적 생활은 너무 안쓰러울 정도로 약하다. 또한 여러 명이서 같이 밥 먹는 거 조차 불편할 정도로 소수로만 움직이고 싶어 하는 반 단체적 성향도 있어, 내가 어떻게 지금까지 직장생활을 하고 있을까 하는 놀라움도 있다.

 

꼭 직장 동료 중에 발견할 필요는 없지만, 이석원 님이 로망 하는 친구의 조건처럼 나도 그런 사람을 너무 오래전부터, 아주 오랫동안 기다려왔다. 그러나 그런 사람이 쉽게 나타나지도 않거니와 나타났다 해도 다가감에 미숙한 나는 그를 사로잡기는 힘들었다.


아, 나는 그런 절친한 친구의 조건에 나이차이라던지 성별을 가리지는 않는다. 근데 책의 내용 중에 이석원 님이 남녀 간의 친구관계가 성립하는가?라는 이슈로 한토막의 글이 있었는데,


글쎄 사람마다 남녀 간의 친구관계에 대한 논란과 이견들이 많지만, 그건 당사자들이 생각하기 나름인 거 같다. 인간의 관계에 규정은 없다는 게 내 지론이고, 개인적으로는 남녀 간의 절친한 친구 사이는 분명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어쨌든 나는 지금 현재 내 바로 옆에 있는 사람이 내 인간관계 1순위이다. 그 사람들하고만 친구 놀이를 하는데, 그중 취향과 정서적 동질감, 유머 코드, 이해해주고 배려해주는 사람이 내 반경 3미터 안에 들어오는 건 너무 어렵다. 다가오는 만큼 다가가는 소극성 때문에 주변에서 제발 먼저 다가가시라 조언이 많지만 어쩌겠나 이런 천성인 것을.


그래도 속 좁은 나에게 대범하고 거침없이 파고들어오는 그런 사람이 언젠가 내 이너써클 안에 들어오지 않을까? 그럼 바로 무릎 꿇고 영접할 테다. 헤헤






내 메신저 알림 말은 늘,


'천하의 렉신'이었는데,


이전에 알던 동생이 깔깔 거리며 저 단어만큼 나를 잘 표현해주는 말은 없을 거라고 엄청 웃었다.

아마 평소 자존심 자존감 쩌는 내 찌질한 행동을 비꼬는 것일 테지(ㅋㅋ)


사실, '천하의 뢰렉신'은 내 이상적 목표를 말한 거지 지금 내 상태가 천하무적이라는 게 아니었다(너네들이 잘못 봤어 난 겸손해!)

항상 마이너에 있지만 메이저로 가고 싶었고 지금은 낮게 움츠려 있지만 힘껏 도약하려 열심히 내공을 충전하고 있는 거라 생각했다.


이석원 님의 글처럼 내 현재 상태를 인정하고 그냥 생긴 대로 사는 것도 인생을 살아가는 방법 중 하나겠지만, 나 같이 삶의 목표를 끊임없이 세우고 재조정해가며 닿지 않는 것들을 향해 안쓰럽게 아등거리며 사는 것도 또 다른 인생의 다양함이다.


나는 거기에서 삶의 목적과 재미를 찾았으면 된 거다. 결과가 어떻게 되든 과정의 즐거움과 설렘이 현재를 벅차오르게 했다면 이 보다 더 큰 내 삶의 아름다움은 없으리.


내 자의적 해석일지 모르겠지만 인간 삶의 결과와 결론은, 마주하기 싫은 현실이지만 '죽음'이다.

인간 모두에게 똑같은 결과가 기다리고 있다.

그래서 살아가는 과정에서 의미를 찾고 싶다. 계속 꿈을 꿀 것이고 소소한거 부터  원대한 것 까지 쿵짝쿵짝 뭔가를 꾸미고 실천하며 푸하하 깔깔깔 웃으며 살아가고 싶다. 가끔 딴 짓도 하고 말이다(ㅋ)


어쨌든

이석원님이 최근에 쓴 '언제 들어도 좋은 말'을 '보통의 존재' 보다 먼저 본 것도 결과적으로 좋은 선택이었던 것 같다. 내용도 내용이지만 글이란게 계속 쓰고 퇴고하다 보면 얼마나 늘 수 있는지, 얼마나 내공이 쌓여 본인의 글색(色)을 찾아서 그걸 휘두르며 쓸 수 있는지 알게 되었다.


이석원 님의 글과 이야기는 그를 만나고 싶어 할 정도로 매력적인 문장과 정신 세계를 가졌다.

언젠가 나도 내 글을 읽는 사람들이 '뢰렉신'을 만나보고 싶다라는 생각이 들게끔 만들고 싶다라는 목표가 생겼다.


끝으로

우연히 책을 빌려준 지하철 '그 녀석'에게 감사한다.

또 다른 목표에 대한 자극과 희망을 주었으니까 :)



        

매거진의 이전글 언제 들어도 좋은 말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