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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뢰렉신 Mar 16. 2017

태도에 관하여

거창하지 않더라도 좋다.

나를 살아가게 하는 삶의 가치들은 무엇일까?


살아가면서 딱 규정하거나 메모해놓고 있지는 않지만, 나를 살아가게 하는 몇 가지 삶의 태도를 가지고 있다. 분명한 건 그 '태도'의 기준이나 가치가 사람마다 다를 수 있고 그것이 그 사람이 어떠한 사람이란 것을 드러나게 해주는 명분이 되기도 한다라는 것이다.


임경선 님의 '태도에 관하여'란 책은 삶을 살아가게 하는 다섯 가지의 중요한 가치를 키워드로 나누어 자신이 겪은 이야기와 그간 쌓아온 인생의 노하우풀어냈고, 그를 통해 독자들에게 자신의 '삶의 태도'를 되돌아보게 하는 자극을 주고 있다.  


그 자극을 통해 나는 독서가 끝난 후, 그녀가 분류한 다섯 가지 가치에 나를 대입해보았고, 마지막에는 내가 생각하고 있었던 내 삶의 중요한 가치가 무엇일까 끄집어내 보았다.


                                                                                                                                                                


1. 자발성

우리는 처음엔 서로의 멋진 모습을 보고 좋아하게 되지만 서서히 그 사람의 멋지지 않은, 결핍된 부분을 사랑하게 된다. '이 사람의 이런 못난 모습은 나밖에 모른다'는 것, 그런 마이너스 부분의 연결 고리가 훨씬 강하다. 연애는 원래 폼나지 않는 것이었다. p42


나는 20대 초반 처음 했던 연애에서 '너 아니어도'가 아니라 '너 밖에'라는 생각이 더 내 마음을 지배하고 있었다. 내게 사랑이란 감정은 한정적인 재료라 생각되어 여기저기에 사용(?)하고 다니면 줄어들 거야라는 순박한 생각이 있었고, 아끼고 아껴 온전히 단 한 사람에게만 이 재료를 모두 다 쏟아부어 최고로 맛있는 사랑을 만들어 내고 싶었다.


그랬기 때문에 처음 한 연애가 꽤 길게 이어졌다. 그러나 대부분의 연애가 그렇듯, 또는 한 사람을 오래 만나면 그렇듯, 그 사람과 내가 안 맞는 부분, 또는 내가 원하는 모습과 전혀 다른 부족한 모습을 언젠가 발견해버리고 만다. 뭐 소소한 부분이라면 애교로 넘어갈 수 있지만, 정말 이 사람과 연애를 계속 이어가야 할까?라는 생각이 드는 중대한 부분들이 포착되기도 하는데, 희한하게 나는 그런 부분들이 오히려 내 마음을 더 애잔해지게 만드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그녀는 언제나 투덜거렸다. 뭐가 그렇게 마음에 안 드는지 주변의 대다수 상황, 주변의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불만이 있었다. 그래서 주변과 다툼이 많았고 그것을 항상 나에게 투덜거리며 하소연했다. 나는 무슨일이 있어도 그 편을 들었고 객관적으로 그녀의 잘못이라 생각되어져도 너는 충분히 그럴 수 있었다. 너는 그렇게 말할 수 있었고 그렇게 행동할 수 있었다는 말로 다독여 노여움에 치를 떠는 그녀를 진정시켜 주었다.


그러나 나도 사람인지라 그런 모습에 가끔 짜증이 났었고 "네가 잘못했네!"라고 말하고 싶기도 했었다.  때로는 그 투덜거림의 대상이 나이기도 했는데 '내가 무슨 잘못을 했을까?' 란 반문을 나 스스로에게 수없이 하고, 난 잘못한 게 없다라 생각이 들어도 꾹 참고 "내가 부족했어, 내가 더 노력할게"라는 말로 어떻게든 부풀어 오른 그녀의 성질을 누그려뜨렸다.


사실 기똥차게 지랄 맞은 성격이라 해도 무방한 그녀를 쉽게 떠날 수 없었던 가장 큰 이유는 '나 아니면 이런 부분까지 이해해 줄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을 거야'라는 오바스러운 관대(?)함과, 나 아닌 다른 매정한 사람을 만나 그 성격 때문에 사랑받지 못해 슬퍼하면 어쩌지 하는 오바스러운 걱정(?)도 있었다.


세상에 단점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리고 나는 천성적으로 상대방의 '장점'을 원래보다 더욱 확대 부각시켜 그 사람의 치명적 '단점'도 간단히 덮어버리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관심의 돋보기를 내가 그녀를 좋아하게 된 그 부분에만 들이대도록 노력하면 됐었다.


여하튼 그런 마이너스한 부분의 연결 고리가 나에겐 관계를 더욱  밀착시켜주는 역할로 작용을 했다. 물론 지금 와서 생각하면 그건 나의 오만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는 하지만, 나이를 훌쩍 먹은 지금까지도 나는 '너 아니어도..'라는 생각이 아닌 '너 밖에..'란 마음에 아직도  지배되고 있다.


내 인생에 있어 한 사람을 통해 극대화된 내 감정과 애틋함의 경이로움을 경험했기 때문에, 그것 만으로도  대단히 감사하는 마음이다.



2. 관대함

나한테 마음의 문을 연 만큼 딱 그만큼만 나도 마음을 여는 것이 어떻게 가능하단 말인가. 내가 누군가를 좋아할 때 우선 그 누구보다도 내가 그 마음을 인정하고 받아주어야 하지 않을까. 사랑해서 취해야 할 단 하나의 태도가 있다면 나 자신에게는 '진실함', 상대한테는 '관대함'인 것 같다. 사랑하면 상대 앞에서 자신 있게 무력해질 수가 있다. p52


나는 인생에 있어 좋아했던 사람에게 치명적인 거절(?)을 당해 그 트라우마를 아직까지 극복하지 못했다. 시기적으로 기가 막히게 10대 후반과 20대 후반으로 10년 터울을 두고 두 번 는데, 그 충격으로 누군가에게 마음을 여는 것 만큼은 이 세상 누구보다 쪼잔하고 소극적인 사람이 되어버렸다. 내가 하필이면 그런 사람들만 좋아했던 것일 수도 있는데 정말 재미있는 것은 10대 후반 나를 야멸차게 거절했던 그녀는 훗날 만남에서 나에게 더 충격적인 말을 했다.


"그때, 왜 더 나에게 대시하지 않았아요? 나도 사실 좋아했었는데.."


아무렇지 않게 뉴요크 스테이크를 썰면서 나를 원망하는 그녀의 말에 나는 너무 어이없음을 표정에서 드러냈다. 그리고 그날 이후로 다시는 연락을 하지도 않았지만, 오는 연락도 야멸차게(!) 씹어버렸다.


내 성향적 찌질함도 있지만 내가 이렇게 된 모두 다 그녀 때문이다(흥=3). 99% 확신을 주는 그녀의 수많은 말과 행동들을 믿었고, 주변 사람들의  부추김이 더해져 용기 내어 고백했더니 냉정하게 잘라버리더라, 그냥 오빠 동생으로 지내면 안 되냐고. 헐. 

결국 나는 그 충격으로 방황하다가 대학 새내기의 낭만도 못 느껴보고 바로 군대로 도망쳤다. 흑.


상대의 마음 앞에 시험의 덫을 쳐놓고 그걸 덮썩 무는 상대를 보며 낄낄거리면서 다음 덫을 준비하는 이기적인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어디까지 내가 쳐놓은 덫에 걸리는지 보자라는 심리로 계속 징검다리 덫으로 사람 마음을 가지고 노는 사람 스스로에게 '진실함'과 상대에게 '관대함'이란 있을까?


어쨌든 나는 그 트라우마 이후, 누가 나에게 잘해줘도, 호감을 보여도 '좋아해'란 말을 듣기 전까지는 절대 나의 마음을 시작하지 않기로 다짐했다. 뭉게뭉게 뭔가 이성과의 분위기가 만들어지고 거침없이 가까워져도 나는 그걸 그 정도로만 생각을 했다. 아닐 거야 나를 좋아해서 저러는 게 아닐 거야, 나 외에 다른 사람들에게도 저렇게 말하고 행동하고 다닐 거야 하며 스스 터져 나올 것 같은 '애정'이란 감정을 부여잡고 틀어막아버렸다.


그렇게 젊은 시절, 내 감정을 그따위로 컨트롤해서 얻은 현실은, 이 나이 먹도록 연애를 한 번 밖에 못해봤고 미팅이나 소개팅 같이 누구나 다 해봤을 흥미로운 경험 한 번 못해봤다라는 씁쓸한 젊은날의 안타까운 추억이 있다.


그리고 나는 스스로에게 그렇게 살아온게 잘했다고 절대 말하지 않는다.


나는 찌질하게 소리친다.

(건축학개론의 엄태웅 말처럼)


" 모든게 '년' 때문이다."



3. 정직함

혼자서 잘 서 있을 수 있어야 타인과 함께 있을 때도 더 좋은 관계를 맺을 수 있고, 마음이 통하지도 않는 누군가로 공허함을 가짜로 채우기보단 차라리 그 비어 있는 시간들을 그대로 직면하는 것이 낫다. 그래야만 내가 앞으로 어떤 사람들과 있어야 진정으로 나답고 편안할 수 있을지를 감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p94


겉으로 쾌활하고 적극적인 성격으로 보이지만, 사실 나는 내성적이고 외편적인 성향이 강하다. 생활 속의 모습과 무척 다른 모습이지만 그 사실을 주변 사람들이 인정해 주지 않아 종종 '쟤 왜저래?'라는 말을 듣곤 했다. 


평소엔 딱다구리처럼 조잘대며 까불대다가, 뭔가에 빠져  생각이 깊어지면 혼자 조용히 찌그러져 있거나 혼자 훌쩍 어디론가 떠나는걸 좋아하는데, 다른 사람들이 보기엔 감정 기복이 심해보였나보다. 사실 기분이 나쁜 상태거나 우울해서 그랬던게 아닌데 말이다.


나는 혼자가 좋다. 아니 혼자 뭔가에 골똘히 빠지고  그것을 혼자 실행해보는 그 호젓함이 좋다.

아니면 딱 한 명과 같이 다니는게 좋다. 임경선님은 두 명까지 카바(?)가 된다고 하시는데, 나는 두 명도 부담스럽다. 나 혼자 아니면, 나와 무엇을 해도 괜찮은 딱 한 사람과 같이 다니는게 좋다.


그런데 정말 희안한건 이렇게나 낯을 가리고 홀가분함을 즐기는 사람인데, 나는 어떻게 3만 관중 앞에서 실시한 댄스(막춤)대회에서 1등을 하고, 몇 십명을 이끄는 회사의 조직장을 하기도 하고, 지상파 TV CF를 4편이나 찍으면서 능청스런 연기를 해냈을까?


나도 내가 이해가 안되는 웃긴 놈이란 것은, 수줍음이 많고 앞에 나서는 것 극도로 싫어하는데, 막상 또 자리가 주어지고 상황이 생기면 또 그것을 아무렇지 않게 해낸다라는 것이다.


[너무 싫어하는데 시키면 해낸다. -> 사람들이 오해하고 또 그걸 시킨다 -> 너무 싫어하는데 시키면 해낸다]

이것이 무한 루프 되고 있는 안타까운 삶이다.


내가 원래 외향적 체질인데 그걸 부정하고 있는 걸까? 내 스스로에게 정직하지 않는걸까?



4. 성실함

주변의 모든 사람이 싫다고 하니까 나는 좋은데 좋다고 말하지 못할 때, 난 아무리 봐도 별로인데 다른 이들은 그것을 칭찬하니까 그냥 같이 좋다고 말해줄 때가 있다. 남과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것, 어느 쪽에 전폭적으로 동조하지 못하는 것으로 내가 곡해당하지 않을까, 따돌림 당하지 않을까 신경 쓰이고 궁극적으로는 저들 말대로 내가 틀린, 잘못된 생각을 가진 게 아닐까, 라는 자기부정의 공포를 갖게 된다. p177


"뢰렉신님은 좀 유니크 하잖아요"


참 많이도 들었다. 이 말을.

내가 가진 생각이나 가치관 같은 것들이 남들과 좀 다른 것들을 알게 될 때면 나는 살짝 주눅들었다.


'아.. 뭐야.. 난 또 다른 거야?'


내가 반(反) 일반적인가? 내가 좀 무리에서 다른 종(種)인가? 대부분 그렇게 생각을 한다는데 왜 나는 다르지? 왜 나만 비틀어지고 다른 우려가 지? 왜 나는 평범하게 어울리지 못할까? 


그래서 늘 체념했다.

'그래... 이래서 나는 가깝게 지내는 사람이 극히 일부구나'

물론 주변 사람이 아닌 나에게 원인이 있다라는게 팩트이다.


어쨌든 나는 부지런히 주변 사람들에게 내 생각과 마음을 드러냈다. 그러니 나를 좀 이해해달라기보다는 나는 이런 게 생겨먹은 사람이야 라는걸 분명히 말해두고 싶었다.

내 본성에 대한 주장을 좀 더 적극적으로 해두어야 나중에 앞과 뒤가 다른 사람이네 라는 말이 안 나올 거라 생각했다. 그래서인지 사람들이 좀 어려워했고 때론 불편해했다. 나쁘게 말하자면 좀 제멋대로고 사회성이 부족한 사람인 거다.


이렇게 외톨 외톨 한 내가 어쩌다가 동질적인 성향이나 기질을 가진 사람을 알게 되면 너무 반가웠다. 그리고 그 사람과 뭔가 이야기를 하고 싶어 미칠 지경이었는데 어디까지 나와 비슷한지 알아내고 싶은 호기심 때문이었다. 그걸 알아내서 뭐하냐고 하겠지만, 그걸 통해 나 같은 사람도 있고, 있을 수 있는 인간 본연의 스펙트럼 중 하나의 컬러를 가진 사람이다라는 안도감을 느끼려 했던 것이다.


오래 전부터 일본 작가 '에쿠니 가오리'에 대한 인간적 동경이 있었다. 그가 써낸 소설을 읽고 짜릿함을 느끼며, 어쩜 나와 이렇게 사고가 비슷할까. 감성이 흡사할까. 만나보고 싶고 이야기하고 싶다. 그런 사고를 갖게 된, 그런 가치관이 형성된 정서적 트라우마에 어떤 사연들이 있었는지 물어보고 듣고 싶었다.


'태도의 관하여'을 읽으면서 임경선님과 내가 그동안 생각했던 인간 삶의 태도 부분에 있어 '어머, 이리 똑같을 수가'를 주저리며 반짝 눈이 떠졌고 동질의 벅차오름에 책을 더 부여잡고 읽어 내려갔다.


그런데 정말 아쉬운 것은, 책의 중반까지는 어쩜 나랑 이렇게 비슷한 생각을 할까? 동질의 애착을 철저히 느꼈지만, 중반 이후에 간간히 '어? 이런 생각은 나랑 완전 다른데? 이건 아니야 이런 생각은 나를 불편하게 하는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마지막 페이지를 읽고 책을 덮으면서는 '휴... 동질이 아니시네..'라는 생각으로 정리를 했다. 정말 내 개인 생각이지만 웃겼다. 저 혼자 좋아하고, 저 혼자 이별하는 그런 시츄에이션...;;;


그런데 더 웃긴 건 원래 다른 사람이 쓴 서평은 잘 안 보는데 '나와 같이 느낀 사람이 있을까?' 란 생각에 이 책을 읽은 서평을 쭈욱 찾아 읽다 보니 내가 느낀 '불편함'을 똑같이 느낀 리뷰어들이 있었다. 그 글을 보고 또 다른 동질을 만난 것 같아 얼마나 반갑던지...ㅠㅠ 여기서 내 간사함에 다시 한번 쓴웃음이 지어졌다.


'그래, 사람은 같은 현상을 다양하게 받아들이고 다양하게 생각할 수 있어!'


그렇게 스스로 동질이었다가 아닌 것 같다고 체념한, 내 오락가락한 생각을 합리화시켰다.



5. 공정함

인간관계도 환경의 변화에 따라 자연스러운 흐름을 타기 때문에 그걸 거역하지 못하고 붙들고 있는 것이 되레 어색한 일이다. 현재 내가 놓인 환경에서 마음이 맞는 새 친구가 생기기도 하고, 자연스레 멀어져가는 친구도 있다. 친구를 '관리'하는 일은 내가 괜찮고 의리있는 인간임을 세상에 공표하기 위한 전시용 우정 관계에 가깝지 않을까. 밀물과 썰물 사이에서 어느덧 내 곁을 여전히 자연스레 지키고 있는 그 사람이 지금의 내 사랑스러운 벗이다. p233


전에 같이 작업실을 하던 선배가 정확히 밤 10시가 되면 지인들(주로 여자들이었던 듯)의 전화번호가 주욱 적혀있는 수첩을 펼쳐들고 시시콜콜 한명 한명에게 안부 전화를 하던 것이 기억이 난다. 똑같은 멘트로 리스트의 대상자에게 안부를 묻는데, 당시는 그 선배의 모습이 너무 웃기기도 했지만 대단하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 저렇게 사람 관리를 잘할까?(여자 관리;;) 나는 죽었다 깨어나도 저렇게 손수 수고스럽고 다정하게 일일히 전화를 해서 관계의 끈을 팽팽하게 만들어놓지는 못할꺼야.


사실 인간 관계에 있어 소위 말하는 '관리' 차원의 행동은 내 성격과 맞지도 않았지만 그렇게까지 할 많거나 다양한 관계도 없었다. 결국 사람을 만나고, 그 사람과의 관계를 이어가는 행위 중 가장 나다운 방식을 찾은 것은, 스스럼없이 내 옆에 있는 사람, 부담없이 내게 다가와있는 사람에게만 최선을 다해 잘해주는 것이다. 굳이 내가 '관리'를 해야지만 내 옆에 있을 사람에게까지 내 감정 소모와 수고스러움을 쓰고 싶지 않았다. 아니 솔직히 귀다.


나는 인간 관계라는게 과거에는 어땠었고 미래는 어떻게 될지 정말 모르겠다. 그냥 지금 내 옆에 있는 좋아하는 사람들이, 나와의 관계를 피곤하게 느껴 스스로 떠나가지 않는 이상, 그 사람들에게만 잘해주고 싶다라는 생각이다.


우리의 짧은 인생에서 지금 현재의 시간을 온전히 그 사람에게만 최선을 다해 좋아하는데 쓰고 싶다. 내게 인간 관계라는건 '관리'가 아닌 옆에서 일상을 함께 즐겨주는 소소한 '정'에 더욱 끌리는 것 같다.





자발성, 관대함, 정직함, 성실함 그리고 공정함.


임경선님이 살면서 가장 신뢰하게 된 이 5가지의 삶의 태도가 각자의 일상에 어떻게 조합되고 적용되어야 좀더 나은 사람이 되는지 모르겠다. 이것이 지침으로서 발제된 것이 아니길 바란다. 이 세상 사람 수 만큼이나 각자 다른 삶의 태도가 있을 것이라 나는 추측하기 때문이다.


어쨌든 내가 생각하는 내 삶의 태도는


각자 다름을 인정,
다름에 대한 존중,
존중한 만큼 배려,
배려 속에 사랑,


내 일상과 주변 관계된 사람들 속에서 '인정과 존중' 그리고 '배려와 사랑'을 통해 가치관을 세우고 그 토양 위에서 나 자신을 살아가게 하고 싶었다.


그러나 요즘 드는 생각은 세상에 대한 고정된 시각이나, 자기 자신에 대한 고정관념은 삶의 태도를 너무 경직되어버리게 만드는 것 같다. 아무리 태도의 기준을 가지고 살아간다 해도 인간은 계속해서 생각하고 변화하며 성장하기 때문에 모든걸 한계지어 삶을 그 틀에 맞춰 살아간다라는 자체가 모순이지 않나 싶다.


삶의 태도에 기준을 가지고 필요한 부분들의 목적대로 살아가는 것도 좋지만 가끔은 비껴서서 다른 거닐기를 해보아도 조금은 일상이 재밌어지지않을까 싶다.


모르겠다. 나는 앞으로도 내가 가진(가질) 삶의 태도대로 살 것이고, 그것이 굉장히 준수하거나 존경스럽지 않은 모습일 지라도 다른 사람들의 일상에 피해를 주지 않는 선에서 작은 판타지를 자주자주 만들어가며 살아갈 것이다.


소소하지만 나에겐 드라마틱하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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