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분히 채널을 돌리다 보게 된 '슬로우 비디오'란 영화의 한 장면 중, 차태현이 자기가 살고 있는 동네를 끄적이 듯 그린 손그림이 나오는데, 오호라... 낙서 같지만 뭔가 그림체가 예사롭지 않아 혹시 알려진 '작가'가 그린 게 아닐까 하는 호기심이 생겼다. 급한 성격에 바로 검색을 해봤더니 역시나 '엄유정'이라는 작가님이 그리신 그림이었다.
이 그림이 '슬로우비디오'에 나온 엄유정 작가님의 그림
미대 오빠 출신이라 물감 좀 짜 봤던 나는, 나름 좋아하는 그림체가 있는데 딱 그런 타입의 그림이라 호기심이 무지 팽창 팽창하여 전광석화같이 엄유정 작가님의 프로필과 작가 홈페이지를 뒤지기 시작했다. 그 결과 현재 을지로 쪽에서 전시회 라이브 중이라는 것과 몇 권의 책을 내신 사실을 알아냈다. 전시회는 조만간 짬을 내어 다녀오기로하고 출판하신 책은 다음날 바로 서점에 들러 구입하여 읽기 시작했다.
그 책은 바로 '나의 드로잉 아이슬란드'
나는 워낙 겨울을 좋아하기 때문에 겨울이 길고 긴 나라에 대한 판타지스러운 동경이 있다.
작년에 tvN에서 봤던 '꽃보다 청춘_아이슬란드'편을 통해 겨울 왕국 '아이슬란드'에 완전 반했고, 그 어마어마한 눈과 얼음이 펼쳐져있는 자연 풍광 속에 4륜 구동 레인지로버를 운전해 눈보라를 헤치며 은백색의 평원을 달리는 내 모습을 꿈을 꾸기 시작했다. 상상만 해도 멋지고 멋진 순간 이리라.(꿀꺽. 아.. 생각만 해도 침 넘어간다)
이 책은 화가인 저자가 우연히가 아닌 나름 계획적으로 아이슬란드 북부 시골 마을에서 열린 '아티스트 레지던시' 프로그램에 참가하면서 그 이야기가 시작이 된다. 40여 일간의 여행기라 할 수도 있고 체험기라 할 수도 있는 내용이다.
(아티스트 레지던시란? 회화, 비디오, 드로잉, 퍼포먼스, 시나리오 작가 등 예술 관련 분야에 종사하는 이들이 얼마간 특정 장소에 거주하며 작업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말한다)
이름도 어려운 아이슬란드 북부의 작은 마을 '올라프스피외르뒤르'에 도착한 저자는 '리스트 후스'라는 작은 레지던시 예술 공간에 모인 각기 다른 나라, 각기 다른 분야의 작가들과 만나 새로운 경험들을 펼쳐나간다.
<한 달 동안 그려낸 36개의 아이슬란드의 산>
아이슬란드란 거대한 화폭에 자신의 영혼을 붓삼아 담아낸 그림과 글은 책을 미처 다 읽기도 전에 나를 넋 놓게 만들었고 나도 그러한 프로그램에 참여하고 싶다라는 부푼 희망을 갖게 했다. 뭐 참여할 만한 자격(?)도 없지만 말이다.
어쨌든 이렇게나 조용하고 외진 외국의 시골 마을(게다가 추운)에서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들과 호기심과 모험심 속에서 살아본다는 것은 대단히 새로운, 그리고 판타지스러운 경험일 것이다.
이곳저곳 여행을 다녀와서 당시에는 그렇게 깊게 생각하지않았거나전혀 느끼지 못했던 것들이 불현듯 일상의 어느 순간에 감정으로 솟구쳐 올라 나를 각성시켜 줄 때가 있다.
루틴 하게 보내지는 하루 속에 지루함과 심심함이 내 영혼을 장악하여 원래 내 인생은 이런 날들이 더 많았었지 그래 당연한 거야 하며 납작해진 나를 다독이며 처량(?)하게 살아가고 있을 때, 갑자기 예전 여행 갔던 곳의 풍경이, 만났던 사람들이, 먹었던 음식들이, 고생했던 모험들이 뭔가에 걸려 넘어진 듯, 컥하고 내 안에서 밖으로 뱉어내질 때가 있다.
그때, 눈물 나게 반가운 그 기억이 나를 또렷하게 일으켜 세워 뭔가 모르게 주위 환기를 시켜준다. 그리곤 다시 뭔가 재미있는 걸 꾸며 보려는 계획을 잡으며 흑백이던 일상을 일거에 컬러풀하게 생기를 불어넣어 준다.
회사 앞 신호등을 건너다가, 문득 지난 여행지에서의 일상이 사무치게 그리워 질 때가 있다.
엄유정 작가님 역시, 아이슬란드를 다녀온 후 일상에 매진하고 있던 어느 날, 망원동의 한 골목에서 갑자기 아이슬란드의 그 하얀 '풍경'이 울컥 내뱉어졌다고 한다. 그리고 그 기억이 희미해지기 전에 그곳에서의 경험한 어느 '심심한 아름다움'에 대해서 기록해야 하겠다는 신념이 생겨 이렇게 책을 내게 되었다고 한다.
여행의 경험이란 게 그런 것 같다. 다닐 때 좋고 다녀와서 꺼내볼 때 좋고, 그리고 기억을 못 하던 여행의 크고 작은 경험들이 어딘가 내 몸속에서 돌아다니다가 뭔가 내 삶의 각성이 필요할 때 툭 튀어나와 해답까지는 아니더라도 뭔가 영감과 힌트를 꺼내어 줄 것 같다라는 믿음? 그리고 그렇게 얻어낸 영감과 힌트가 동기부여가 되어 심심한 일상에 물든 내게 뭔가 엉큼하고 재미있는 것을 또다시 시작하게 되는 작은 시발점이 되곤 한다.
동네 아주머니들과 저녁 식사 중 인물 크로키..얼마나 재미있는 대화가 오고 갔을지 느껴진다.
만났던 공기, 만났던 풍경, 만났던사람들 모두가 느긋하게 기억되는 지난 여행 속 일상이 정말 그리울 때가 있다.
특히, 우연히 TV나 인터넷 등 미디어를 통해 여행 갔던 곳의 풍경이나 음식이나 일면식도 없는 그곳의 사는 사람들이 나오면 '와~~'하고 기쁨과 반가움의 탄식이 나온다. 나 저기 가봤는데, 나 저기서 뭘 먹었었는데, 나 저 사람들 사이를 걸었었는데, 와.. 와.. 신기하다 하며 호들갑을 떤다.
그리고 그곳에서의 일상이 확~하고 어제 일처럼 생생해진다.
그리고 잠시 생각한다. 나는 현실에서 이렇게 살아가는데 그 여행 중 만났던 그 풍경과 그 거리와 그 사람들은 지금 어떤 모습으로 일상을 보내고 있을까? 나를 기억하고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