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쿠니 가오리의 힘이 느껴지는 이야기
함께 살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함께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행복해.
실재의 도쿄타워는 생각보다 로맨틱하게 생기지는 않았다. 책을 읽으며 도쿄타워를 머릿속에 그렸을 때는 꽤나 로맨틱한 직선과 곡선의 건축물일 것이라 생각했었지만,
책을 다 읽었을 무렵 아침이 밝아오기 시작할 때 부랴부랴 찾아본 영화 속 실재 '도쿄타워'는, 을씨년스럽고 성냥개비로 만든 것 같은?그리 낭만적이지 않은 건축물이었다. 그냥 거대한 송전탑 같았다.
(이 감상문을 쓴 훗날, 일본 여행을 갔었는데,
실물로 본 도쿄타워는 생각보다 괜찮았었다 :)
책도 재밌었고, 영화도 재밌었다.
특히 영화는 각색이 들어갔기에,
중간 몇몇 부분과 마지막 부분들이
보다 드라마틱한 진행으로 마무리가 지어졌다.
영화에서의 마무리는 꽤 괜찮았다 생각한다.
물론, 책에서처럼 독자가 행복한 상상을 할 수 있는
결말을 남겨놓는 것도 괜찮았지만 말이다.
내가 읽어본 일본 소설의 대부분이 그렇듯이,
'도쿄타워'는 소소히 진행된다.
급박한 기승전결보다는 느린 호흡으로 여유가 있고,
다음 상황을 마음 졸이며 기다리지 않아도 된다.
불륜이란 치명적인 내용임에도 불구하고,
불안 불안한 상황이나 긴장감이 폭발하는 상황도 별로 없다. 웬만하면 상대 배우자에게 들켜 개 맞듯이 맞고 질질 짜던가, 아니면 다른 상황으로 관계의 급박한 반전이 필요할 듯한데.(한국 드라마처럼)
'도쿄타워'에서의 불륜은
(죄송하지만) 너무나 낭만적이고,
(인정하기 싫지만) 너무나 섬세하다.
감히.
'불륜' 이란 단어를 쓴다는 자체가
더 민망스럽다. 웃기지도 않게 말이다.
20대의 '토오루'와 40대의 '시후미',
20대의 '코우지'와 30대의 '키미코',
두 연상녀와 연하남의 사랑을 비교, 교차하며
소설은 진행이 된다.
'토오루'와 '시후미'의 이야기는 매우 낭만적이다.
음악이 있고, 시가 있고, 배경이 있다.
달콤한 속삭임과 애틋함이 녹녹히 드러나있다.
그에 반해 '코우지'와 '키미코'는 매우 정열적이다.
빨간색 피아트와 플라멩코가 있고,
충동적이고, 직선적인 기분이다.
나는 두 관계 중에서
단연, '토오루'와 '시후미'를 더 흥미 있게 읽었고,
그들의 관계를 읽는 내내 샘을 내기도 했다.
너무나도 애틋했기 때문이다.
그들의 심리 표현이나
서로에게 던지는 대사들은
너무나 멋지고, 또한 낭만적이었다.
재밌는 것은 영화 '도쿄타워'의
시후미는 정말 베스트 캐스팅이었다.
내가 책을 읽는 내내 머릿속에 그렸던,
시후미의 인상이 그대로 적중해버린 그런 캐스팅이었다.
영화에 나오는 '도쿄타워'는
그들의 사랑을 지켜보는 사랑의 여신 인양
중간중간 출연(?)을 해준다.
눈이 내리는 밤에도
도쿄의 야경 속에도,
항상 그들의 중간에 모습을 드러낸다.
말없는 도쿄타워는
섬세하고 고혹적인 시후미와
순수와 젊음의 토오루를
가녀리게 그리고 쓰라린 시선으로 내려다본다.
사랑은 하는 것이 아니라 빠지는 것이다.
그들은 그렇게
자신들의 관계를 부정(不貞)이 아닌,
순수(純粹)라는 것으로 납득시킨다.
그럴까?
머리를 굴려서 꾸민 것이 아니라,
가슴이 시켜서 빠진 것이기에,
그들의 사랑은 불륜이 아닌
순수로 거듭날 수 있었던 것일까?
소설이란 것은,
글이란 것은,
참으로 사기꾼이다.
현실에서는 선데이서울에서(모르는 세대가 있겠지만;;)
불륜에 빠진 주부의 체험기로 표현될만한 이야기들을
어쩌면 이렇게 낭만적이고, 가슴 아프고, 아름다운..
세상에서 가장 애틋한 사랑 이야기로 만들어 낼 수 있을까?
소설의 힘이다. 글의 힘이다.
에쿠니 가오리의 힘이다.
내가 에쿠니 가오리를 경외하는 것은
사회적 규범과 인식의 굴레에서 벗어난 주제를
정말 아무렇지 않게 바로 옆에서 사소하게 일어나는
일상인 양 전달해준다라는 것이다.
사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의 보편적 일상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아니지만 누군가의 일상에서 벌어진 일이고,
또한 벌어질 수 있는 일을 소재로 삼는 것은
공감과 비공감의 괴리의 줄을 아슬아슬하게 타게 만들어
이도 저도 아닌 이야기로 전락할 수 있는데,
그녀는 그것을 위험한 '동경'과 위험한'일상'이 아닌
배고프면 편의점 가서 컵라면 사 먹는 정도의
소소한 사람들의 앞가림 행동처럼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그것이 존경스럽다.
('반짝반짝 빛나는', '낙하하는 저녁'만 봐도 그렇다)
소설을 쓴다는 것.
참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한다.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
알지 못하는 지식들,
상식 밖의 이야기들..
그리고 이것들과 자신의 일상의 테두리 안에서 축적한
알량한 경험과 편협할 수 있는 상상력을 결합하여,
비현실이지만 그럴 수도 있겠다 싶은 현실에 근접한 공감대를 그려내야 한다. 그래야 읽는 사람들이 흥미로워하고, 공감하고 또 감동하는 것이다.
'근사한 로맨스 소설을 쓰겠어.
꽤 낭만적이고, 꽤 고급스러운'
그런 생각이 언제나 머릿속에서
나에게 영감을 얻어오라고 시키지만,
도통, 나는 영감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러나 '도쿄타워'가
나에게 뭔가 구체적이진 않지만 어렴풋한 영감을 주었다.
어떤 사랑 이야기를 써야 할까 꽤 까탈스럽게
사랑의 소재를 고르던 내게,
사랑은 사랑일 뿐이지 이미 빠져버렸다면,
그걸로 충분히 아름답고 낭만적이라는 것.
사랑이란 소재는
변질되었거나, 유통기간이 지났거나,
시궁창 속에 들어있다 해도,
사랑의 본질을 꿰뚫어 보는 감성만 있다면
얼마든지 고귀하게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
사랑은 역시 굉장한 거다.
세상의 숫자로 계산하기 힘들고
세상의 글자로 표현해도 모자르다.
그래서, 아직 내가 소설을 못쓰는 걸까?
아직 터무니없이 닿지못했다.
글을 휘두를 수 있는 경험과 상상력.
# 라스트 씬, 파리의 어느 광장.
토오루를 찾아간 시후미의 마지막 대사,
내일 토오루의 마음이 멀어진다 해도,
오늘 너를 사랑해
결국 '도쿄타워'의 결말은
두 사람에게 오늘의 행복을 주지만,
앞으로는 어떻게 해야 할까 하는 조마조마함을 묘하게 남겨놓았다.
두 사람 사랑의 애틋함과 더불어 그 위험한 관계에 대한
묘한 여운을 남겨두어 상큼하게 책을 다읽어 낸 독자들에게, 짓궂게도 불안감을 살짝 안겨준 채 책을 덮게 만들었다.
이 또한 에쿠니 가오리의 힘이다 :)
영화에 나오는 Norah Jones의 'Sleepless nights'
너무 너무 좋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