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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뢰렉신 Mar 01. 2016

마음속의 마음, 그리고 그 속의 마음

시끄러운 내 마음 속 바닥까지 내려가 봤다.

도통 내 마음을 모르겠다.

무엇을 생각하는 것인지,

무엇을 원하는 것인지,

그리고 무엇을 하려는 것인지,


인셉션의

꿈속의 꿈, 그리고 그 속의 꿈처럼

내 마음도 몇 단계의 레벨 밑으로 내려가버려서,

과연, 내 마음의 진실이 무엇인지,

알 수가 없었다.


어떤 마음이 진실이고, 현실의 마음인지

나의 토템으로 확인해봐야 하는 것인가?

아니면  '킥'으로 한방에 현실의 마음으로 돌아와야 하는 것일까.


그러나 부정할 수 없는 것은,

마음속의 마음이든,

그 속의, 속의, 속의 마음이든,

모두가 내가 생성해낸 마음이라는 것이다.

모두가 나의 원초적  인격으로부터 출발한 마음이라는 것이다.


마음의 틀  '스키마'로부터

나의 모든 생각을 나만의 해석으로 재 창조하고 있다.

그것이 나의 모든 경험과 기억을 제어하고 있으며,

그로부터 나는 어떠한 마음을 갖기 시작하고,

그 마음이 나의 행동을 창출해 내기 시작한다.


마음의 옳고 그른 것은 애당초부터 없었다.

우리들 각자에게는 자기만의 진정한 현실(real world)이 있다.

따라서 진정한 현실의 존재는 이 세상 사람들  숫자만큼 많다.


우리 모두 각기 다른 현실 속에서 살고 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다면,

타인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나의 마음에도 좀 더  관대해질 수 있을 것이다.


마음속의 마음, 그리고 그 속의 마음이라 해도,

부정하지 말자.

그 모든 것이,

진실한 '나' 이니까.


그러니까 당신이나 나나  마음먹은 대로 살자고,

웃기지도 않으니까.                




 40대에 들어서면서 부터,

나는 마음이 조급해 지기 시작했다.


해야할 것들, 해보고 싶었던 것들,

지금쯤이면 이루어져 있어야만 했던 것들,

그런 일련의 마음 속 테스크와 결과물들이

뒤죽박죽 정리가 안된 채,

시간이 흘러가버린 것만 같았다.


나는 대단한 사람이 되어있어야만 했다.

주변의 시선이나 관심에 상관없이

내 스스로 납득이 될만한 사람이 되어 있어야만 했다.


그것이 채워지지 않은채로

하루하루를 지내는 것이 차마 견디지 못할

두려움의 행보였다.


마음을 다스리고자 했다.

최대한 내 자존감을 낮춰보려했다.

세상에서 제일 초라한 인간으로 떨어뜨려 으깨버리려 했다.

마음속 마음의 벽 끝까지 나를 몰고가보니,


내가 내가 아니고,

너가 너가 아닌 단계까지 다다름을 느꼈다.


나는 왜 인생을 꽉쥐고만 살려고 했었을까?

느슨한 손아귀에서의 인생도

하나의 방법이라는 것을 왜 몰랐을까?


마음속의 마음 끝까지 내려와보니,

진짜 내 마음 속 욕망이

느슨해진 손바닥위에 펼쳐져 있었다.


'지금 처럼 살아도 괜찮아.

아니 지금보다 더 나빠져도 괜찮아.

너가 꽉 쥐지 않으면 그것은 부서지지 않을테니까.

오히려 더 부풀어 커질 수도 있을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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