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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수현 Nov 30. 2019

우울을 옅게 하는 법 - 2

가장 가까운 곳에서 오는 환멸

 나는 아빠에 대한 기억이 좋지 않다. 아주 어렸을 때는 분명 좋은 기억이 있었던 것도 같은데, 기억 저 편으로 밀려난 좋은 기억들은 다 낡아빠진 폐쇄된 놀이공원 마냥 돌아가지도 않고 화려하지도 않은 채 그냥 있었다는 것만 기억될 뿐이었다. 술냄새와 담배냄새, 사람 좋은 척 바깥에선 활발하고 가족애가 넘치는 얼굴이었다 집에 들어오면 늘 티브이 앞에 앉아 본인이 원하는 채널만 돌려대던 사람. 겉모습이 중요하고 내가 알지 못하는 -그러나 그것이 좋은 것은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일명 '사회생활'만 중요시하던 사람.


 그 사람은 화물차 운전을 했다. 멀리 가는 일이 생길 때면 집을 종종 비우기 일쑤였고, 집에 들어와서는 놀아달라고 할 새 없이 옷을 갈아입고 씻고는 술을 마시러, 또는 카드 '놀이'를 하러 나가버리곤 했다. 덕분에라고 해야 할지, 나는 초등학교 때부터 포커도 칠 줄 알았고, 훌라도 사촌들 중에서 제일 잘 쳤다. 지금도 그 이야기는 티브이 프로에 나오는 블랙코미디처럼 우스갯소리로 떠들어대곤 한다.


 밤새 놀다 아침에 들어오면 담배냄새가 가득했고, 돈을 딴 날이면 용돈을 주곤 했다. 아주 가끔, 엄마에게 현금으로 몇십 만원씩 생활비라며 줄 때도 있었다. 학교에선 급식비가 밀렸고, 우유값을 못 내는 게 부끄러워 우유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며 신청을 안 하기도 했다. 대신 친구들이 안 먹는 우유를 줄 때면 마다하지 않고 마셨다.


 겉으로 볼 때, 밥을 못 먹어서 쫄쫄 굶었다던지 옷이 없어서 겨울에 벌벌 떨고 다닐 만큼 우리 집은 가난하진 않았다. 친구들이 알았을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나는 알았다. 그게 싫어서 나는 책만 읽었다. 집에 있던 책을 꺼내 무슨 말인지도 모른 채 그냥 읽었다. 엄마가 젊을 때 읽던 낡아빠진 책과, 외할아버지가 주신 전래동화 전집을 표지가 찢어지도록 읽었다. 책을 읽을 때에는 내가 여기에 없고 책 속에 있는 느낌이 들어서였다.


 그 무렵 엄마는 아빠가 무턱대고 떡 하니 차린 가방가게를 억지로 맡아서 해야 했고, 꽤나 잘 되던 가방가게는 2002년 월드컵 시즌부터 해서 점점 안 좋아지더니 결국은 엄마에게 몇천만 원의 빚만 남긴 채 문을 닫았다. 아빠는 엄마 탓을 했다. 장사도 한 번 안 해본 사람에게. 최소한의 생활비와 학원비조차 제대로 주지 않고. 그리고 아빠는 친구가 시작하는 사업에 같이 참여했다가, 일종의 '명예퇴직'을 하게 되었다. 백수가 되었다. 집에서 나가지도 않고, 나갈 때에는 엄마에게 5만 원 있냐, 10만 원 있냐를 몇 번 물어보곤 주머니에 돈을 챙겨 넣고 나가곤 했다. 동생도, 엄마도 내가 아빠의 명예퇴직이 '술'과 '더러운 성격' 때문이라고 그때부터 생각했다는 걸 알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그때도 지금과 같이 꽤나 팔자 좋은, 있으나 마나 한, 그런 인간이라고 생각했다는 걸 말이다.


 무슨 일을 벌인 건진 모르겠지만, 아빠를 찾으러 온 추심원들이 집으로 찾아와 문을 두드리고, 1층이었던 우리 집 베란다를 왔다 갔다 하며 안에 사람이 있는지 확인했다. 나는 동생이 있었고, 엄마가 내게 말해 준 그대로 집에 오는 전화도 받지 않고 누군가 오는 느낌이 들면 조용히 티브이를 끄고 엄마 냄새가 나는 안방으로 들어가 벽과 문 사이에 동생을 데리고 들어가 두려움 속에 한참을 쪼그려 앉아있다 집이 어둑어둑 해질 때쯤이 되어서야 다시 나오곤 했다.


 언니, 이제 나가도 돼?


 물어보는 동생에게 쉿, 이라고 이야기하며 조금만 참자고 말하는 어린 내가, 고개를 끄덕이며 아무 말 않고 작게 웅크려 있는 더 어린 동생이 불쌍했다. 어쩌면 그때 때문인지, 나는 유독 전화가 무섭고 초인종 소리가 무섭다. 앞자리에 3을 막 단 지금까지도.


 나는 그다지 성실한 생활을 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늘 불안에 떨며 걱정을 사서 하면서도 죽기 살기로 노력하지 않았던 사람이었다. 그저 죽지 않기 위해 살고 있는 사람이라고 스스로를 생각해왔다. 덕분에 사회로 나가야 할 시점이 다가오자 덜컥 겁이 났고, 어학연수니 해외여행이니 하는 게 나에게는 허용되지 않는 것만 같아 지인들을 만나 그런 얘기들을 들을 때면 질투와 부러움에 속이 메스껍게 부대끼곤 했다. 그리곤 스스로를 자책했다. 열등감과 자격지심만 가득한 모습이 부끄러워 더 날카롭고 호방한 대장부인 양 굴곤 했다.


 더 이상 못 버티겠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엔 이미 4학년 1학기였다. 여름에 휴학을 하고, 20살부터 쭉 해오던 가게에서 직원으로 일을 하기 시작했다. 기본급은 작았지만, 일주일 내내 아침일찍부터 새벽까지 거의 일을 해서 그런지 주변 사람들의 얘기로 들은 월급이 꽤 많게 느껴졌다. 그리고 첫 월급을 받기 전, 그러니까 일을 시작하고 약 3주가 되었을 때 아빠는 내게 3 금융 대출을 받자고 했다. 보증을 서 달랬던가. 좋지 않은 기억이라 또렷이 남을 줄 알았는데, 그때의 감정이 낸 상처만 흉터가 되어 남고 기억은 흐릿해져 버렸다.


 어디에 나오는 착한 딸, 바보 딸처럼 순진하고 효심이 깊은 스타일은 아니었기 때문에 당연히 내 이름으로 대출이 진행된 건 없었지만, 여전히 그때를 생각하면 가슴이 턱 막혀온다. 그 뒤에 아빠는 내게 그 일에 대해 자신이 우리를 길가에 나앉게라도 하겠냐며 사회에 힘겨워하는 가장의 모습을 위장하고서 화풀이를 했다.


 학자금 대출로 학교를 다녔고, 생활비 대출로 아빠의 주유소 기름값을 메꾸는 데 보탠 적도 있다. 물론 아빠는 내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기름을 넣고 돈을 벌러 다닌 건 아빤데, 그 돈은 구경도 못하고 엄마는 주유소에 가서 기다려달라 울면서 빌어야 했고, 그건 아빠가 시킨 일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런 엄마의 속에서 곪고 있는 구정물 같은 감정을 그대로 지켜보고 때때로 받아주어야 했다.


  그 사이 내 속에서는 느리게 자라나는 가시덤불처럼 구불구불한 환멸이 자리했다. 아빠는 늘 내가 예민해서 그렇다고 이야기했다. 내가 느끼던 공포와 두려움, 불안감들은 내 속에서만 가시 돋친 채 나를 찔렀고, 아빠에겐 그저 태어날 때부터 예민한 성격으로 밖에 치부되지 않는 것이었다.


 그리고 실제로도, 내가 식사 도중 '학교에 갔다왔어' 처럼 일상적인 목소리로 '내 감정이 아프다고 한다'라는 이야기를 꺼냈을 때, '너는 어릴 적 부터 항상 예민했지' 라는 말을 들었다. 덧붙여 엄마에게 한 '애가 예민한 성격인 건 알고있었냐?'와 '저번에 사주 보러 가니 너는 예민한 성격이라더라' 까지. 3연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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