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바흐, 글렌굴드 그리고 영화 쉐임
호기심과 영감은 갑자기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시작된다. 이번 감성수집의 시작은 짧은 영상이었다. 영상 속에서 남자는 한밤 중에 도심을 달리기 시작한다. 어떤 이유인지 무슨 영화인지 드라마인지도 모르지만 그 안에서 느껴지는 고독감과 외로움, 복잡하고 미묘한 감정에 압도당해서 몇 번을 돌려봤다. 그 느낌을 더 배로 증가시켜 준 것은 배경에 깔리는 음악이었다. 스타카토처럼 끊기는 음과 음이 이어져 단순하게 느껴지는 피아노 선율이 더 깊은 쓸쓸함을 표현해주고 있는 듯했다. 그것을 찾기 시작했다. 어떤 영화인지 그리고 정확히 무슨 음악인지 궁금해졌다.
https://youtu.be/5wI6OX8BkL0?si=KOmUIPnIekr847Xw
영화는 스티브 매퀸 감독, 마이클 패스벤더와 캐리 멀리건 주연의 쉐임(Shame)이었다. 섹스중독자 브랜든(마이클 패스벤더)의 이중적인 생활에 감정적 애착이 심한 여동생 씨씨(캐리 멀리건)가 들어오면서 그의 삶은 위기를 맞게 된다. 영화 중반에 씨씨와 유부남인 자신의 상사와의 관계가 시작되면서 브랜든은 집을 뛰쳐나와 달리기 시작한다. 그때 배경 음악이 바로 피아니스트 글렌굴드가 연주한 바흐의 Prelude in E minor, BWV 855 이였다. 화려한 기교 없이 담백하게 연주되는 글렌굴드의 피아노 소리가 그 장면과 너무 잘 어울려서 브랜든의 복잡한 심정에 더 이입될 수 있었다.
The purpose of art is not the release of a momentary ejection of adrenaline but rather the gradual, lifelong construction of a state of wonder and serenity
- Glenn Gould -
글렌굴드는 1932년 9월 25일생 캐나다 출신 피아니스트로 독특한 음악해석법, 악기를 다루는 습관, 삶의 양상으로 유명하다. 결벽증이 심해서 계절에 맞지 않는 외투와 장갑을 끼고 다녔으며, 항상 아버지가 만들어 주신 약간 낮게 제작된 의자를 가지고 다녔다고 한다. 특히 그는 녹음작업을 할 때 특유의 흥얼거림이 특징으로 그 앨범을 듣고 있으면 작게 허밍 하는 그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처음에는 약간 이상하게 들리다가 점점 그 흥얼거림이 음악의 일부처럼 자연스럽게 느껴진다. 글렌굴드는 1950년 당시에 유행했던 낭만주의적인 기교 넘치는 음악기법을 좋아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간결하고 명료한 고전주의 음악을 더 선호하였고, 그의 음반 중에 가장 높은 평가를 받고 있는 것들이 바흐를 연주한 음반들이다.
https://youtu.be/3GbEAW3I7ME?si=6o0cWGGXLM1puvYJ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나도 모르게 차분해지는 듯하다. 가을을 타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한데, 평소보다 약간 센티한 기분이 든다. 그래서 평소에는 그냥 지나갔을 영상도 눈에 들어오고 지나쳤을 음악이나 가사도 내 이야기처럼 느껴진다. 글렌굴드의 음악은 이 계절에 너무 잘 어울린다. 그래서 집착하듯 찾고, 듣고, 본 것 같다. 그 이후 달리기를 할 때 BWV855를 가끔 듣는다. 딱딱 떨어지는 박자가 뛰는 박자와 비슷해서 더 잘 달려진다. 또, 얼마 전에는 회현역 LP가게에 가서 글렌굴드의 바이닐을 난생처음으로 구입했다. LP 플레이어도 없는데 말이다. 재밌고 멋진 친구를 알게 된 것 같아서 앞으로도 자주 그의 행적을 찾아다니려고 한다.
그 짧은 영상을 통해서 가을에 잘 어울리는 감성을 선물 받은 기분이다. 나는 바흐의 Prelude in E minor, BWV 855로 시작했지만 가장 유명한 것은 골드베르크 변주곡 BWV 988이다. 양들의 침묵, 설국열차 등 다양한 작품에서 이 음악을 사용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한 번쯤 들어보기를 추천한다.
https://youtu.be/G7EEACEefH0?si=miBBRsz-UjnlmoeF
Q. 우연히 보게 된 영상이나 듣게 된 음악에 매료된 적이 있나요? 그것들은 당신에게 어떤 느낌을 주었나요? 또 그 그와 연관하여 어떤 것을 해보았나요?